퇴계 바로알기
삶
탄생(이윤희 씀)
-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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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 생
백두산으로부터 한반도의 등줄기를 이루며 태백산맥이 흘러 내려오다가 한 줄기는 그대로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고 또 한 줄기는 소백산맥을 이루어 서남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태백산이 장군봉 국망봉과 문수봉을 거느리고 점잖게 자리 잡고 있다.
이 태백산으로부터 남쪽으로 100여 리 내려가노라면 금강산을 조금 뽑아다 놓은 듯 아름다운 12봉우리들이 늘어 선 청량산을 만난다.
이 청량산 자락을 감돌며 계곡 물이 강을 이루어 흘러 수십 리를 내려가면서 도산 12곡을 이룬다. 그 중간 지경에서 토계 계곡물을 받아들여 합쳐서 도산서원 앞을 지나는데, 그 토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동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온혜 마을에서 남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는 야산 밑에 노송정이라는 집이 있다.
★ 퇴계 선생은 이 집에서 음력으로 단기 3834년 11월 25일 추운 겨울에 탄생하였다. 이제 와서 양력으로 계산하면 1502년 1월 13일에 해당하고 간지로는 신유(辛酉)년이며 조선 왕조 연산군이 임금 자리에 오른 지 7년째가 되는 때이다. 그 때 이 마을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라고 불렀다.
이 시기는 새로 등장하던 사림 세력을 무오사화를 통하여 억눌러버린 훈구 세력들의 아첨에 힘을 받아서 연산군의 비뚤어진 정치가 날로 심해지고 있던 때이다. 16년 뒤에 중종의 비가 되어 명종을 낳고 명종 즉위 초 8년간 수렴청정을 하는 등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조선의 측천무후로 불리는 문정왕후가 태어난 때이기도 하다.
3년 전인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그 때까지 정치 세력을 쥐고 있던 이른바 훈구세력이 새로 등장하는 사림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을 사형하고 귀양 보내는 네 번의 사화(士禍; 사림의 불행한 사건) 중 첫 번째의 사화이다. 이때의 훈구세력은 세조와 성종 때에 권력을 얻어 부귀를 누리고 있는 귀족들이었고 사림은 김굉필, 김일손 등 김종직의 문하생들과 정여창 등 새로 등장한 학자들이었다.
훈구세력인 이극돈이 실록청 책임자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하다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자료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이 세조가 단종을 내치고 임금 자리를 빼앗은 것이 잘못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이극돈이 훈구의 대표인 유자광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그것을 빌미로 하여 무덤에 묻혀 있는 김종직과 그 제자들은 물론, 「조의제문」이 실록 자료로 들어가는 데 연루되거나 알고도 고하지 않은 많은 사림을 제거하였다. 그리고는 유자광이 이극돈조차 제거하고 연산군 시대의 최고 실세가 되어 폭정을 부추기게 된다.
그리하여 경상도 산골에서 퇴계가 태어난 연산군 7년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유자광을 탄핵하는 상소들이 속속 제출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간(臺諫)뿐만 아니라 정승들도 사직서를 내고 물러나는 일이 이어진다.
백성들이 술렁이자 1502년에는 경상 전라 지방의 백성들을 평안 함경 지방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퇴계 선생의 아버지는 성을 이(李) 이름을 식(埴)이라 하였으며 진사 자격을 갖고 있는 39살의 선비였다. 어머니는 춘천 박씨라 불렸으며 밭일과 길쌈을 하여 남편을 돕고 집안 살림을 꾸리며 갓 태어난 아기의 형 여섯과 누나 하나를 돌보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바로 어린 퇴계이다. 아기의 아명은 서홍(瑞鴻)이고 정식 이름은 황(滉)이라 불렀다. 아명이란 어린이를 집에서 보통 쉽게 부르는 이름이고 정식 이름이란 공식적인 기록에 사용하는 관명이다. 어린 퇴계는 이마가 매우 넓어서 그의 삼촌 이우(李堣)는 그를 ‘이마 넓은 아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어린 퇴계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고 있던 어느 날 꿈속에서 중국의 성인인 공자라고 느껴지는 노인이 집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 집 대문에는 오늘날까지 ‘성인이 찾아 오셨던 문’이라는 뜻으로 성림문(聖臨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어린 퇴계의 성은 진보(眞寶) 이(李)씨인데, 그 시조는 고려 말기에 동해안 진보 마을에 살면서 생원 시험에 급제했던 이석(李碩)이다.
이석의 아들 자수(子脩)는 어린 퇴계에게 5대조가 되는데, 고려 말 홍건적이 쳐들어온 것을 물리치고 수도였던 개성을 되찾을 때에 정세운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송안군이라는 높은 벼슬을 받았으며 그 아버지 이석까지도 밀직부사라는 벼슬을 받았다. 뒤에 해안을 자주 침범해 오는 왜구들을 피하여 안동으로 옮아 살았다.
어린 퇴계의 고조부는 운후(云侯)인데 자수의 둘째 아들이다.
증조부는 정(禎)인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세종대왕이 평안도 지방을 평정할 때에 큰 공을 세웠다.
조부는 계양(繼陽)인데 예안현 부라촌으로 옮아 살다가 어느 날 스님의 도움을 받아 온계리에 집터를 잡고 다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계양은 성품이 맑고 깨끗하며 번거롭지 않아서 출세할 일에는 힘쓰지 않고 농사와 낚시를 하며 자손들 교육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아버지인 식의 장모 남씨는 남편이 일찍 돌아가자 집안에 예전부터 모아 두었던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사위가 공부를 좋아하여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보고는, “책이란 선비의 집에 있어야 마땅한데, 우리 집 아이들은 이 많은 책들을 가질 능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전부 사위에게 주었다. 이 시대에는 책이 귀하였다. 식은 이에 힘을 입어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그는 성품이 고상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처신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아 역시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지내면서 글만 읽었을 뿐 과거 보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번 시험에 떨어지곤 하였다. 어린 퇴계가 태어나던 해에야 비로소 진사 시험을 보아 합격하였다. 진사라는 것은 벼슬이 아니고 글읽는 학자라는 것을 공인받는 하나의 자격이라고 보면 된다.
그는 “여러 자식들 가운데에서 내 뜻을 받들어 지키고 내가 하던 일을 이어받는 아이가 나온다면, 나는 비록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을지라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속마음을 표시하였다.
또한 “나는 밥 먹을 때, 잠 들 때, 앉거나 서거나 글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같이 한가롭게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이래서야 어찌 뒷날에라도 성취할 수 있겠느냐?”라고 자식들을 타이르기도 하였다.
(이윤희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