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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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 - 그 現代的 接點을 찾아서(許文道)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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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 - 그 現代的 接點을 찾아서 主一無適과 E. Fromm의 concentration
許文道(前統一部長官)
퇴계선생이 학문이나 교육에서 보여준 겸허를 생각한다면, 전통 道學공부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이 敬에 대해 뭔가 한마디 한다는 것은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릅쓰고 끼어든 것은, 그 동안 일본과 한국을 드나들면서 오늘 날 평균적 일본인의 심성이 만들어 지기까지 퇴계선생의 敬의 가르침이 유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여러 연구서를 들척여 보면서 우리 민족사 오늘의 과제인 克日의 확실한 열쇠가 敬주변에 있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하에서 21세기 정보화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敬의 功效에 주목하게 하느냐이고, 나아가서 수련∙정진과정에 있는 그들의 금일적 문제관심의 연장선상에서 敬의 potentiality를 어떻게 그들 앞에 제시하느냐에 있다.
며느리 방문 앞을 발뒤꿈치 들고 걷다.
먼저 우리의 일상에 남아있는 敬을 찾아본다. 민족사상의 일대 종사였던 퇴계선생은 가르침의 요체인 敬을 책상 위에서 관념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제자들이 생활현장에서 일상생활을 통해 체득하기를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졌다 해도, 현대인 특히 영남인의 일상 속에 남아있는 敬의 편린을 더듬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고 이병철씨는 「湖岩自傳」에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그 행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어머니는 언제나 남보다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돌봤지만, 며느리 방 앞을 지날 때면 행여나 그 며느리가 선잠에서 깰세라 조용조용 발소리를 죽여가며 걸었다.」 이는 湖岩어머니 안동권씨의 敬적인 사는 자세 바로 그것이다. 퇴계의 「聖學十圖」에 들어있는 敬齋箴의 구절 「땅을 골라 밟는 것이 개미둑 사이로 말을 달리듯이 하라.」를 연상시킨다. 湖岩의 조부는 퇴계학의 학맥 속에 있는 영남의 巨儒 許性齊 의 문하생이었다 한다. 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 며느리들 방 앞을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가는 敬적 분위기에서 호암이 자랐다는 사실에 우선 주목한다. 어릴 때 전통사회가 남아 있던 시골에서, 술에 빠져 있거나 노름방에 드나드는 등으로 생활이 흐트러져 있는 젊은 사람을 보면 어른 들이 이 자야 정신차려라. 정신 차리고 살아야 사람이 되지.라고 훈계하던 것을 들었을 것이다. 「정신 차리다」는 求放心과 常惺惺 의 토착화된 표현이 아닐 것인가. 생활 속에 녹아든 敬의 권속이라 해도 될 것이다. 「정신 차리다」란 말의 역사적 사용이 퇴계학 이후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일본에 좀 있어보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이 웬만큼 모여있는 중견급 이상인 회사의 사무실 분위기이다. 하나같이 찹찹하고 숙연한 것이 한국과 다르다는 느낌을 확 주었다. 그 속에 있는 일본의 직장인 하나하나는 예외 없이 마지메(真面目 진지하고 착실하게 딴생각하지 않는)하고 키쬬멘(几帳面외골수로 꼼꼼하고 차근차근한)하다는 첫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회사라도 경영한다면 데려다 썼으면 좋을 것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일본인을 바꿔놓은 퇴계의 敬
뒷날, 평균적 일본인의 이 같은 사람됨의 원천에 일본에 전해진 퇴계선생의 敬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큰 놀라움이었다. 일본의 많은 朱子學者들이 대부분의 경우, 敬공부에 대한 깨우침이 자상한 퇴계의 自省錄을 읽고서 감분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에도시대를 통해 일본 최고의 도학자며 교육자라 하는 山崎闇斎(1618‐1682)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인이 6천에 달했던 闇斎의 학문은 철저하게 실천지향이고 궁리보다는 수신을 중시했다. 闇斎의 강인한 성격과 비타협적 이상주의 구도자적 열정과 救世者적 사명감은, 그때까지 그것을 모르고 살았던 일본인의 규범의식 형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闇斎의 결정적 요목인 敬이 같은 敬이라도 朱子學의 敬이기 보다는 퇴계선생이 가르친 敬이었다는 것을 京城帝國大学 교수이기도 했던 東京大 교수 阿部吉雄 는 밝혀 놓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일본경제의 고도성장과 오늘날 세계첨단의 하이테크를 떠받치고 있는 일본인의 「마지메」와 「키쬬오멘」의 원천에 퇴계선생의 敬이 있었던 것이다. 湖岩이 한창시절 일 년의 절반을 일본에서 보내면서 한 발 앞선 일본 경제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 하였는데, 어릴 때 敬의 분위기에서 자란 湖岩이 세계정상을 가고 있는 일본경영 속에 있는 敬적 현상을 보는 순간 ‘이거다’하고 알아보았을 것이다. 湖岩은 사원연수에 세심했다 한다. 삼성의 회사 분위기가 일본의 그것과 닮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사정은 연유가 없지 않다. 「聖學十圖」를 퇴계의 대표작이라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저작이 아니라, 조선역사에서 처음으로 道의 구현자로 자임해도 좋을 퇴계가 인생의 정점에서, 소년왕 선조의 교육을 위해 제시한 공부의 요점이자 요령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년 선조의 「궁리」와「수신」을 관통하는 요령으로 제시된 것이 敬이었다. 경은 공부하는 요령이었고, 사람 되는 요령이었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해 둔다. 宋學이래 敬의 방법으로 들어지고 있는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제엄숙(整齊嚴肅), 상성성(常惺惺), 기심수련(其心收斂)을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요즈음 식으로 한번 풀어보면, 主一無適이란 「now and here에의 몰입」일 것이고, 정제엄숙은 정신집중을 유도하는데 이자세가 좋다는 것일 것이고, 常惺惺은 「민감성(sensitivity)의 지속적 견지」일 것이고, 기심수렴은 「집중(concentration)의 고도화」일 것이다. 이러고도 공부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문제는 그 실천은 쉽지 않고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 「경을 지니는 일을 실천하려는 것, 그것이 바로 경을 지니는 방법이다.」이라는 퇴계의 힌트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Art of Loving과 主一無適
여기서 우리는 主一無適(집중)을 가지고서 현대사상의 거장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을 만나고자 한다. 그는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으로 망명했던 철학자요 정신분석학자이다. 웬만한 독서인 치고 나치독일의 사회심리를 파헤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의 정신분석인 그의 「Art of Loving」은 몇 종류로 번역되어 요즘도 우리 대학생들한테 읽히고 있다. 여기 에리히 프롬을 끌고 들어오는 것은, 유학의 敬의 主一無適과 Fromm의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실천(practice)을 위한 필수사항으로 들고 있는 concentration의 의미내포가 거의 중첩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프롬의 concentration을 들척여 보기 전에 언급해 둘 것 이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 굳이 敬 비슷한 것을 찾아본다면 독일을 통일했던 프로이센 엘리트들이 강조하는 슈판눙(Spannung 심적 긴장), 18세기 이후의 전쟁에서 져 본적이 없는 앵글로 색슨계 엘리트들의 active tension(능동적 긴장), 전근대 일본의 무적(武的)엘리트 들인 사무라이들이 견지하려고 들었던 敬은 기본적으로 조선 선비들의 敬과 다르지 않다. Spannung이나 active tension이나 敬이나 이 모두는 한 시대 그 문화권에서 noblesse oblige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엘리트들의 정신의 정제 장치였다는 사실을 유의하면서 논의를 해 나갔으면 한다. 프롬이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들고 있는 네 가지 조건은 단련(discipline), 정신집중(concentration), 인내(patience) 지극한 관심(supreme concern)이다. 프롬은 사랑을 인간이 그 실존적 조건을 극복하려는 해답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란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자궁이나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이고, 그래서 분리(separation)의 고통의 감옥에서 탈출하고, 무언가에 합일하려는 원초적 욕구를 내장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사랑이다. 프롬이 사랑이라 했을 때 그건 兩性적인 합일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프롬을 따라 concentration(정신집중)을 들여다본다. 비록 사랑이 아니라 할지라도 정신집중이 기술습득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굳이 증명할 것도 없는 얘기다.
愼獨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현대문화는 정신집중을 어렵게 하고 있다. 「정신집중의 가장 중요한 단계는…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愼獨을 상기해 볼일이다.) 프롬은 홀로 일수 있는 능력(ability to be alone)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love)에 대치시켜 놓고 있다. 프롬은 정신집중을 깨어있음과도 연관시킨다.「어떤 활동이든, 정신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행한다면, 사람은 더욱 각성(awake)되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모든 활동은 졸립게 만든다. (常惺惺과 主一無適의 관계를 생각케 한다.) 프롬은 정신집중은 now and here에의 집중임을 강조한다. 정신이 집중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 지금 뭔가를 하고 있으면서,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프롬은 스스로에 대한 민감성을 정신집중에 연관시켜 놓고 있다. 「자기자신에 민감하지 못한다면 정신집중도 배우지 못한다. 」고 하고 있다. 朱子의 愼其獨 풀이는, 隱微之中에 자기 안에서 알지 못하게 자라는 人欲에 대한 민감성이 유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李允熙, 「儒家心性 수양법 분류안」東洋禮學 제18집 별쇄 p.96참고) 프롬은 정신집중과 민감성의 얼크러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의 정신은 긴장을 푼 경계상태(state of relaxed alertness)에 있고, 그것은 그가 정신을 쏟고(집중)있는 상황과 유관한 변화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 하나 유의할 것은 프롬이 민감성과 관련하여, 그것이 딱딱한 긴장이나 근심, 걱정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하는 점이다. 프롬은 민감성의 전형으로서 애기를 키우는 어머니를 들고 있다. 어머니는 큰애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그 옆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다가도, 그보다 훨씬 소리가 적은 애기 울음에는 잠이 깨어 젖을 물린다.
젖 물린 어머니의 「靜의 밭」
어머니는 불안해하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기가 보내는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깨어있는 균형상태(alert equilibrium)에 있는 것이다. alert equilibrium을 유학적으로 표현해보면 뭐가 될까. 「깨어있는 寂然不動」이나 「깨어있는 靜」에 가깝다 해도 될 것이다. 感而遂通을 향해 열려있는 靜의 밭, 그것일 것이다. 프롬은 정신집중의 수련을 위해 인도권에 연원하는 한 두가지 연습을 권하고 있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눈 앞에 있는 흰 스크린을 보려고 들 것, 그리고 모든 잡상과 잡념을 제거하려고 들 것, 그러고는 자신의 호흡을 follow하려고 들 것, 즉 호흡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follow만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느끼는 것, 더 나아가서는 sense of I 를 가지려 해보는 것, 나(I=myself)란 내 힘의 중심으로서의 나이고, 내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나이다. 프롬은 이 같은 집중 연습을 매일 아침 일어나서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20분 정도씩 실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Concentration 수련과 靜坐法
퇴계선생이 실행했고, 일본의 闇斎가 敬을 위한 수련으로서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靜坐法을 프롬이 권하는 연습과 대비해 볼 일이다. 유학에서는 사랑을 뭐라 하는가. 정자가 「사랑은 情이요 仁은 性 이어서 사랑을 인이라 할 수 없다.」고 하고, 사랑을 극기의 일환으로 억제하고 극복해야 할 喜怒哀樂등 七情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인지, 과문인지 몰라도 적극적인 사랑의 논의의 전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학십도」의 일곱번째에는 朱子가 만든 仁說圖가 들어있고, 거기 딸린 仁說에서 朱子는 「愛의 理」를 仁이라 하고 있다. 이 愛之理를 두고서 元∙明이래의 학자들이 「사랑의 根源」정도로 천박하게 일면적으로, 관념적으로 이해한데 반해, 일본의 闇斎派 사제들은 「진짜배기 사랑」, 「도저히 참을수 없는 사랑」, 「사랑이전 사랑」으로, 仁과 體用一源으로 파악하면서, 생생하고 발랄한 천지의 생명력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암제파의 사랑의 이 같은 이해가 퇴계의 西銘考證 강의의 仁의 실체에 관한 논설위에 전개된 것임을 앞에 나왔던 阿部吉雄은 지적하고 있다.
일본 儒學이 딛고선 사랑의 dynamism
여기까지 오면, 인간실존의 근원적 요구로서의 「프롬의 사랑」 과, 천지의 생명력에 뿌리하면서, 생명을 낳고 생명을 돋우려는 마음인 「仁」,그 仁의 본질인 「儒學의 사랑」 은 서로 그렇게 사이가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하나 주목 할 것은 闇斎派가 사랑을, 억누를 길 없는 천지의 생명력에 뿌리하는 생명을 낳고, 돋우려는 仁의 본질로서 파악해 보임으로 인해, 그들은 道學 실천에서 活潑潑한 dynamism의 계기를 붙들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 학파에는 도덕에 대한 두터운 신념, 실행상의 강한 意力, 촌치도 邪曲을 불용하는 순수동기의 존중 등 현저한(실천력 강한) 도학자의 기풍이 있었다. 이것이 이 학파로 하여금 그것 없이 살아온 일본인들에게 규범의식을 만들어 내게 한 것이다. 闇斎의 수법을 조금만 더 보겠다. 闇斎는 에도(江戶)시대 300년을 통해 퇴계를 가장 철저하게 읽고 배운 학자이다. 나중에는 道通의 체현자로 자임했다. 그런 그가 체득했던 주자학의 도리를 사람들에게 풀어 먹이는 데는 일본의 전통신앙인 신도(神道)를 이용했다. 闇斎는 무엄하게도(?) 神道의 저술을 통해 유교의 기초가치인 敬을 일본인이 친하기 쉽게 신성화하려 들었다. 神道 敎義의 핵심에 敬을 세웠고, 샤머니즘적 요소를 이용하여 敬 없이는 神은 내리지 않는다고 교리를 만들어 냈다. 敬에 대한 주자학적 확신 위에서 이같이 한 것이다. 급기야는 後代의 神道秘書에 日本에 태어나서, 敬을 保持하지 않는 자는 일본사람이 아니다.라고 까지 하게 되었다. 이리해서 闇斎 가 퇴계한테서 배워낸 敬은 전 일본인에게 퍼져 나갔고, 오늘날도 21세기 첨단 하이테크의 현장을 敬의 자세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사상과 윤리의 DNA속에 있는 것에 틀림없는 敬을 오늘을 뛰고 있는 학동들의 책상 위에 주저하지 말고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08.6.1.)
<참고한 책> ✦The Art of Loving, Erich Fromm, Perennial Classics, 2000. ✦「儒家心性 수양법 분류안」, 東洋禮學 제18집 별쇄, 李允熙, 2008.2. ✦성학십도, 이황 지음, 이광호 옮김, 홍익 출판사, 2001. ✦완역 心經附註, 조대봉∙김종석 공역, 以文出版社, 1991. ✦退溪先生 自省錄, 都珖淳 譯註, 1995. ✦「유교의 공부론과 덕의 요청」, 유교의 현대적 해석과 미래적 전망, 한형조, 이광호 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청계, 2004. ✦퇴계선생언행록, 홍승균∙이윤희 공역, 이원강 교열, 퇴계학연구원, 2007. ✦퇴계선생에게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 이윤희, 지영사, 2001. ✦국역, 퇴계전서 10, 「퇴계선생문집 41‐44권」, 퇴계학연구원, 2001. ✦日本 朱子学と 朝鮮, 阿部吉雄, 東京大学 出版会, 1971. ✦TOKUGAWA IDEOLOGY – Herman Ooms, 日訳 – 德川 イデオロギ‐ 黑住真, 頼住光子 등 共訳, ペリカん社, 1992. ✦誠実と 日本人, 相良亨, ペリカん社, 1998. ✦兵法家伝書, 柳生宗矩 著, 渡辺一郞校注, 岩波文庫, 2003. ✦湖岩自傳, 李秉喆, 中央日報社, 198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