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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직언과 지식인의 몸가짐(辛 奉 承)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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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직언과 지식인의 몸가짐
辛 奉 承 (劇作家 · 藝術院會員)
1. 肯定的인 歷史觀이 先進化를 앞당긴다.
지금 우리가 나갈 길은 오직 先進化뿐이다. 군대가 강하다 하여 선진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核이 있다고 하여 선진화가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선진화가 되는 基本條件은 知識人集團이 건재하여야 한다. 건전한 지식인 집단이 있어야 나라의 格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2007년 4월이다. GNP가 어떤 사람들은 1만 8천 달러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만 6천 달러 쯤 된다는 사람도 있다. GNP가 1만 6천 달러라면 先進國은 못 되지만 먹고 살기는 괜찮은 나라에 든다. 영국의 경제학자이면서 哲學者, 社會學者로 명성이 높았던 John Stuart Mill은 그의 명저 <自由論>에서 극명하게 말하고 있다.
-국가의 價値는 필경 그 국가를 組織하고 있는 國民의 가치다. 국가의 가치는 긴 눈으로 보면 결국 國民을 構成하고 있는 개인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矮小한 인물을 가지고서는 위대한 사업은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矮小’는 몸집이 작다는 뜻이 아니라 ‘변변치 못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변변치 못한 백성들이 모여 사는 나라는 결코 先進化 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大韓民國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國民들의 價値다. 그 국민들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國家를 構成하고 있는 中心體, 다시 말하자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識見과 標準이 대한민국의 가치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변치 못하면 대한민국은 큰일을 해 낼 수 없다는 지적이다. 大韓民國의 價値는 어느 정도냐고 자문해 본다. 지난 번 KDI에서 발표한 리포트를 보면 가슴 섬뜩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은 遵法精神의 결여로 년 平均成長率 1%를 깎아먹고 있다.” 이 칼 날 같은 지적은 국가기관의 공식문서에서 거론한 것이기에 묵살할 수도 없거니와 간단하게 들어 넘길 수도 없다. 준법정신이 결여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이다.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는 큰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 거론한 대로다. 지금 우리에게 큰일이란 무엇인가. 大韓民國의 先進化다. 대한민국의 선진화는 精神的 近代化를 조건으로 성립한다. 온 국민들이 ‘정신적 근대화’를 이루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는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기가 어려운데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한심하고 참담하기 그지없다. 올 初等學校에 入學한 어린이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모자랐다. 신입생이 아주 없거나, 있어도 2~3명도의 학교가 100개교를 넘었다고 발표되었다. 12년 후의 한국에 20대가 엄청나게 줄어든다면 국가의 힘은 어디서 나오겠는가. 이 같이 참담한 사정인데도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OECD국가 중에서 꼴찌로 되어있다. 이런 나라에 외국에서 투자하겠는가. 그러니 外國人 投資率도 이미 最下位를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사정이 이지경인데도 미국에 원정을 가서 분만하고, 二重國籍을 얻으려는 젊은 여성들의 수가 연간 4천 여 명을 넘는다고 발표되었다. 모두가 고학력의 여성들이고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의 천박한 행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자신을 책망하는 선생님에게 폭행을 가 하는가 하면, 중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매질하는 일은 다반사라 한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20여 명씩이나 떼를 지어 다니면서 여중생들에게 성폭행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건도 심심치 않고, 현직 경찰관은 체포한 여성 범죄자와 술집을 전전하면서 성추행을 했다는 충격적인 기사도 있다. 탈세를 위해서 소득신고를 가장 부실하게 하는 부류가 공부를 많이 한 社會指導層인 辯護士와 醫師라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現職의 判檢事들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나 조직폭력배와 골프를 쳤다는 보도도 이젠 낯설지 않다. 나라나 社會의 紀綱이 이런 정도라면 국가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일찍이 管子는 나라를 버티게 하는 네 가지 德目이 있으니, 禮, 義, 廉, 恥가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예, 의, 염, 치의 네 가지 중에서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둘이 없으면 나라가 흔들리고, 셋이 없으면 나라가 뒤집어지고, 네 가지 모두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가르친다. 이 같은 가르침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사람들의 識見과 標準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여기에 지도자의 資質을 評價하는 尺度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朝鮮王朝가 장장 500년 동안 社稷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지배층인 선비(知識人) 정신이 전재하였기 때문이다. 어니스트 사토의 친구이기도 했던 영국인 地理學者 Isabella bird Bishop 女史가 1894년부터 4차례에 걸쳐 朝鮮國을 방문하는 冒險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에 54세의 할머니가 극동의 아주 작은 나라(그것도 망해가는) 조선에 가기 위해 몇 달 동안이나 배 멀리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감동적인 것이고도 남는다. 그 비숍 여사가 쓴 朝鮮訪問을 결산하는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읽으면 당시 참담했던 조선의 현실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낯선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던 것도 알게 된다.
-관아 안에는 조선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굴 거렸다.
-조선에서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흔히 그러하듯이, 왕은 계속해서 ‘주십시오.’ 만을 요구하는 측근자와 탐욕스러운 기생동물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당시 朝鮮의 실상을 잘 못 이해한 짧은 識見이라지만, 이쯤 되면 망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碧眼의 女性이 읽어 내린 이 같은 朝鮮官衙의 풍속을 시골관아의 衙前들을 ‘朝鮮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寄生蟲’이라고 정의한다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나 두 번째의 引用文은 잘못된 글임이 분명하다. 朝鮮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5백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國權을 유지할 있었던 것은 첫째 知識人集團이 건재하였고, 둘째 權力의 上層部가 腐敗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반론은 아주 간단하게 성립된다. 黃喜, 孟思誠, 李退溪, 李栗谷, 柳西崖, 趙重峰, 宋尤庵, 朴蘭溪, 崔勉菴 등 이렇게 적어가자면 끝이 없을 조선의 明賢들을 어찌 기생충으로 비하할 수가 있는가. 오히려 그들 知識人集團이 健在하였기에 조선왕조는 끊임없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지독하게 가난하면서도 500년 사직을 유지할 수가 있었질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執權層의 일부 知識人들은 위에 인용된 비숍 여사의 잘못된 기록을 바탕으로 오늘의 旣得權層을 당시의 부패세력과 同類로 몰아붙이면서 개혁의 대상이라고 소리친다. 歷史를 잘못 읽는 것은 읽지 않은 것만 못하다. 그래서 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고, 선무당이 칼자루를 잡으면 사람이 다친다는 고사가 있지를 않던가. 知識人 集團의 歷史認識이 나라의 先進化를 촉진한다. 나라를 統治하는 總責인 大統領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歷史認識에 투철하지 않고서는 나라가 바른길로 들어설 수가 없다.
2. 선비의 直言場인 經筵
朝鮮의 임금들은 스스로 王道를 세워나가기 위해 經筵을 소중히 하였다. 경연은 아침, 점심, 저녁에 하였다하여 朝講, 晝講, 夕講이라 한다.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밤에도 經筵官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정사에 관해서도 토론했다. 그러므로 밤에 하는 ‘경연’을 夜對라고 했다. 中宗 12년 4월 4일의 朝講에서 있었던 일이다. 特進官 李自健이 임금의 면전에서 아주 혹독한 直言을 입에 담았다.
- 강원도에는 서리가 오고 눈이 내려 보리가 얼어 죽었다하고, 여러 변괴가 나타나고 겹쳐서 끝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성상께서 성심이 지극하지 못하여 그런가 싶습니다.
自然의 災害까지도 임금의 失德에서 기인되었다는 直言이다. 절대군주인 임금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참 선비라고 한다. 이것을 요즘말로 설명하면 ‘行動을 수반한 知識人’이 된다. 선비가 없다는 것, 行動을 수반한 知識人이 없으면 社會의 紀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천박해 진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그날의 朝講에서는 靜菴 趙光祖:1482~1519) 선생의 直言도 있었다.
-(전략) 상하가 일체 되어 조정이 和氣에 차야 天災가 해소되는 법입니다. 지금 조정안에 宰相은 옳다하고 臺諫은 그르다 하여, 하나의 시비 속에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反目하여 서로 헐뜯어 위아래가 결리 하게 되니, 신은 災變이 생기는 것을 朝廷의 不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宰相은 아래 동료들 보기를 子弟처럼하고, 아래 관원은 상관 보기를 父兄처럼 하여, 상하의 사이에 꺼리고 숨기는 일이 없이 서로 바로잡고 경계하여 嚴肅하고 和氣靄靄하여진다면, 자연히 君子가 진출하게 되고, 小人은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중종 12년 4월 4일자 실록
480여 년 전에 기록된 내용이지만, 마치 지금의 우리 政府나 政黨 혹은 統治者, 閣僚, 國會議員들의 몰골을 눈여겨 살펴보고 있는 듯한 진언이라면, 역사를 읽는 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전하, 밝은 임금은 臺諫의 말을 좋아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지 않으나, 어두운 임금은 자신의 의견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臺諫의 말을 돌보지 않게 마련이옵니다. 지금 臺諫들이 간절히 논계하고 사직한 것은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 옵니다. 숭상하고 상을 주고 감복하게 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위엄으로 모두 물리쳐 사기를 꺾어 위망의 조짐을 보이시니, 이는 어두운 임금이 하는 일이옵니다. 전하의 聖德과 學問으로 이처럼 극도에 이르실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靜菴 趙光祖 선생이 살아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목격한 듯이 직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歷史가 지난 시대의 기록만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脈絡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선비의 精神은 근원적으로는 家庭에서 다져지게 된다. 또 社會에서는 이 같은 家庭에서의 訓導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선비의 직언을 상찬하게 된다.
三判書不如一大司成 : 세 사람의 판서가 한 사람의 대사성에 미치 지 못한다. 三政丞不如一大提學 : 세 사람의 정승이 한 사람의 대제학에 미치 지 못한다. 十領議政不如一王妃 : 열 사람의 영의정이 한 사람의 왕비에 미치 지 못한다. 十王妃不如一山林 : 열 사람의 왕비가 한 사람의 선비에 미치지 못 한다.
선비(山林)의 존재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社會의 通念이 아닐 수 없다. 기성사회가 가정에서의 교육을 뒷받침하는 바로 이 같은 프라이드가 젊은 선비들에게 道德的 勇氣를 갖추게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行動하는 知識人’을 양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오늘의 우리는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3. 世宗大王의 識見과 標準
世宗大王은 수물 두 살 젊은 나이에 아버님 太宗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다. 아무리 學問을 좋아하고 天性이 어질다고 하더라도 수물 두 살이면 어린 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世宗은 太宗이라는 거목 아래서 어려운 시대를 이끌어갈 威嚴과 知慧를 배웠고, 그 아버지로부터 완벽한 검증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한 나라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있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린나이가 분명하다. 청년 세종을 섬기고 받들어야 하는 政丞과 判書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기라성이나 다름이 없다. 영의정 黃喜, 좌의정 孟思誠, 우의정 朴誾 , 대제학 柳寬, 예조판서 卞季良, 병조판서 趙末生 등을 비롯하여 金宗瑞, 鄭麟趾, 申叔舟, 成三問 등 당대의 碩學들을 거느려야 한다. 이 거느림은 識見과 標準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世宗의 識見은 한 권의 책을 1만 번씩 읽어낸 독서량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의 標準은 이른바 “하늘의 가르침을 외면하지 않았고, 책 속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배우고 익힌 바는 반드시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는 朝鮮朱子學의 근본을 실천한 指導者였다. 그러므로 世宗의 완벽한 지도력은 “行動을 수반한 知識人’의 龜鑑에서 시작되었다. 또 그것은 在位期間 32年 동안 단 한 번도 변치 않았기에 爲民, 다시 말하면 民本政治를 구현할 수가 있었고, 臣僚들은 그에게 信望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리더십이라고 일컬어지는 指導力은 威嚴과 信望을 갖추어야 하고, 威嚴과 寬大함의 균형을 이루어야 소기의 성과를 다할 수가 있다. 世宗大王의 威嚴과 信望은 완벽하게 갖추어진 識見에서 나왔고, 그 識見은 엄격한 標準에 의해 實踐되었다. 그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不運하게도 무려 7년 동안을 혹독한 가뭄에 시달린다. 이때의 일은 역사는 ‘世宗의 7年 大旱’이라고 적는다. 백성들의 운명이 오직 농사에 달려 있던 시절, 요즘과 같이 灌漑의 시설마저 넉넉하지 못했던 처지에 내리 7년 동안 농사를 망쳤다면 백성들의 살길이 막연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세종은 六曹官衙의 큰 길(지금의 광화문 거리)에 가마솥을 내다 걸게 하고 都城 百姓들에게 죽을 끓여서 먹이게 했다. 그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賑恤이었다. 세종은 배고파 허덕이는 백성들의 참상을 지켜보다가 景福宮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慶會樓 근처에 이른 세종은 따르는 臣僚들에게 시름에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한다. 이때의 일을 「世宗實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임금이 경회루 동쪽에 버려둔 재목으로 別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柱礎도 쓰지 않고 茅草로 덮게 하였으니 장식은 모두 친히 명령하여 힘써 검소하게 하였다. 임금은 이때에 와서 正殿에 들지 않고 이 別室에서 기거하였다.
백성들의 고초와 아픔을 몸소 체험으로 감당하려는 청년 세종의 知行함이 여기에 이르자 신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승과 판서들은 연일 世宗이 기거하는 草家마당에 꿇어앉아 寢殿으로 들 것을 진언하였고, 왕비 昭憲王后 또한 눈물로 호소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백성들이 굶어서 죽어가는 데, 어찌 내가 호화로운 침전에 누어 편한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요즘의 政治人들이 이런 龜鑑을 알고나 있는지 자못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政治環境이 날로 弊端의 질곡으로만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배우지 싫으면 흉내라도 좀 내주었으면 하는 심정일 뿐이다. 靑年 世宗을 괴롭혔던 또 하나의 불행을 그이 치세에 國喪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는 재위 중에 아버님 太宗과 어머님 元敬王后 그리고 큰아버님 정종과 사랑하는 아내 소헌왕후와의 사별로, 재위기간(32년)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무려 10여 년 동안을 喪服을 입고 지내야 했다. 수물 여섯 살의 세종은 아버님 태종의 상중에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서 그 빗물이 무릎에까지 차이는데도 빈소의 마당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놀란 신하들이 平床을 들고 달려와서 올라앉기를 애원하는데도 이를 가납하지 않았다고 그의 <實錄>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라면, 10여 년이나 계속되는 國喪기간이 얼마나 상심되고 고통스러웠을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人間的인 苦痛과 나라의 未來를 걱정하고 대비하는 指導者의 識見과 標準이 위대한 世宗時代를 열어나간다. 그의 32년 治世가 朝鮮王朝의 전체를 관통한다 해도 과인이 아닌 것은 그가 이루어 놓은 業績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되고도 남는다.
4. 歷史와 歷史認識
茶山 丁若鏞 선생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政治를 잘 할 수가 있느냐’고. 선생의 대답은 뜻밖으로 단순했다.
-첫째는 用人이고, 둘째가 理財인데, 이 두 가지만 잘되면 청치는 저절로 된다.
用人이란 무엇인가. 君子와 小人을 가려서 쓰는 것이지만, 君子는 겸손하여 숨어살기에 눈에 잘 뜨이지 아니하고, 小人은 잘난 척하고 나대는 까닭에 잘 보인다. 그러므로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가려 써야하는 人事政策이 다스리는 자의 첫 번째 德目이요, 理財는 나라가 돈을 많이 벌어서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살게 하는 經濟政策이 성공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茶山 丁若鏞 선생이 살아 있을 때가 250년 전이라면 美國이라는 나라가 생겨나기 전인데도 이 땅에 民主的 발상, 市場經濟的 발상이 상존해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이러한 論據를 살피고, 그것을 現實에 맞게 활용하기 위해 우리는 歷史를 읽는다. 남의 나라의 歷史를 알기 전에 우리가 살아 온 우리의 歷史를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 우리의 未來를 바로 열게 하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歷史를 읽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읽은 歷史에서 歷史認識을 세우고, 그 歷史認識을 몸에 배게 하는 일은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지만, 국가에도 어려운 일이다. 가령 不正腐敗를 하다가 적발되어 견디기 어려운 고초를 당하는 가까운 친구를 보면서 혀를 차던 사람이 그 친구와 꼭 같은 일로 獄苦를 겪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었다. 歷史認識의 부족이 불러들이는 災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이웃나라 日本과 같이 韓國이나 中國과 같은 주변 국가에 수많은 고통을 안겨다 주었으면서도 그런 일에 대한 反省은 고사하고 마치 그런 악독했던 일들이 정당했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歷史認識이 부족한데서 기인된다. 日本帝國이 조선강토를 강점하였을 때, 전국의 명산에 쇠파이프를 박아 地脈을 끊으면서 나라의 運氣를 자르고, 王朝의 正宮인 景福宮의 한가운데에 朝鮮總督府의 청사를 지었다는 사실, 純宗皇帝의 거처인 昌德宮과 이웃한 昌慶宮에 動物園을 만들어놓고 그 이름까지 昌慶苑으로 바꾸면서 황제의 소일거리로 삼게 한다는 그 발상이 참으로 한심하고 경박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국에 진주한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권한은 그야말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마음대로 난도질해도 괜찮을 만한 막강한 권한이었어도 敗戰國의 임금이 기거하는 宮城 안에 占領軍 司令部를 짓기도 않았거니와 그 언저리에 接見室조차도 두지를 않았다. 이런 사실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을 깨닫지 못하는 日本人들의 歷史認識이 얼마나 경박한 가를 알 수가 있다. 歷史認識은 역사를 읽는 일과 무관하다. 아무리 진지하고 소상하게 역사를 읽을 줄 알아도 歷史認識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歷史 그 자체가 空念佛이 된다. 그러므로 역사인식은 모든 ‘道德的 機能’의 핵심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무엇 때문에 읽는가. 단순히 옛 날에 있었던 일을 알기위해서 읽는가. 아니다. 역사를 읽는 것은 다음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역사는 지난 시대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未來로 이어지는 脈絡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政治人들이 歷史를 읽어서 자신의 모국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나라의 正體性을 바로 이끌어가지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다. 法曹人들이 歷史를 바로 읽어서 母國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判決을 내릴 수가 없다. 政治의 先進化도 다를 것이 없다. 정치가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知識人集團의 道德的 健在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앞에서 거론한 대로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이 외의 다른 일에 매달린 겨를이 있는가. 없다, 나는 단호히 없다고 확언한다. 위대한 리더 世宗大王의 歷史認識으로 이 글의 매듭을 삼고자 한다.
- 대저 政治를 잘 하려면 지난 시대의 治亂의 자취를 살펴보아야 하고, 지난 시대의 治亂의 자취를 살피기 위해서는 歷史를 상고하는 것이 최선이다. ■ 신봉승(辛奉承) 약력
1933년 강릉 출생. 강릉사범,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에 시, 문학평론을 추천받아 문단에 나옴. 시나리오 <두고 온 산하> 당선.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 대종상,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장. 99'강원도 국제관광EXPO 총감독.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추계 영상문예 대학원 대우교수.
수상: 한국방송대상, 아시아영화제 각본상, 서울시문화상, 위암 장지연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 수상, 보관문화훈장 수훈.
저서: 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48권)’, ‘조선의 정쟁(5권)’, ‘이동인의 나라(3권)’, ‘난세의 칼(5권)’ 등과 역사에세이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 「직언」, 「조선의 마음」, 「마음을 비추는 거울」 등 다수.
주소: 강릉시 초당동 301번지 전화(집) 031-704-2096 연구실 723-1004 ․ FAX 733-3003
http:// www.shinb33.pe.kr e-mail shinbs33@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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