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학문과 교육의 시절

  •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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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교육의 시절

 

 

조정에서는 사림들이 차츰 다시 세력을 굳혀서 도덕정치의 이상을 실현해보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여러 신하들이 이황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여 그 원만한 학문과 고상한 덕행을 펼 수 있게 하자고 하였다. 온 나라의 선비들로 하여금 참다운 선비의 기풍을 갖추게 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5월이 되자 임금으로부터 ‘안심하고 몸 조리 잘하여 언제든지 좋으니 올라오라’는 명과 함께 음식물이 내려왔다.

6월13일에 이웃하여 살면서 의지하고 존경하며 따랐던 이현보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슬퍼하는 시 두 수를 지어 올리면서 슬피 울었다.

여름이 깊어질 때에 아들 준이 경주로 벼슬자리를 옮겨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셔 둔 집경전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이 무렵 남쪽 여러 해안에는 왜구들이 자주 쳐들어 와서 사람을 다치고 물품을 빼앗아 갔다. 이현보 선생도 생전에 왜구들의 세력이 커져서 성 하나 정도는 빼앗길 염려가 있다고 걱정하였었고 퇴계도 동쪽 서쪽 점점 더 심해질 우려가 있다고 근심하고 있었다.

준에게 편지를 써서 ‘갑자기 일어날지도 모르는 왜구들의 변란에 대하여 미리 준비를 하라. 언제든지 변란이 나면 태조의 초상화를 바닷가인 경주보다 안 쪽 땅으로 잘 보호하여 옮길 태세를 갖추고 있어라’고 가르쳤다.

겨울이 되자 손자 안도를 데리고 40년 만에 다시 옛날 소년 시절 글을 읽던 청량산으로 들어갔다. 그 시절을 되살려 한 달 정도 시를 읊으며 마음공부를 하다가 동지를 지내고 내려와 새해를 맞이하였다.

 

퇴계 선생은 책임 있는 일을 하는 벼슬자리가 아닌 중추부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것조차 미안한 마음이 자꾸만 일어나서 사양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한편, 임금은 어려운 문제들이 생겼을 때에 해결책을 생각해내는 역할을 하는 홍문관 부제학 자리를 맡아서 빨리 올라오라는 편지를 내려 보냈다. 이 번 부름은 좌의정 등 정승들이 임금에게 “이황의 사람됨이 퇴폐하여 가는 풍속을 붙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임금인 명종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은 성품이 남보다 우뚝이 뛰어나게 맑고 깨끗하며 문장력은 세상에 드문데도 세상에 이름나기를 탐내지 않고 시골에 한가로이 살고 있다. 그 물러나기를 좋아하는 뜻이 더욱 존경스러워 서울로 다시 돌아올 날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어진 사람을 찾는 나의 정성이 적어서인지 조정에 벼슬하지 않으려 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섭섭하다.

나에게 비록 높고 넓은 덕은 없지만 경은 어찌 깊은 산골에 숨어사는 것을 좋아하는가? 빨리 올라와 벼슬자리에 나아감으로써 간절히 찾은 나의 마음에 따르도록 하라.

 

부제학 자리를 사양한다는 글을 두 번 거듭 올리자 전과 같이 중추부 첨지사로 있으면서 마음 놓고 병을 잘 다스리라는 답이 내려왔다. 퇴계는 기뻐서 시 3수를 지어 놓고 이때의 심정을 말한다.

 

내 요즈음 거듭 부르시는 명령을 입었는데, 하나는 첨지요 또 하나는 부제학이다. 그러나 병이 심한 까닭에 두 차례나 사양하며 면제시켜 달라는 글을 올려서 빌었더니, 홍문관의 벼슬을 거두어 주는 명이 내리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편안히 하여 한가한 곳에서 수양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감격함을 이길 수 없다.

 

그 동안 퇴계 선생은 마치 스승처럼 존경하면서 학문을 이어받고 있던 󰡔주자대전󰡕 가운데에서 특히 학문적으로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거나 실생활에 꼭 필요한 가르침이 있다고 생각되는 편지들만 가려 뽑아서 󰡔주자서절요󰡕를 편집하고 있었다. 도학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주자대전󰡕이 참으로 좋은 책이지만 그 분량이 너무나 많고 크다. 그대로 읽는다면 오히려 주자가 가르친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렵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간추려 압축할 필요가 있어서 그 일을 시작하였는데, 이 해 여름에 편집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제자 친족들과 함께 산천을 찾아 시를 읊는가 하면 그 시대의 현자들과 편지를 통하여 철학을 토론하면서 지내는 동안 겨울을 맞이하였다. 선생은 스스로 살고 있는 예안 지방의 실제 풍습과 정황에 맞는 향약(鄕約)을 만들었다.

이 일은 당시 나라에서 희망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현보 선생이 남겨 놓은 뜻이기도 하였다. 향약이란 지방 고을에서 자치적으로 그 고을 사람들 서로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못하게 하며 어려운 일을 돕기 위하여 필요한 내용들을 정해 놓고 법령처럼 서로 지키자고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11세기 중국 북송 때에 만들어진 「여씨향약」이 주자에 의하여 더욱 수정 보완되어서 󰡔주자대전󰡕에 실려 들어왔다. 조선이 건국하면서부터 조정에서는 그 중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중종 때에는 조광조 등의 말을 들어서 지방 수령들로 하여금 고을마다 「여씨향약」을 인쇄하여 나누어주고 시행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때 퇴계 선생의 고향에도 나라의 명에 의하여 여씨향약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큰 틀에는 문제가 없이 그대로 시행할 수 있었지만 자세한 항목에 이르러서는 그 고을에 고유한 풍습과 백성들의 정서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점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온계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계(契) 형태로 실험을 해 가면서 실정에 맞는 조목들을 찾아내어 󰡔예안향약󰡕을 만들었다.

도덕적인 마음이나 일은 서로 권하자(덕업상권 德業相勸), 예절 있는 풍속을 서로 주고받자(예속상교 禮俗相交), 병이나 어려운 일은 서로 돕자(환란상휼 患難相恤)는 사항들은 하나 하나 조목으로 규정하여 실행하기에는 적합치 않다. 뿐만 아니라 현재 시행하고 있는 「여씨향약」대로 하여도 부족한 점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주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어쩔 수 없이 나무라거나 벌주기로 한 내용들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보충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머리말을 썼다.

 

……

선비 된 사람은 반드시 가정에서 몸을 닦고 마을에서 두드러진 뒤에야 부름을 받고 나라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어버이를 잘 모시고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일 처리에 속임이 없고 친구 사이에 믿음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큰 근본인데 가정과 마을은 참으로 그것을 익히고 실행해 볼 수 있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우리 시골의 선비가 타고난 본성의 도리에 근본을 두고 나라의 가르침을 지키며 가정에 있어서나 마을에 있어서나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이 바로 나라를 위하는 훌륭한 선비의 일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출세한 사람이나 차별 없이 서로 힘이 되어 나가자. ……

 

57세(1557년 丁巳)

 

차츰 큰 학자로서의 자리가 잡혀가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지난 적에 급히 지었던 계상서당이 너무 좁게 느껴졌다. 봄이 되자 서당을 옮길만한 터를 찾아 여기 저기 다녀 보았지만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고 그만 포기 상태에 있었다.

그와는 따로 금응훈 등 몇몇 제자들이 좋은 곳을 보아 놓고는 이곳에 정사(精舍)를 지어 가르침을 받겠으니 허락하여 달라고 거듭 청하였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으나 세 번씩이나 청하므로 허락을 하고는 어느 날 홀로 그 곳으로 나가 보았다.

가서 보니 뒤로는 기암절벽이 아닌 구릉 같은 산들이 잘 어울려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어서 가슴이 탁 터질 만큼 넓은 들을 이루고 있었다. 사는 집이 있는 토계 마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이루어진 터였다. 그 곳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 원대한 포부를 지닌 선비만이 가질 수 있는 끝없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찌 알았으랴.

백 년토록 숨어 닦을 터가

바로

평생토록 나물 캐고 고기 낚던

그 곁에 있을 줄이야.

 

그 뒤로 몇 차례 그 터에 나가 보고는 그 때 느낀 마음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어서 제자들과 아들, 손자에게 보여준다.

 

퇴계 시내 가에 웅크려 깃들인지

빛살 같은 세월은 얼마나 흘렀던가.

추운 보금자리 여러 차례 옮겼으나

너무나 허술하여

바람에 쓰러지곤 하였네.

 

깊은 산 속 샘물과 돌 비록 아쉬워 하지만

그 형세 좁아서 끝내 탈인지라

한숨지으며 옮길 곳 찾아서

높고 낮은 곳 아니 다닌 데 없었네.

시내 남쪽에 도산(陶山)이란 곳 있어서

가까이 숨었으니,

아름답고도 믿기지 않는구나.

어제 우연스레 혼자 와보고는

오늘은

아침부터 다 함께 와보자 하였네.

 

이어진 봉우리들 구름 위로 오르고

산허리 끊어져 강가에 기댔으며

푸른 강물은 섬 같은 들판을 거듭 에워싸고

멀리로 멧부리들 뭇 상투 늘어선 듯한데

아래로 한 골짜기 굽어 살피니

묵은 빚 갚기를 바라고 바라다가

이제야 갚은 듯하네.

 

다소곳 앉아 있는 양쪽 메 사이로는

때맞은 아지랑이 그림 속 들어오는 듯……

우거진 푸름에 안개 짙어 구름인 듯……

어지러이 울긋불긋함은 비단 융단 말리는 듯……

새 울어 아름다운 시 생각나고

샘물 고요해

산 아래 물 있는 이치 눈에 어리니

마음 느긋이 아름다움 즐김에 족하여

이렇듯 갖추어주심

대지에 감사하네.

 

나 이제 벼슬의 굴레 빠져 나와

관복일랑 걸어 둔 지 오랜데

숨어 닦음에 어찌 장소가 없으리……

땅값은 사고 팔기에 가볍고

거친 개암나무 덤불 속에

허물어진 옛 터 있어서

옛 사람의 발자취 오늘도 훈계하고 있구나.

어느 누가 이곳을 차지하였었는지……

명예도 책망도 세월 속에 지워졌도다.

 

서둘러 그려보나니

담장은 둥글게 둘러쌓고……

창문은 깨끗하고 산뜻이……

책과 그림은 현반과 시렁에 넘치고……

꽃과 대나무는 느티나무 울타리 사이에 비치게……

해와 달은 늦저녁을 깨우치고……

몸과 마음은 지칠 만큼 부지런히……

 

속으로 성실하여 세 가지 이로운 벗 바라며

바깥의 부러운 것들 지푸라기인양 잊으니

이 음악은

저 이름난 흙피리와 대피리의 화음 같구나.

 

아! 대장부의 어짊이야

쓸모없는 잡초일 수 없어

님 위하여 남 몰래 노래 부르나니

태고 적 꾸밈없던 북소리로

장단 한 번 치는 것을 빠트리지 마소서.

(도산 남쪽에 서당 터를 얻고서[卜書堂地 得於陶山之南])

 

숨어서 인격 기르는 학문을 닦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내용 속에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함께 임금도 그러한 자기의 뜻 깊은 일을 알아주고 격려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퇴계 스스로는 잡초일 수 없는 대장부요 이곳에 사당을 열어 참다운 학자를 길러내려는 일은 나라를 위하여 남몰래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7월에는 󰡔계몽전의(啓蒙傳疑)󰡕라는 책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중국 남송 때, 주자와 채원정(蔡元定)이 함께 지은 󰡔역학계몽(易學啓蒙)󰡕이라는 책 가운데에서 더욱 설명이 필요하거나 의문점이 있는 부분을 가려 뽑아서 퇴계 선생이 풀어 밝혀 놓은 것이다.

󰡔역학계몽󰡕은 ①󰡔주역󰡕이라는 책과 「하도(河圖)」 「낙서(洛書)」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우주의 운행 변화에 대한 기본적 원리[本圖書]와 ②󰡔주역󰡕의 내용인 괘가 이루어진 이치[原卦劃] 및 ③그것을 이용하여 사물이 변화하는 기미를 점치는 순서와 방법[考變占] 등을 송나라 당시의 과학과 수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풀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퇴계 선생은 스무 살에 󰡔주역󰡕을 읽기 시작하여 잠자는 것과 밥 먹는 것도 잊고 깊이 그 공부에 빠져들곤 하다가 건강을 해친 적이 있었다. 󰡔주역󰡕은 64개의 괘(卦)와 그것을 설명하는 글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을 역학(易學)이라고 한다.

역학에는 다시 책에 실려 있는 글귀들이 의미하고 있는 올바른 이치, 마땅한 이치를 밝혀내는 것을 주로 하는 의리역학(義理易學)과 괘들이 이루어진 얼개의 바탕에 깔려 있는 수학적 과학적 원리 및 그 원리가 얽히고설키며 만들어 내는 모습들의 풀이를 주로 하는 상수역학(象數易學)으로 나누어진다.

선생은 이때까지 많은 시간을 이 두 가지 역학에 바치면서, ‘이(理)와 수(數)의 학문은 넓고 미묘하며 얼키설키 뒤섞여 있어서 그 핵심을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 의심스러운 곳,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 특히 󰡔역학계몽󰡕에 있는 설명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책에 나오는 것들이 많아서 반드시 원래의 책을 찾아서 맞추어 보고 따져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 동안 혹 생각하다가 맞아떨어진 것이 있던지 옛글에서 증거를 찾아내게 되면 그 때 그때 기록하여 두었던 것인데, 이제 그것들을 모아 정리하여서 책으로 만든 것이다. 선생이 벼슬살이 할 때에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독서당에서 책을 읽으며 보낸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뒷날 선조 임금에게 올린 「성학십도」의 머리말에서 퇴계는 이(理)가 「하도」 「낙서」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학계몽󰡕을 포함하여 수많은 역학 책들을 보면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원리와 그 표면에 드러난 모습들이 신기하게 엉겨 있는 것을 터득해가면서 퇴계는 대자연과 사람을 보는 눈을 길렀던 것이다.

 

58세(1558년 戊午)

 

한양 있을 때에 김득구로부터 빌렸던 󰡔참동계󰡕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 한 해를 맞이하였다.

󰡔참동계󰡕는 연금술, 상수역학 등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전문용어들을 사용하여 내단을 수련하는 원리와 방법을 설명하여 놓은 책이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워서 주자가 해설서를 쓰기도 하였다. 심성수양에 관한 내용이 풍부히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여 퇴계가 여러 차례 이 책을 보지만 어디까지나 도학자로서 참고를 위하여 보는 것이었다. 󰡔참동계󰡕가 대단하기는 해도 나는 그 길을 갈 능력도 없고 그 길을 갈 뜻도 없다는 생각을 시로 읊으며 드러내곤 하였다

 

2월 어느 날 23살의 청년 이율곡이 계상서당으로 찾아와서 사흘 동안 묵으며 도학에 관하여 깊이 있게 묻고 배움을 청하였다.

이율곡은 천재적 재주를 타고나서 소년 시절부터 이미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훈 아래 사람의 본성과 양심을 갈고 닦는 도학을 공부하였다. 16살에 어머니를 잃은 뒤 19살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빼어난 대자연과 산 속 절 생활의 정취와 불교 경전들에 담겨 있는 내면세계를 맛보고 나왔다. 22살에 성주 목사의 딸 노(盧)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인 성주에 와 있다가 그가 태어났던 강릉 외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때에 이미 도학을 상당히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자 서로 찾는 길이 같다는 것을 느끼고는 바로 가슴과 가슴이 통하였다.

율곡은 장인으로부터 전하여 듣던 대로 자기가 지금 참다운 큰 학자를 만나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고 35살이 더 많은 퇴계 선생은 자기가 지금 두려울 정도로 세상에 드문 천재 후배를 만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율곡은 도학 수련에 관하여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방법이 어떠한 것인가 알고 싶었다. 스스로 불교 공부도 하였음을 밝히고는 퇴계 선생이 강조하는 경(敬) 공부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가르침을 구하였다.

선생은 학문의 목적이 명예와 이익을 구함에 있지 않고 본성과 양심을 닦고 길러 스스로의 인격을 완성함에 있다고 거듭 말하였다. 오랫동안 깊은 사색을 통하여 얻고 있던 마음속의 것들을 하나 하나 친절히 일러주었다. 이때 서로 나눈 시는 다음과 같다.

 

시냇물 흘러가는 곳

공자님 사시던 그 강줄기요

봉우리 높이 솟은 곳

주자 선생 사시던 바로 그 산인데

하시고자 뜻 세우심은

경전 천 권이나 되시면서

살기 위해 지으신 것은

방 두어 칸뿐이로군요.

 

가슴 속 품으신 것은

비 갠 뒤의 달처럼 이 마음 열어주시고

말씀과 미소는

미친 파도 그쳐 주셨으니

어린놈이 도(道) 듣기를 바란 것이

한나절 쉬실 시간

훔쳐 갔다 마소서.

(율곡, <퇴계 이선생을 뵙고[謁退溪李先生]>)

 

예부터 이 배움을 세상 사람들은

뜻밖이다 믿어지지 않는다 하고

이익이나 노려 경전을 팠음에

도는 날로 멀어져 갔건만

그대 홀로 할 수가 있어

깊이 그 뜻 와서 닿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 듣고

새 깨달음 일으키게 하는구려.

(퇴계, <이수재 숙헌의 계상 방문을 맞아서[李秀才叔獻見訪溪上]>)

 

율곡은 강릉으로 돌아간 뒤에도 편지를 보내어 가르침을 구하였고 선생은 편지와 함께 시를 써서 답하였다.

그러는 동안 󰡔주자서절요󰡕의 서문도 쓰고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들을 가려 뽑아 󰡔자성록󰡕도 편찬하고 용수사의 승려 법련에게는 도산에 서당 지을 일을 부탁하였다.

법련은 선생에게 서당 지을만한 돈이 없음을 알고도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스스로 경주까지 내려가 자금을 구하려 하자 선생이 무척 고맙게 생각하였다.

 

여름이 무르익을 무렵 임금이 정승들의 청하는 말을 듣고 경상 감사로 하여금 퇴계를 한양으로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감사를 통하여 임금의 부르심을 전하여 들은 선생은 시골에 물러난 채 병이나 치료하고 더 이상 허물을 짓지 않도록 놓아 달라고 사직소를 올렸다.

①어리석음을 숨기고 벼슬자리를 도둑질하거나

②병으로 쓸모없이 된 사람이 나라의 녹을 도둑질하거나

③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거나

④맡은 일을 처리해 내지 못하면서 물러나지 않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인데, 자기가 바로 그러함으로 벼슬자리에 맞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임금은 그 부르는 뜻을 거두지 않았다.

손자 안도를 데리고 충주를 거쳐 700리 길을 올라가서 9월 그믐에 한양 성안으로 들어왔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임금은 다시 성균관 대사성 자리를 임명하고는 선생을 궁궐로 불러 담비 털 남바위와 술을 내려 주면서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학교는 사회 풍속과 사람을 가르쳐 착하게 변화시키는 일의 근원이 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운이 너무나 지치고 망가져 있습니다. 선비의 풍습은 바르게 길러야 마땅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가볍게 들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어리석고 둔해서 잘 부추기고 가르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교사나 책임자들에게도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경은 글을 잘하고 청렴하며 부지런하고 조심스러워서 남을 가르쳐 깨우치는 자리에 합당하기에 이 자리를 맡기게 된 것입니다.

나의 지극한 뜻을 따라서 정성껏 맡은 바를 다하여 학교를 떨쳐 일으키고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도록 하십시오.

 

겨울이 깊어 가면서 병이 심해지자 다시 사직을 원하는 소를 올려 대사성 자리를 벗어났으나 곧바로 상호군이라는 군대 직책으로 옮겼다가 12월에 임금이 손수 임명장을 써서 종2품 공조참판 자리를 내렸다.

계속 사양하였으나 허락 받지 못하였다.

 

59세(1559년 己未)

 

가뭄과 병역과 도적으로 인하여 지방 행정이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이 무렵 황해도 옹진 지방이 심하였다. 옹진에는 정착해서 살고 있는 주민이 몇 안 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으며 관아에 일할 인원이 없어 조정에서까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보고할 정도로 행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옹진뿐만 아니라 황해도 전체에 도적이 활개를 쳤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는 형편이었다. 조정에서는 그저 도적을 잡지 않는 관찰사를 징계해야 한다는 의견이나 임금에게 올릴 뿐이었다.

소설에 의하여 조선 삼대 의적의 하나로 그려지는 임꺽정도 이때에 황해도 옹진 장연을 활동 무대로 하고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명종 14년 실록을 기록하던 역사 담당관은 이때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욕과 권세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피 기름을 짜내어 권세 있는 자리의 제상을 섬기면서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지만,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진실로 조정이 밝고 맑아서 재물을 탐하는 마음이 없고, 훌륭한 사람을 가려 수령을 삼는다면, 칼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찌 이토록 심하게 거리낌 없이 살생을 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잡아들이려고만 한다면 아마 붙잡으면 붙잡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날 것이다.

 

퇴계 선생은 봄이 되자 벼슬자리가 공조참판으로 오른 것을 조상에게 고하기 위하여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 왔다. 사당에 나가서 고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병으로 인하여 조정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기에 벼슬을 면해 달라는 사직소를 올렸다.

허락이 내리지 않아서 두 번이나 더 사직소를 올렸더니, 임금이 신하를 보호하는 의미에서 공조참판의 자리를 면제시켜 주고 역시 같은 계급인 종2품 중추부의 동지사(同知事) 자격을 내려 무임 한직을 주었다.

중국 고대로부터 송나라 때까지 성현들이 스스로를 깨우치고 채찍질하기 위하여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들을 모아서 󰡔고경중마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옛 거울은 청동으로 되어 있어서 녹이 슬거나 때가 끼면 사물이 전혀 비치지 않게 된다. 거듭 거듭 닦으면 비로소 얼굴이 선명하게 비칠 정도로 맑아진다. 󰡔고경중마방󰡕이란 옛 거울을 거듭 닦는 방법이 되는 책이라는 뜻인데, 결국 그 안에 실려 있는 깨우침 글들을 가지고 옛 거울을 닦아 스스로의 얼굴을 보듯 자기 마음을 닦는 방법으로 삼자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산을 넘어 서당을 짓고 있는 도산 현장을 둘러보기도 하고 시도 읊으면서 전과 같이 학자로서의 나날을 보냈다.

 

60세(1560년 庚申)

 

정든 대자연과 마을 사람들 속에서 조용히 예순 살을 맞아 시 읊고 글 짓는 가운데 온계 마을 풍속을 바로 잡기 위한 12조목의 마을 규약도 제정하였다.

가을에는 젊은 시절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면서부터 서로 존경하던 김인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고 울었다.

9월에는 손자 안도를 혼인시켰다.

겨울로 접어 든 11월에 마침내 도산서당이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강물을 굽어보며 방 두 개와 마루 하나의 아담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도산 늙은이’라는 뜻으로 ‘도옹(陶翁), 도산진일(陶山眞逸), 도산병일수(陶山病逸叟)’ 등의 호를 쓴다.

이 무렵부터 조선 성리학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갖는 학문적 토론이 선생과 고봉 기대승 사이에 주고받는 편지를 통하여 시작된다. 토론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지난 성현들의 책을 보면, 사람에게는 ①불쌍한 것을 측은해 하고 ②이로운 것도 사양하고 ③올바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고 ④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등 도덕적 본성의 실마리가 되는 마음이 있다.

한편, ①기뻐하고 ②노하고 ③슬퍼하고 ④두려워하고 ⑤아쉬워하고 ⑥미워하고 ⑦욕심 부리는 등 때로는 선하기도 하고 때로는 악하기도 한 감정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학문적으로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두 가지를 이루고 있는 바탕이 같은가 다른가? 두 가지의 작용이나 가치가 같은가 다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깊고도 복잡한 철학적 토론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된다.

선생은 끝까지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고 마음을 비워서 제자인 기대승의 의견 가운데 옳다고 인정되는 것은 서슴없이 받아 들여 자기의 의견을 고치곤 한다. 그러면서도 뜨거운 이상, 냉철한 이론과 뚜렷한 가치관을 강조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고봉의 마음에 점찍어주려고 한다. 평생 동안의 공부를 통하여 몸에 배인 차원 높은 이수역학적(理數易學的) 안목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스스로의 견해를 설명하고 기대승의 의견을 검토하여 지적하면서 이끌어 나간다.

그러나 노소 두 학자의 입장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두 입장을 날씨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퇴계 선생은 맑게 게인 날은 ‘아! 구름 한 점 없구나!’ 할 수 있는가 하면 먹구름 끼인 날은 ‘오호! 해가 사라졌구나!’ 할 수 있어서 두 날씨를 구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편, 젊은 학자 고봉은 맑게 게인 날에도 수증기는 그대로 하늘에 덮여 있는 것이 먹구름 끼인 날과 다름이 없으니 어느 경우나 같다고 보아야 논리적이지 않느냐는 입장을 버리지 않는다.

이 토론은 대자연과 사람의 근본바탕과 수없이 변화하는 현상(마음 현상까지 포함)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철학의 핵심문제에 관한 것으로서 조선 성리학을 철학적으로 크게 발전시켰다.

이를 통하여 퇴계 선생은 절대적인 가치와 절대적인 진리를 같이 보고 절대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실천 위주 사상체계를 분명하게 세워서 후세에 남겨주게 되었다. 논리와 실천 사이에 거리가 있음이 드러난 학문적 토론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토론 과정에서 보여준 퇴계 선생의 학문적 탐구의 태도와 조용하지만 굳세게 불타는 가치관(우주관, 인간관 포함)은 오늘날까지도 참다운 도학자들이 받들어 본받는 모범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진지하고 신성하던 학술 토론이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권력 투쟁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시작한다. 나라가 망할 때까지 당파 싸움의 도구로 전락하는 슬픔과 아픔을 겪는다. 19세기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게 되자 도학이니 인격 수양이니 하는 말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이 성리학적 토론은 그들로부터 이론을 위한 이론만을 일삼다가 나라를 망친 해로운 것이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61세(1561년 辛酉)

 

환갑의 나이를 맞는다.

이제는 제자들도 상당히 많아져서 편지로 묻고 답할 뿐 아니라 직접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늘어간다.

조카랑 손자랑 찾아오는 제자들이랑 대리고 도산서당 건축 현장에 나아가서 둘러본다.

시를 읊으며 대자연의 소리를 함께 듣고 학문을 다짐하며 성인의 길을 한 발 한 발 밟아 나가는 것이 즐거움이다.

서당 서쪽에는 학생들이 묵으면서 공부할 집을 따로 짓고 있다. 서당의 동쪽 옆에는 화단을 만들어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고 또한 연못을 판다. 그러는 동안에 거처할 방이 완성되자 책들을 옮겨 놓고 때때로 그 곳에서 밤을 지낸다.

가을 어느 날, 그 곳에서 자다가 밤에 일어나 글을 읽고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밤 경치는 마치 신선세계 같고 스스로는 바야흐로 평생 동안 희망하던 학자로서의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벅차게 밀려오고 멀리 영원한 시간 공간 속으로 울려 퍼짐을 어쩔 수 없어서 시를 읊는다.

 

텅 빈 산 속 방 하나 고요한데

밤기운 차가워서

서리 짙게 내리는 속에

홀로 베개 베었으나 잠이 아니 오네.

 

일어나 앉아

옷깃을 바루고는

약해진 시력으로 잔 글자 보느라

짧은 등불 번거로이 돋우니

글 속에 참 맛 들어 있어

살찌고 배부름에 귀한 요리보다 낫구나.

 

공중에는 반쪽 달 걸려 있어서

낮인가 놀란 새는 지저귀며

연못 바닥에는 그림자 드리우니

가서 손으로 건지고만 싶구나.

 

서쪽 정사(精舍)에는

발자취도 없이 고요한 데

숨어사는 몸이 신선 놀이 꿈꾸다가

시구 이루어지자

불러 서로 화답하니

깊고도 멀리 울리는 소리

귓가에 들리는 듯……

(산당에서 밤에 일어나[山堂夜起])

 

마침내 3년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도산서당 전체가 마치 환갑 선물인양 완성되었다.

선생이 거처할 방은 완락재(玩樂齋), 제자들을 가르칠 마루는 암서헌(巖棲軒), 제자들이 거처할 집은 농운정사(隴雲精舍)라 이름 붙인다.

이때부터 참다운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사방에서 짐을 싸 가지고 찾아오게 된다. 퇴계 선생도 더욱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가르칠 수 있게 된다.

제자들에게 스스로 편찬한 󰡔주자서절요󰡕를 강의하면서 밤이 제일 길고 낮이 제일 짧아지는 동짓날을 맞이한다.

그러자 이제부터 새로이 자라날 따뜻한 봄기운을 이미 느꼈음인지, 퇴계 선생은 󰡔도산기(陶山記)󰡕를 쓴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가 세워진 그 위치를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의 우뚝 솟음, 이어져 내려온 산맥의 흐름, 강물과 시냇물의 굽이쳐 흐름, 그 사이에 펼쳐진 들판과 모래밭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뛰어난 문장력으로 그려낸다. 또한 5년 동안 건축이 완성될 때까지 겪어 온 일들을 기록하고 집과 방과 주변 여러 장소에 붙인 이름들에 담긴 뜻을 설명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글이다.

 

62세(1562년 壬戌)

 

도산서당으로 자리를 옮겨 잡은 뒤 정말 마음이 흡족한 생활을 한다.

농운정사에 묵고 있는 제자들과 때때로 찾아오는 제자들이랑 대자연을 두고 서로 운을 맞추어 시를 읊는가 하면 우주의 진리로부터 사람의 본성과 양심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론과 그 실천 방법들을 찾아서 가르치고 토론한다.

또 한편으로 점점 많아지고 있는 학문적인 편지들에 대하여 폭 넓으면서도 깊이 있는 답장을 써 보내면서 스스로의 저술도 꾸준히 한다.

그런가하면 일상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정성과 경건함을 다하여 예절을 지키고 도리를 다한다. 100리 바깥 예천에 살고 계시는 누님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리는가하면 외조부, 장인, 장조부의 묘소를 찾아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63세(1563년 癸亥)

 

이렇게 예순 세 살을 맞은 어느 봄날, 일찍이 풍기 군수 시절부터 선생을 따르던 황준량이 성주 목사 자리를 사직하고 돌아오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참으로 슬피 운다. 황준량은 일찍부터 문장이 뛰어나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었다. 뒤에 도학에 뜻이 있어 여러 번 퇴계 선생에게 의심나는 것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여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매우 많았으며 계상서당에도 몇 번 찾아 왔었다. 선생이 참으로 아끼던 참다운 도학자였다.

슬픈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그 영혼을 위로하며 장례 때에는 제문을 지어 보내고 그의 일생을 글로 지어서 남겨준다.

 

남보다 빼어난 문장에

세속 벗어난 자태였는데

하늘은 어찌하여

이렇듯 남다른 운명을 주었던가?

벼슬살이는 정녕

물고기가 나무 오르는 나날이요

권세는 오히려

봉황새 가시덤불에 걸린 때 같아서

헐뜯음 산언덕 이루고

뭇 아첨소리 바람에 나부끼건만

집에는 가난 견딜 쌀독이 없었네.

그대 같은 늘그막 절개

더욱 존경스러움을

마음 같은 이가 뒤에 남아

혼자만 알뿐이로세.

(황중거 만사[黃仲擧輓詞])

 

선생은 겨울이 찾아 올 때쯤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이라는 책을 완성한다. 이 책은 중국 남송의 주자로부터 시작하여 명나라까지의 주자 제자들과 기타 성리학자들의 생애와 학문 내용을 간추려 놓은 철학사에 관한 책이다. 이와 같은 작업은 중국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했던 때였다.

 

64세(1564년 甲子)

 

이 해에는 조광조의 생애를 기록으로 남기는 글을 짓고 조남명의 편지를 받고 답도 한다. 마음의 바탕과 작용에 관한 서화담의 이론을 얻어 보고서 잘된 점과 부족한 점을 가려내어 다시 설명하는 글을 쓰기도 한다.

철학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설명해야 하는 편지들을 써야 될 일이 점점 많아졌지만 선생은 조금도 귀찮게 생각하지 않고 가슴을 활짝 열고 정성과 경건함을 다하여 글을 쓴다.

 

65세(1565년 乙丑)

 

4월에 임금에게 중추부 동지사의 벼슬을 풀어 달라는 글을 올린다. 임금이 “내가 여러 해 동안 이 자리를 비워 놓고 경을 기다렸건만 기어이 물러나려 하는 것은 어진 사람을 대우하는 나의 정성이 모자라는 때문이겠습니다. 경의 뜻이 이미 깊고도 간절하므로 경이 청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는 답과 함께 사직을 허락하면서 경상도로 하여금 음식을 보내주도록 하였다.

선생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를 읊는다.

이 뒤부터 ‘진성 성을 가진 시골 늙은이[眞城野老]’라는 호를 사용한다.

도산서당의 선생 방에는 깨우침을 일깨우는 글귀들을 써 붙이고 제자들에게 󰡔논어󰡕, 󰡔역학계몽󰡕과 그 󰡔전의󰡕, 󰡔심경󰡕 등을 가르친다.

그러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에 임금이 다시 중추부 동지사 자리를 맡으라는 뜻과 함께 “내가 눈과 귀가 밝지 못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란 탓인지 전부터 여러 번 경을 불렀으나 경은 그때마다 늙고 병들었다 하면서 사양하니, 나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습니다. 경은 나의 지극한 속마음을 알아서 빨리 올라오십시오”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그와 함께 나라에서 관리하는 역마(驛馬)를 탈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였다. 이 때의 사정에 대하여 실록을 기록하던 신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다.

 

이황은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며 학문이 깊고 밝아서 성현의 글을 깊이 연구하여 하늘과 사람의 진리에 통달하였다. 그가 그렇게 스스로를 길러 키운 바가 깊었기 때문에 세상에 나와서 그를 시험해 볼 때에는 청렴과 결백을 지키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동과 모습을 우러러보았으나 빠른 물결처럼 어지러운 세상살이 속에서 용감히 물러나 수풀 속에 한가로이 지냈으되 또한 집안 일로 그 마음을 더럽히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혀 오직 학문에 힘씀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 하였을 뿐, 참다운 지식과 부지런한 실천이 날로 쌓여갔다. 나이가 높을수록 덕이 더욱 높아졌으니, 한 세대의 어진 스승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 그가 불러도 오지 않거나 왔어도 머물지 않았던 것은 임금께서 어진 사람을 대우하는 성의가 부족했던 때문일 것이다.

지난 무오년(선생 나이 쉰여덟) 사이에 여러 번 임금의 부름이 있었을 때에는 이황이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사양했으나 임금께서는 그를 잘못이라 하시면서 엄한 명령을 내리었으므로 그가 어쩔 수 없이 나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가 중요한 벼슬자리를 맡을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러한 명령이 내렸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황이 비록 그가 배우고 익힌 바를 한 번 임금에게 말하여 올리고자 할지라도 임금께서는 아홉 겹 궁궐 속에 깊이 앉아서 한 번도 불러보지 않는 데야 어찌할 것인가? 나중에 정유길(鄭惟吉)이 이황을 마음에 점찍어 두고 성균관 동지사 자리를 사직하면서 ‘확실한 적임자가 있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또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와 같은데, 임금의 덕이 이루어지고 선비의 풍조가 나아가 떨쳐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진 사람이라고 불러 놓고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대우하니, 이것이 이황으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조정에 나아오지 않게 만든 이유일 것이다.

 

이 기록은 물론 사초를 적는 사람의 생각이다. 참으로 대우가 부족해서 사퇴를 고수하였는지 아니면 정말 학문이 더 좋아서였는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퇴계 선생 자신만이 알 일이다.

오늘날 어떤 학자는 퇴계가 그토록 사퇴를 고집한 것은 도학에서 추구하는 도리가 임금보다 더 중요하므로 임금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소신을 관철하기 위한 일종의 조용한 투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퇴계 선생의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조선 정치계가 도학적 가치를 최고로 신봉하는 사림들이 주도하는 풍조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66세(1566년 丙寅)

 

새해를 맞이하여 한양 성균관에 유학하고 있는 손자 안도에게 ‘참으로 극진하게 행동을 삼가라’ 타이르는 편지를 보낸다.

또한 성현들 사이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내려온 가르침의 핵심을 간추려 가지고 병풍을 만들 수 있도록 손수 써서 제자 김성일에게 준다.

한편, 농운정사에 머물고 있던 제자들을 집으로 다 돌려보내고는 임금에게 벼슬을 내린 명령을 거두어 달라는 두 번째 사직소를 올린다.

그러나 임금으로부터 허락이 내리지 않자 할 수 없이 추운 날씨가 여전한 정월 하순에 한양을 향하여 길을 떠난다.

북쪽으로 100여 리 올라가서 영주에 도착하자 병이 심하여져 더 올라가지 못하고 사면시켜 달라는 청을 올린 뒤에 며칠 동안 머문다. 그래도 허락이 내려오지 않아 다시 풍기까지 올라가서 기다린다. 그런데, 임금으로부터 ‘병을 다스려 가면서 천천히 서울로 올라오되 돌아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의 편지가 내려 왔다. 임금은 또한 궁궐에 있는 의사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약도 보내어 주었다. 퇴계 선생이 무척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한양까지 가는 거리는 더 멀지만 길은 좀 덜 험난한 문경 새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천에 다다랐으나, 더욱 아파져서 동지사 자리를 면제시켜 달라는 세 번째 사직소를 올린다. 그러나 오히려 벼슬을 올려서 정2품 공조판서 자리와 예문관 제학을 겸하라는 명령이 내려 왔다.

물러나기를 구하다가 오히려 더 높은 벼슬로 나아오라는 명령을 받게 되자 선생은 더욱 힘껏 사양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허락을 받을 때까지 여러 날이 걸릴 터이므로 객지인 예천에서 머물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길을 되돌려 안동부의 서쪽 학가산에 있는 광흥사라는 절을 찾아 들어가서 절 동쪽에 있는 정자에 짐을 푼다.

3월 초하루에 공조판서의 명을 거두어 달라는 첫 번째 상소문을 올리고 여드레 날 천등산에 있는 봉정사로 옮겨 간다. 봉정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이미 공조판서의 행차인지라 관청에 폐를 끼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안동부사, 안동판관, 풍산현감 등에게 ‘마중 나오지 말라’고 미리 통고한다. 그러고도 지름길을 택하여 남모르게 봉정사로 들어가서 병을 다스리자 아들 준이 들어 와서 병간호를 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아들도 관리이므로 공무를 저버리고 개인 볼일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또한 관청의 노비도 들여보내지 못하게 한다.

공조판서를 면해 달라고 지난번에 올린 첫 번째 사직소에 대하여는 허락이 거절되고 그 대신 마음 놓고 병을 잘 다스리면서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뜻의 편지가 내려 왔다. 선생은 바로 그 다음날 두 번째 사직소를 올리고 며칠 뒤에 예안으로 돌아온다.

돌아와 있는 동안 한양 궁궐에서는 대신들의 추천을 받은 명종 임금이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지사, 경연 지사, 춘추관 지사를 함께 맡으라는 명을 내렸다. 선생을 학문적인 일을 전부 주관할 수 있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좀처럼 올라올 의사가 없음을 느끼고는 다시 의논하여 책임 맡은 일이 없는 중추부 지사 벼슬로 다시 옮겨 있으라는 명과 함께 병이 낫는 대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의 사정에 대하여 실록을 기록하던 신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다.

 

이황이 중추부 동지사로 조정에 이름이 올라 있으면서도 스스로 물러나 한가하게 살고 있는 지가 거의 10년이 지났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에는 문정왕후께서 돌아가셨는데도 달려 올라올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맡은 자리를 면해 달라고 빌어 임금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겨우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두어 달 간격으로 높은 벼슬과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자리로 거듭 승진시켰으니, 이것이 이황으로 하여금 나아오기 어렵게 한 첫째 이유일 것이다.

 

어쨌든 선생은 여름 내내 고향에 있으면서 도산서당에도 가보고 계상서당에도 가 있으며 손자와 제자들을 가르친다. 이미 써 놓은 책 속에서 잘못 된 곳을 찾아 바로잡는가 하면 멀리 있는 제자에게 편지를 쓰기도 한다.

가을이 다가올 무렵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역시 허락되지 못하고 병이 낫거든 올라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임금은 선생을 기다리는 뜻이 간절하여 독서당의 선비들에게 “어진 사람을 불러도 오지 않음을 한숨짓는다”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한다. 또 송인(宋寅)이라는 신하를 시켜 화공을 데리고 도산서당으로 내려가 그 곳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한다. 그런 다음 다시 그 위에다가 퇴계 선생이 쓴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써넣어서 병풍을 만들게 하여 옆에 두고 본다.

 

하늘 높고 날씨 서늘하여 공부하기 좋은 가을이 되었다. 선생은 그 동안 읽고 가르쳐 왔던 󰡔심경󰡕에 대하여 그것을 얻어 읽게 된 내력과 그 내용의 훌륭한 점을 설명한 다음에 󰡔소학󰡕과 함께 그 책을 신명처럼 존경하고 어버이처럼 받들고 있음을 밝히는 글을 쓴다. 그리고 주자 이후 중국의 몇몇 대학자들의 글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논평하는 글들을 쓰기도 한다.

겨울이 짙어질 때에는 손자 안도를 데리고 용수사(龍壽寺)를 찾아간다. 옛 일들을 되새기며 좋은 벗들을 사귀라고 일러준다. 용수사는 선생의 부친이 글을 읽었고 뒤에 선생도 어린 시절 그 곳에서 글을 읽던 절이다. 이때 손자에게 지어준 시는 다음과 같다.

 

소년 시절

용수사를 우리 집 글 다락 삼아

몇 번인가 관솔불로 등잔 기름 대신하면서

어버이 가르치심 잊지 않고

날마다 경계함으로 삼았었다.

진리의 근원 여전히 아득하여

아직도 찾으면서

늙은이가 정에 이끌려 바라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