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退溪學의 國際的 振興과 課題(申 龜 鉉)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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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學의 國際的 振興과 課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申 龜 鉉

 

오늘 우리가 논의할 주제는 퇴계학의 국제적 진흥과 과제이다. 이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1, 현재 세계 속의 한국위상을 각 분야별로 간단히 점검해 보고 2. 외국이 한국을 인지하기 시작한 역사를 회고하며 3. 이 과정 속에서 퇴계학이 외국에 소개 전파된 과정을 추적 해명하고 4. 퇴계학 연구원, 국제퇴계학회 결성, 현재까지의 퇴계학 진흥사업의 결과와 성과를 분석 점검한 다음 5. 앞으로의 국내외에 있어서 퇴계학의 진흥을 위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역사적인 선례를 찾아보며 6. 현대에 있어서 퇴계학의 진흥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검토해보는 것이다.

 

1. 세계 속의 한국의 현재 위상과 외국의 한국인지 과정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은 국토가 세계 264개 국가 중 116위 인구 28위인 중위권 국가로 2006년도 세계은행 통계에 의한 인구반영 1인당 총 국민소득 세계 12위, 무역량 11위,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신장, 유엔사무총장의 배출, 노벨평화상의 수상; 세계에서 선두를 달리는 산업분야로는 철강, 조선, 전자, 자동차; 과학 분야에서는 유전공학, 사회, 문화, 예체능 분야에서는 소위 한류의 확산, 영화와 연극, 태권도의 국제적 보급, 올림픽과 월드컵경기의 개최 등으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은 오늘날 전 세계 각국에 널리 인식되어 있다. 이런 분야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역사, 문학, 사상과 같은 학술분야는 여전히 국제적인 소개가 크게 미흡할 뿐만 아니라 국내 민관기관의 인문학 연구는 심각한 침체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반면 다행하게도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는 국제적인 위상을 꾸준히 향상해 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외국이 한국을 인지한 과정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전 세계 인류가 5대양 6대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431-33년까지의 明나라 鄭和의 아프리카 진출, 145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520-1521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에도 유라시아 대륙과 유라프리카 대륙 간에는 이미 각 민족 간의 이동과 문물의 교류가 있었다. 유라프리카 대륙 간의 교류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는 로마와 이집트간의 문명교류를 지적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아세아 인국과 유라시아 대륙과의 교류 사례로는 한반도 내에 중국의 한사군설치, 백제유민의 일본유입, 인도 허 황후의 가야국 기착, 중앙아시아의 초원길을 통한 로마제국의 유리공예의 한국 전래, 신라 승려 혜초의 인도 구도기행,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서역정벌 등 한국인과 한국문물, 외국인과 외국문물 간의 교류 사례는 많으나 이 당시 한국의 국호가 서양세계에 소개된 문헌기록은 아직 학계에 알려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한국의 국호가 문헌기록으로 서양세계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원나라에 와서 17년간이나 체류하다가 고국 나폴리로 돌아간 마르코 폴로가 1298~1299년에 제노바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루스티첼로로 하여금 받아 적게 하여 세상에 공개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 제2편, 제2부, 제5장에 “원 세조 쿠빌라이 칸에 반란을 일으켰던 요왕(遼王) 나얀(乃顔)의 살아남은 부하들이 쿠비라이 황제에게 항복하여 충성을 서약했는데 이들이 초르차(Chorza 滿洲), 카울리(Kauli 高麗), 바르스콜(Barskol 靺鞨), 시킨틴주(Sikintinzu 遼의 上京) 등 유명한 네 지방의 주민들이다.” 라고 하고 제3편 2장에는 지판구(Zipangu, Japan, 일본)가 있다고 소개하였다. 여기에 처음으로 당시의 고려 국호가 서양에 알려졌다. 이때가 고려 중기이고 원 초기에 해당한다.

1392년(14세기)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어 국호가 변경되고 1592-1598년 임진왜란, 1636-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서양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임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982년에 북경에 입성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이 동양에 대한 독점무역권을 부여받아 동인도에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식민지 개척을 시작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북경에 갔던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활동하던 서양의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기독교와 서구의 문물에 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조선국의 존재를 알렸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때 동양에 와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고한 문건 속에 조선왕국을 소개한 사례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1653년 효종 4년에 화란인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다가 제주 근해에서 폭풍으로 조난하여 이 섬에 상륙한 후 1653-1666년 동안 14년간이나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일본으로 탈출한 뒤 1668년에 귀국하여 하멜 󰡔표류기 : 원제목은 朝鮮國記󰡕를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 제2부 조선의 풍물 조에 “우리는 이 왕국을 코리아(Korea, Coree)라 부르는데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조선이라 부르며 때로는 카오리(Caori)라 부른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이미 보았듯이 고려조 때의 카오리(Kaoli)라는 국호가 조선조 때에도 서양에서는 계속 그대로 사용되었고 현제에는 남북한을 공통으로 지칭하는 국제적인 공식 국호 Korea로 확정되기에 이른 과정을 밝혀주는 근거인 것 같다.

 

2. 퇴계 학의 국제적 전파

 

위와 같이 한국이 외국에 인지된 맥락 속에서 이제 퇴계학이 국제적으로 전파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

중국에는 2차에 걸쳐 퇴계학이 소개되었다. 1차는 이미 퇴계선생의 생존 시인 69세 때 (1569) 당시 聖節使 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던 제자 西厓 柳成龍 선생이 「성학십도」를 吳京이란 학자에게 전달하였고 이것이 당시의 중국학자들에게 알려져 퇴계학이 程朱學과 다르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 이외의 퇴계선생의 저술은 더 이상 보급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때 퇴계학은 중국에 1회적인 소개에 그치고 지속적으로 전파되지 못하였다.

2차는 20세기 초인 1900년대에 중국이 서양 열강 세력의 東進에 대항하기 위해 유교를 기독교와 같은 종교로 변질하고 공자를 기독교 교주인 예수와 같이 유교의 교주로 받들기 위해 孔敎運動을 전개하던 孔令貽, 康有爲, 陳章煥, 李文治 외 여러 학자들에게 퇴계와 다른 한국 유학자들의 문집이 기증되었다. 8년 뒤인 1928년에 중국 尙德學院은 북경에 여자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서 퇴계선생의 「성학십도」를 神州國粹總會의 公定第一國寶로 지정하고 몇 만 부를 인쇄 판매하였다. 이를 통해 퇴계학이 중국에 크게 전파될 계기가 마련되었으나 뒤이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격화, 일제의 만주침략, 공산정권의 수립,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퇴계학의 전파는 불가능하였다.

 

일본

일본의 林羅山, 藤原惺窩 같은 유학자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퇴계가 수정한 鄭之雲의 「천명도설」과 발문을 쓴 󰡔연평문답󰡕 간본을 읽은 바 있었으나 그 뒤 전란 동안에 약탈된 퇴계의 편ㆍ저서와 퇴계와 관련 있는 서적 총 11종이 일본에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으며 그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여 조선에서 구입하려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본에 전파된 퇴계학은 즉시 4개의 학파, 즉 남쪽 큐슈지방에는 大塚退野를 중심으로 한 熊本學派, 교도지방에는 藤原惺窩를 중심으로 한 藤原學派와 山岐闇齋를 중심으로 한 山岐學派, 東京 근처 千葉地方에는 酒井脩敬을 중심으로 한 上塚道學派가 형성 발전되었고 그 뒤 명치유신으로 이어져 퇴계의 교육사상이 일본의 현대교육의 기본정신에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사상이나 시대적 정신이 이렇게 빨리 수용 발전된 유례는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서양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중국과 고려 일본을 서양에 소개한 이후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동양진출이 활발해 지고 마테오리치가 1583년에 중국에 입국하여 󰡔천주실의󰡕와 같은 기독교 교리서를 한문으로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은 중국의 공자와 󰡔주역󰡕 같은 유교경전을 서구의 철학자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약 250년이나 늦게 현종1년 1836년 프랑스 신부 모방이 서양선교사로는 최초로 입국하였고 그 뒤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 앙베르, 샤스탕 등이 전교하다가 순교하였으며 1874년에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출간하여 서양선교들의 한국 포교활동뿐만 아니라 한국 전반에 관해 자세히 소개하였다. 하멜의 󰡔표류기󰡕와 이 󰡔한국천주교회사󰡕는 한국을 서양에 알린 가장 자세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한국의 유학이나 퇴계선생에 관한 소개는 찾아볼 수 없다.

서양언어로 출간된 기록 중에 퇴계선생을 최초로 소개한 서구인은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J. Gale)이다. 그는 1928년에 출간한 󰡔한국민족사󰡕에서 퇴계선생이 42세 때 어사로 임명되어 강원도를 순찰하던 도중 춘천에서 고려조의 隱士 李資玄이 숨어살던 淸平山을 바라보면서 지은 「過淸平山有感」이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퇴계선생을 “당시의 가장 위대한 스승The greatest master of the days"이라고 지칭하고 또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묘비문을 인용하면서 ”퇴계는 한국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Toegye is Korea's greatest philosopher“ 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퇴계선생의 중요한 저술이나 사상내용에 관해서는 더 이상의 소개가 없다. 이와 같이 구미지역에는 20세기 초에 겨우 선생의 姓諱가 알려졌다.

3차는 1970년 퇴계선생 서거 40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퇴계연구원이 설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념행사는 1971년부터 퇴계학 국제학술회의로 발전하여 2007년까지 21차로 지속되고 있다. 1983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개최된 제6차 회의 때 아직 국교가 없던 중국 인민대학의 張立文 교수가 논문만 제출학고 직접 참석하지 못 했다가 다음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제7차 대회에 참석한 이후 중국학자들의 퇴계학 연구는 오늘날까지 꾸준히 지속 확산 되고 있으며 20여 년간 총 4회에 걸쳐 학회를 초청 개최하기도 하였고 70여명의 학자들이 13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천대학의 賈順先 교수는 󰡔퇴계전서󰡕를 총 8권의 巨帙에 달하는 현대중국어로 주석 번역까지 하였다.

3. 퇴계탄신 400주년 기념과 국제적 연구의 추진

퇴계학 국제학술회의 개최현황

동양

구미

국별

회수

연도

국별

회수

연도

대만

1

1979

독일

2

1984, 1992

일본

2

1977, 1985

러시아

1

1990

중국

4

’89, ’95, ’00, ’01,

미국

1

1983

한국

9

’76, ’78, ’81, ’88, ’98, ’03, ’04, ’05, ’07

 

 

 

홍콩

1

1987

 

 

 

학술상시상

연도

회수

수상자수

국적

상의 종류

국적별 수상자수

1985

1

3

한국, 대만, 일본

학술상

대만 1

미국 2

일본 1

중국 7

한국 7

1987

2

3

한국, 미국, 중국

학술상

1989

3

3

한국, 중국 2

학술상

1991

4

4

한국 2, 중국 2

학술상

1993

5

1

중국

학술상

1995

6

1

한국

학술상

1997

7

1

중국

학술상

1999

8

1

한국

학술상

2001

9

1

미국

학술대상

1976-2007 31년간 21회

개최국수 8개국(한국, 중국, 대만, 일본, 홍콩, 미국, 독일, 러시아 )

자료배포 : 총 150게국, 2,703개 대학, 625개 공공도서관, 대학 +도서관 = 3,327 곳.

원전의 번역현황 : 1. Ten Diagrams on Sage Learning(설학십도)

2. Four-Seven Debate; Annotated Translation of Most Famous Contorversy in Korean Neo-Confucian Thought(四七論辨)

 

4. 퇴계학의 국제적 진흥을 위한 역사적 모범사례

 

1) 불교의 중국전파

인도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기 시작한 시기는 서기 1세기 초 前漢 哀帝 때였으며 대략 3단계를 거쳐 唐代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전래 초기에는 불교의 생소한 개념과 사상을 중국 고유사상인 도교의 개념이나 사상과 대비 원용하여 그 뜻을 파악하였다. 이렇게 수용 전파된 불교를 格義佛敎라고 지칭한다. 이 격의불교의 전파시기가 1단계에 해당한다. 그 뒤 서기 400년경부터 龜玆國(지금의 중국 위구르인 자치구) 출신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불경원전을 도교의 개념이나 사상을 원용하지 않고 순수한 불교적 한자 개념을 구성하고 이를 통하여 의미내용을 해석하는 번역작업을 추진하여 많은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를 통하여 중국은 불교 사상을 직접적이며 본래의 의미대로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가 2단계에 해당한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지 6세기에 이르렀을 때 중국 당나라 출신 현장(602-664)법사가 인도에 직접 가서 구도하고 16년만에 불경 520질 657部를 가져와 당의 수도 장안에 飜經院을 설치하고 그 중 73부 1330권을 번역하였다. 이것이 중국불교 전파의 세 번째 단계이다. 이때에 이르러 중국은 불교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위와 같은 세 단계의 번역은 古譯, 舊譯, 新譯으로 구별되며 전 과정을 통하여 역경의 방법도 크게 향상 발전되어 五失本, 三不易, 五不飜, 六合釋과 같은 규칙들이 성립되었다.

五失本은 인도의 원전을 중국어로 번역할 때 원문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고 변경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세부사항은 아래와 같다.

1. 원본의 어순을 그대로 살리지 못하더라도 중국어로 도치(어순을 바꿈)

2. 修飾樣式은 중국식을 따름

3. 번쇄한 설명은 삭제함

4. 계속되는 반복 구는 삭제함

5. 원 텍스트 형태를 유지하지 않음

三不易은 세 가지의 경우에는 원문을 고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1. 시대의 풍속에 따라 문장을 고치지 아니함

2. 성인의 말씀을 세속적인 데에 맞추어 고칠 수 없음

3. 말세의 천박한 사고로 부처님의 말씀을 고칠 수 없음이다.

五不飜은 다섯 가지의 단어들은 뜻이 깊고 다의적인 단어들은 음역만 하고 의역은 하지 않을 의미한다.

1. '다라니'(陀羅尼)와 같이 비밀한 뜻이 있는 것

2. '바가범'(婆伽梵)과 같이 여러 뜻을 포함하는 것

3. '염부수'(閻浮樹)와 같이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4.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와 같이 이전의 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