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어린 시절(이윤희 씀)

  •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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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뜻을 세우다[立志]

 

1. 어린 시절

 

2세(1502년 임술壬戌)

어린 퇴계는 태어난 다음 해 여름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들도 찾아오지 않아서 형제들이 글을 읽다가도 찾아가 물을 곳이 드물게 되었다.

그 때에 맏형은 장가를 갔으나 나머지 형들은 아직 어려서 홀로 된 어머니가 한 편으로는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고 한 편으로는 아이들을 키우게 되었다.

어머니는 특히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에 힘을 썼다.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훌륭한 분을 따라 배우게 하여 학문하는 일을 이루어 주었다. 또한 아버지 있는 남들보다 더욱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여 법도 있는 생활을 몸에 익힐 수 있도록 이끌고 밀어 주려고 힘을 다하였다.

어린 퇴계가 뒷날 어른이 되어 어버이의 일을 기록한 글을 보면, 어머니가 일찍부터 어린 자기의 성품이 세상살이에 잘 맞지 않을 것을 아시고서 걱정이 되어 “작은 벼슬에 그쳐서 분수에 맞게 살라”고 깨우쳤음을 알 수 있다. 어린 퇴계는 뒷날 높은 벼슬자리를 내려 받고 많은 제자들이 따르는 대 학자가 되어서도 이 깨우침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헛된 이름에 쫓겨 이리 저리 자리를 옮아 다니게 되어 어버이의 남기신 가르침과 본받을 만한 행실을 땅에 떨어뜨리고 저버림이 지나쳐서 불효자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또한 작은아버지인 이우는 이 때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진주 목사로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그들 형제를 친자식처럼 생각하면서 기르고 가르치고 타일러 주었다. 어린 퇴계의 셋째 형 의(漪)와 넷째 형 해(瀣)가 작은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글을 배웠다.

 

6세(1506년 병인丙寅)

중종 원년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른바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이보다 2년 전 연산군 10년인 1504년 갑자(甲子)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 등이 무사를 규합하여 먼저 임사홍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大妃: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왕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1488~1544; 연산군의 이복동생)을 맞아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으로 옹립하였다. 중종반정이다.

연산군이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공신들의 재산인 공신전을 거두어들이고 노비까지도 빼앗으려 하였다. 그래서 조정 대신들과 연산군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이 틈에 임사홍이 권력을 잡을 야심을 품고 외척 신수근과 가까이 하면서 연산군에 아부하여 함께 연산군의 욕심을 채워줄 음모를 꾸몄다. 공신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른 말로써 임금의 감정을 건드리는 신하들도 함께 제거할 수 있는 계략을 찾아낸 것이다.

임사홍이 성종 때에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은 경위를 연산군에게 알리자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마음을 먹는다. 윤비 폐위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궁중에서는 성종의 후궁이던 사람들과 그 자식들을 죽이고 조정에서는 김굉필·정창손・정여창·남효온 등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사림들을 많이 처벌하였다. 무오사화에서 귀양으로 그쳤던 김굉필 등은 이 때에 사형을 당하고, 이미 무덤에 들어 있던 정여창 등은 부관참시를 당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에서는 사림들 뿐만 아니라 재산을 갖고 있던 훈구 공신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 사화로 세종으로부터 성종까지 국가적인 노력에 의하여 꽃 피려던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연산군의 실정은 건국의 이념이기도 한 유교적 왕도정치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끈질긴 의지의 사람들에 의해 중종반정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임금의 탐욕과 간신의 야욕과 충신 선비의 충절이 뒤 얽혀 피를 튀기는 조정과는 멀리 온계 마을에서는 어린 퇴계가 동네 노인을 찾아가서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아침에 세수하고 머리 빚고 몸을 단정히 한 뒤에 선생님 집 울타리밖에 가서 그 전날 배운 것을 되풀이 외운 뒤에 집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앞에 무릎 꿇고 인사를 드린 뒤에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8세(1508년 무진戊辰)

둘째형이 손을 베어 피를 흘리자 형을 끌어안고 운 일이 있다.

어머니가 “정작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퇴계는 “형제는 같은 기를 받아 한 몸과 같아요. 형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데 어찌 동생이 아프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어린 퇴계는 이미 사람이 타고난 도리를 몸으로 깨닫고 있다고 말하였다.

 

12세(1512년 임진壬辰)~14세(1514 갑오甲午)

높은 벼슬살이를 하던 작은아버지가 늙으신 그 어버이 곧 퇴계의 할아버지・할머니[계양繼陽]를 모시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래서 넷째 형, 사촌 동생 등과 함께 작은아버지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어린 퇴계는 이때에 참다운 학문의 길을 가르침 받게 되었고 사람의 도리에 대하여 많은 것을 깨달았으며 깊이 있는 철학적 사색을 시작하였다. 어느 경우에나 사람들로부터 높은 인정을 받았다.

점점 글읽기를 좋아하게 되어 사람이 많은 방안에서도 혼자 벽을 향해 돌아앉아서 글을 읽곤 하였다. 열네 살 때에 이미 도연명의 시를 즐겨 외우고 그 사람됨을 존경하며 그리워하였다.

 

 

15세(1515년 을해乙亥)

샘물 속의 가제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지었다.

 

돌 지고 모래 파니 절로 집이 생기고,

뒷걸음 처 앞으로 나가는 발도 많구나.

평생을 한 움큼 산골 샘 속에서

강과 호수 물 얼마인가 묻지 않노라.<가제[石蟹]>

 

이 시를 보노라면 마치 퇴계 선생의 늘그막 시절을 보고 있는 듯함을 느끼게 된다. 이 때에 이미 그가 일생을 살아갈 모습을 마음속에 뜻 세우기[立志] 시작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7세(1517년 정축丁丑)

사람의 양심과 본성을 보존하고 기르며 스스로를 돌이켜 살펴서 인격을 완성해 나가는 도학(道學)이라는 학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에 뜻을 두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옛 책을 읽거나 호젓이 앉아서 마음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이 방면의 선배나 스승이 없었고 그 스스로도 뚜렷한 요령을 알고 있지 못한 채, 마음만 앞서 가다가 병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성장기 내내 퇴계에게 아버지의 역할과 스승의 역할을 함께 맡아주던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제부터 참으로 스스로의 길을 홀로 걷게 된 것이다.

작은아버지 우(堣)는 송재(松齋) 선생이라 불리었는데, 중종반정 때 입직 승지로서 공이 있어 정국공신으로 인정받고 벼슬살이에서 참판까지 올라갔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오기도 하였었다. 1515년에 안동부사를 맡게 되어 안동으로 내려와 살고 있었다.

 

18세(1518년 무인戊寅)

이미 하늘과 땅과 우주의 근본 이치나 마음의 본래 모습 등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 상당히 깊어졌음을 드러내는 시를 읊는다.

 

물가엔 이슬 맺힌 풀 싱그럽고

깨끗이 청소한 작은 샘물도 맑아서

구름 날고 새 지나며 바탕을 서로 엿보건만

때때로 제비 물결 찰까 두렵네.<들샘[野池]>

 

숲 속 오두막, 만 권 책 홀로 사랑하며

한결같은 마음, 십 년이 넘으니

요사이 어쩌면 근원에 부딪힌 듯

마음속에서 태허를 보네.<마음속을 읊음[詠懷]>

 

뒷 시에 나오는 태허란 말은 크게 비어 있다는 뜻으로서 우주의 가장 근본 되는 바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9세(1519년 기묘己卯)

봄에 과거시험의 첫 관문인 지방 시험에 참가하였는데, 그러기 위하여서는 관명뿐만 아니라 자(字)를 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대에는 관명은 그것을 존중하는 뜻에서 함부로 부르지 않고 그 대신 자(字)라고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을 지어서 평시에 부르던 풍습이 있었다. 언제부터 사용하였을 지 확실치는 않지만 젊은 퇴계 이황의 자는 경호(景浩)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세 번째 사화인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의 폭정을 떨쳐버리고 중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서 다시금 사림을 뽑아 쓰게 된다. 현실에서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이 실세를 잡고 있었으므로 새롭게 등장하는 사림들과 세력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사림들은 조광조를 정점으로 하여 유교적 왕도정치의 이념 아래 도학적 윤리 도덕을 최고 가치로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 주장이 지나치게 강경하여 공신인 훈구세력들의 재산과 명예를 다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유명한 학자들까지 별 가치 없는 문장에나 매어있다고 명예를 깎았다. 또 한편으로는 궁중의 내명부에서 신봉하고 있던 도교 궁관을 철거하면서 도교를 말살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에게도 어려운 도학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철인(哲人)이 되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결국 궁중과 조정에 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고 마침내 중종으로부터도 귀찮고 싫증이 난다는 느낌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훈구세력인 남곤・홍경주 등이 계략을 꾸며 궁궐 후원의 넓은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가진 한자를 조각내어 走肖爲王이라 새기고 벌레가 파먹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을 빌미로 조씨가 역모를 꾸미고 있음이 계시되었다고 하여 조광조를 따르는 세력들을 반역죄로 얽어 처형하였다. 이렇게 하여 도학의 이념을 실현해보려는 꿈을 가졌던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 간 것이 기묘사화이다.

  (이윤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