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글
다산사상에 나타난 공직윤리(朴錫武)
- 등록일 2015-04-01
- 조회수 4
|
다산사상에 나타난 공직윤리
朴錫武(한국고전번역원 원장)
1. 다산에 있어서의 ‘民’의 개념
지금부터 2000년 전에 활동했던 다산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의 생존 시기와 21세기에 이른 지금의 시대에는 분명히 다르고 사회경제적인 여건이나 정치문화에 있어서도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하나의 판단기준으로 어떤 사안들을 비교하여 평가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보편적인 관점에서 사회와 역사의 주체를 어느 쪽으로 향해 가느냐에 따라 진보적 입장인가 아니면 그 반대 입장인가에 대하여 논할 수 있게 된다. 조선왕조 5백년의 긴 세월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군주(君主) 시대라는 말과 같이 임금이 나라의 주체이자 주인이고 일반 백성들은 그의 지배를 받는 객체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유교국가이던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백성을 위해서’(爲民)라는 항용의 언어가 있기는 했지만, 임금을 애워싸고 함께 통치에 참여했던 몇몇 벌열(閥閱)들이나 통치계급에 참여할 수 있었던 소수의 관료가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피치자의 입장으로 언제나 피지배계급의 서러움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압제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士)․농(農)․공(工)․(商)의 신분사회로서 확연한 계급으로 구별되는 사회체제는 일부 극소수의 사(士) 계급만이 지배계급에 속했었고, 대부분은 객체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그 때의 실상이었다.
다산은 그러한 시대의 실상을 정학하게 파악하고서, 그러한 불합리하고 반인류적인 계급과 차별의 사회에 대한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없다고 여기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가장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던 선구적인 학자임에 분명했다. 그의 유명한 논문인 「통색의」(通塞義)라는 글에서, 다산은 당시 국민의 80~90%의 인구는 버려진 상태라고 여기면서, 전 인구의 능력을 통체로 발휘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더라도 어려운 시대인데, 인구의 8~9할이 버려진 채로 어떻게 국가일이 도모되겠느냐 라는 본질적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정확한 자료를 통해서 당시 인력동원의 문제점을 열거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의당 버려진 존재들이고,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들도 마찬가지로 버려진 존재이고, 황해도와 개성 및 강화도 출신들도 완전히 버려졌었고, 강원도와 호남출신들도 절반은 버려졌었으며, 북인과 남인이야 버려지지는 않았어도 버려진 사람들이나 같았으며, 버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란 벌열 몇십가문 뿐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면서 다산은 출신 지역은 말할 것 없이, 출신 가문이나 당색에 관계없이 인재는 반드시 등용하여 크게 국가에 기여할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면서, 계급 타파의 선구적인 주장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다산이 계급타파나 지역차별의 모순을 제거하여 고른 인재의 등용을 주장한 데에는 그가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던 ‘백성’ 즉 ‘민’(民)에 대한 생각이 당시의 일반적인 지식인이나 유학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지극히 천하여 호소할 데도 없는 사람들이 일반 백성들이다. 그러나 산처럼 높고 무거운 힘을 지닌 사람들도 또한 일반 백성들이다. 백성들을 등에 업고 싸우는 사람들은 거의 굽히는 경우가 없다.”(至賤無告者 小民也 隆重如山者 亦小民也 戴民以爭 鮮不屈焉 : 牧民心書)라고 하여 힘을 합한 백성들의 주장은 외면할 수가 없다고 하여 민중의 힘이 어느 정도 인가를 분명하게 설파하고 있다. 다산은 그가 황해도의 곡산부사(谷山府使)로 부임하여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전국에 수배되어 피신해 있던 이계심(李啓心)이라는 주동자를 무죄석방 하면서 했던 말은 바로 그가 얼마나 민중의 힘을 믿었던 사람인가를 분명하게 반증해주고 있다.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사암연보)라는 판결문을 보면 다산의 백성들에 대한 사고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가를 알만하다. 정부나 지방관의 부당한 행정에 군중을 이끌고 항의했던 의로운 백성은 죄를 줄 수 없다는 논리를 지녔던 다산, 그는 분명히 시대가 변하고 있던 추이를 짐작했던 선구적인 학자였었다.
2.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
다산이 살아가던 시대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시대, 벼슬아치는 높고 백성은 낮은 지위에 있다고 여기던 때었다. 그러던 때에 다산은 관리라면 맨 먼저 백성들이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래서 중간 관리자들인 군수나 현감들이 하급관리를 감독하면서 해야할 일로서, 첫째 백성들의 일에 관계되는 잘못을 저지르면 이유 없이 가장 무거운 법, 즉 상형(上刑)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의 신체에 위해를 가했거나, 백성들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거나, 백성들의 권리에 충분한 배려를 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서는 언제나 가장 무거운 형벌, 즉 상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대단한 생각임에 분명했다. 공사(公事)․관사(官事)․사사(私事)에는 낮은 형벌이나 무죄로써 처하되, 민사(民事)에는 무거운 처벌을 하라던 그의 주장은 바로 그가 얼마나 백성들의 지위향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가를 알게 해준다. 군수나 현감의 개인적인 일에는 아무리 하급관료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할 수 없다는 그의 공직윤리도 대단한 수준이었음을 바로 짐작하게 된다.
다산이 주장했던 사외(四畏)에 대한 생각 또한 그냥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공직자라면 가장 먼저 네 부분에 대한 두려움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목민관에게는 네 가지의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위로는 감독관청을 두려워하고, 또 그 위로는 정부를 두려워하고, 또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하고는 일반 공직자들이 감독관청이나 정부에 대해서는 무서워하면서도, 실재로 가장 가까이 있는 백성이나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게 정말 문제라고 했었다. 늘 지켜보는 하늘과 가장 가까이서 살펴보고 있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먼데 있는 감독관청이나 정부를 두려워 한다는 주장, 여기서의 하늘과 백성은 일치할 수도 있으니, 실재로는 백성을 두려워 하라는 뜻이니, 이 점도 탁월한 주장임에 분명하다. 권력에 짓눌려 하라는 대로 순종하고 따르는 백성이지만, 정말로 그들이 힘을 모아 항의하게 되면 그 보다 더 큰 힘이 없다고 여겼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실히 한발 앞서가던 생각임에 틀림 없었다.
오늘날의 공직자들에게 백성을 두려워하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대단히 새삼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다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매우 큰 의미가 있고, 대단히 중요한 발상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백성들의 권리가 완전하고 무결하게 대접받고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고 여길 수 없다면, 지금에도 다산의 생각은 상당히 유효한 부면이 있다고 보아진다. 모든 공직자들이 이 점을 한번 냉철히 반성해 볼 일이다.
3. 공직자의 청렴정신
세상이 나날이 변해가면서 이제는 부정하고 부당한 공직자는 갈수록 자리를 지키고 지내기가 어려워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부당하게 금전이나 재산을 챙기거나,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하는 공직자가 남아 있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의 보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아직도 공직자들에게는 청럼한 정신이 요구되고 있고 청백한 공직자들은 만인의 존경을 받도록 되어 있는 것도 분명하다. 다산은 그의 친구의 아들이자 영암군수이던 이종영(李鍾英)이라는 사람에게 공직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육렴(六廉), 즉 여섯 글자의 비결을 가르쳐 준 바가 있다. 첫째는 재물에 청렴하고, 둘째는 색(色)에 청렴하며 셋째는 직위에 청렴 하라고 하였고, 넷째 청렴해야 투명한 행정을 펼 수 있고, 다섯째 청렴해야 공직자로서의 권위를 세울 수 있으며, 여섯째 청렴해야 강직한 공직자가 될 수 있다고 했었다. 하늘이 늘 지켜보고 있고, 백성들이 주변에서 언제나 감시하고 있는데, 청렴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공직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 오늘의 시점에서 생각해도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재물에 청렴하지 않아 뇌물이나 받아 법망에 걸리고, 색에 청렴하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며, 직위에 청렴하지 않아 월권행위나 하다가 발각되어 고초를 겪는 공직자들을 보면, 역시 다산의 주장에는 분명히 시공을 초월한 힘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한번쯤 음미해 볼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다산은 애초에 “원목”(原牧)이라는 의미심장한 논문을 써서, “목민관은 백성을 위해서 두었다.”(牧爲民有也)라고 선언했었다. 백성들이 세금을 바쳐 공직자들에게 월급을 주니까, 마치 공직자들을 위해서 백성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되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고 사역에 응해서 공직자를 도와주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주고,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라는 의미이지, 공직자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노예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직자들은 알아야 한다고 커다란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공직자의 정의(定義)를 내렸었다. “토호들의 폭력과 강압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운 대상이다. 승냥이나 호랑이의 피해를 제거하여 어리고 순한 양 같은 백성들이 마음 편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을 공직자라고 한다.”(목민심서)라고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지 않는 공직자는 공직자일 수 없다는 명확한 주장을 폈었다. 당시에 관리들은 백성들을 등쳐서 먹고살고, 백성들은 흙을 파서 먹고 살아가던 시절인데(吏以民爲田,民以土爲田), 다산은 백성을 보호해주고 보살펴서 생명․재산․권리 등에 아무런 손상이 없도록 해주는 공복들이 공직자라고 분명한 정의를 내렸던 것이다. 이점도 근대적 공직자 개념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옳은 생각이라고 여겨진다. 결국 여기서도 공직자가 청렴할 때에만 백성을 위해주는 공직자지, 그가 부패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보호자로서의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4. 기술개발
다산은 “기예론”(技藝論)이라는 글을 통해서 기술개발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들이 윤택하고 안전하게 생활하도록 위임받아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공직자라면, 의당 생각할 문제가 기술개발이라는 것이었다. 백공(百工)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선진적인 기술문명을 외국으로부터 받아드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함께 그러한 행정지도 및 시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개발에 눈을 감고 있는 공직자는 역사를 후퇴시킬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책무를 망각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국가와 정부는 말할 것 없이, 미래를 내다보는 공직자라면 반드시 기술개발과 기술도입에 온갖 열정과 정열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지금의 시대로 보아도, 역시 대단한 생각이다. 백성을 두려워하고 청렴한 정신을 지니는 정도야, 어지간한 유학자라면 생각할 수도 있었던 분야이지만, 공직자로서 기술개발에 앞장서야 한다는 대목에는 정말로 머리가 숙여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농기구를 개발하여 편하고 소득이 증대되는 농사를 짓기를 원했었고, 기중기나 거중기를 개발해서 힘이 적게드는 토목공사를 권장하였고, 직조기나 씨아를 개발해서 편리한 의복생활을 권장했던 것도 모두 그러한 맥락에서 주장했던 내용이었다. 바다를 이용한 조운책(漕運策)이나 수차(水車)제도의 개발을 역설한 그의 기술개발 정책은 21세기에 들어선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산은 그의 유명한 대저, 『목민심서』에서 다른 벼슬이야 구해서 한다 해도 책임이 큰 목민관은 절대로 구해서 할 벼슬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만큼 큰 책무가 있는 벼슬은 능력 있는 벼슬아치 중에서 발탁되어 임명을 받아야지, 자신들이 탐해서 구하는 벼슬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시의 군수나 현감은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모두 지닌 막강한 권한의 자리였었다. 그야말로 작은 나라의 군주나 같다고 다산은 말했다. 그러한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공직윤리를 철저히 준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백성에게 큰 해독을 끼치는 승냥이나 호랑이에 지나지 않으니, 공직자가 지켜야 할 큰 윤리로서는, 하늘과 백성을 두려워 하고, 철저한 청렴 정신으로 무장해서 투명하고 권위 있으며 강직한 공직자가 되어야 하고, 국부와 백성의 윤택을 보장해주는 기술개발까지 책임질 줄 아는 공직자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해 주기를 바랬었다. 실무능력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청렴과 기술개발에 역점을 두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반드시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