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國學振興院 所藏遺物로 보는 先人들의 삶(이욱)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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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學振興院 所藏遺物로 보는 先人들의 삶

이욱(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1. 조선 시대 사족의 관직에 대한 열망

 

* 조선 시대 사족의 가장 이상적인 삶: 현명한 군주를 만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노년에 은퇴하여 여생을 마무리하는 삶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 이러한 희망을 담아 제작한 것이 평생도.

 

* 성리학 : 修己治人

→ 학문을 통한 인격도야와 함께 관직을 통해 이상과 포부 실현

→ 그 방법은 관료로 진출하는 것

→ 양반신분과 家格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관직은 중요

 

* 이와 관련된 국학원의 소장 유물들: 이는 국학원에 국한된 것이 아님. 전국의 사족 가문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간직해온 자료는 대체로 가문이 대대로 관직을 하였고, 아울러 학문이 뛰어났음을 증명하는 고신과 시권, 백패, 홍패 등이다.

 

가. 백패

 

이 자료는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에 입격하였음을 증명하는 백패. 이기동이라는 인물이 1873년 3월에 시행된 소과 진사시에서 207등으로 입격하였다는 내용.

   

나. 홍패

 

1866년 문과에서 이만도가 장원급제하였다는 홍패. 이만도는 퇴계 이황의 방손이며, 양산현감 등을 역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을 일으켰고, 일제에 의해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자 단식 끝에 순국. 이만도의 선대는 대대로 예안 하계에 세거했던 명문가임에 틀림없지만, 종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장원급제하고 또 의병장으로, 나아가서는 순국을 함으로써 안동지역 양반의 지조를 대표하는 인물. 때문에 그 후손들은 이만도가 양산현감을 역임했던 것에 빗대 ‘양산댁’ 사람들이라고 불리우고, 안동 지역에서 ‘진성이씨’를 대표하는 명문가 중 하나로 자리.

 

다. 고신 교지

 

이 교지는 퇴계 이황을 대제학에 임명하는 고신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한 대제학 열 정승 부럽지 않다’는 말이 있다. 집안에 10명의 정승을 배출했다고 하더라도 대제학 1명을 배출한 집안만 못하다는 인식이다. 그것은 대제학이라는 자리가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인격과 학문을 고루 갖춘)가 임명되는 자리라고 인식했고, 그 때문에 대제학을 배출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문의 영광인 것이다.

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문가를 말할 때 통상 ‘연이 광김’이라고 한다. 즉 연안 이씨와 광산 김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명문가라는 의미이다. 세도정권의 담당자였던 ‘안동김씨’가 아닌 이 두 집안이 가장 명문가라 칭해졌던 것도 이 두 집안과 ‘전주이씨’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대제학을 배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주이씨는 조선의 왕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수가 갖는 의미가 폄하되었고, 상대적으로 두 집안이 가장 학문과 품격을 갖추었다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연안이씨와 광산김씨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이 집안 중 특정한 집안, 즉 연안이씨는 월사 이정귀의 후예, 광산김씨 중 사계 김장생의 직계만이 이에 해당한다.

 

라. 증시교지

 

이 자료는 이산두에게 청헌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시호를 내린다는 것은 국불천위가 된다는 것으로 큰 영예이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시호를 받게 되면 그 집안에서는 중국에서 수입된 최고급 종이, 두꺼운 장지위에 금박을 입힌 종이를 직접 마련하여 교지를 받아왔다. 그리고 시호를 내릴 때는 해당 인물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 함께, 시호에 들어갈 글자를 결정한다. 이 자료를 보면 이산두의 일생을 평가할 때 청淸은 더럽고 의롭지 않은 것을 피했기 때문에, 그리고 헌憲은 착한 행동을 한 것이 기록할 만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청헌이라는 시호를 내린다고 하고 있다.

 

 

2. 영남 남인의 현실과 이상

 

* 양반의 또 하나의 이상

→ 淸貧,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것.

→ 현명하지 않은 임금을 현명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간언, 그래도 듣지 않으면 과감히 자리를 박차고 초야에 은둔하는 것이 유학자의 자세.

 

그런데 현종, 숙종을 거치면서 남인의 관직 진출에는 많은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 서인과 남인의 경쟁은 현종, 숙종 연간의 예송을 거치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특히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영남 남인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689년(숙종 15),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영남유림을 대표한 이현일은 산림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는 이황에서 김성일로 연결되는 퇴계학통을 계승하였고, 정구와 장현광 이후 영남유립을 규합하여 갈암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현일은 근기남인과 결합하여 영남남인의 적극적인 정계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허적과 윤휴 등 경신환국 때 죽은 남인의 신원, 노론 핵심 인물에 대한 처벌, 김성일의 시호 개정 등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그는 민비 폐출이 논의될 때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하고, ‘중전으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스스로 하늘을 끊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이후 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광해군때의 폐모론자와 동일선상에서 의리죄인의 취급을 받았다. 그는 윤휴와 함께 노론정권으로부터 가장 철저히 박해를 받았다. 이후 그의 제자인 김성탁, 조덕린 등이 이현일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심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가뜩이나 정치적으로 취약해진 영남 남인에게 시련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것은 무신란(戊申亂)이었다. 무신란은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은 소론과 남인의 명문가 자제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과 일부 남인 세력은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련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가졌다. 경종이 영조가 보낸 간장게장을 먹고 나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결국 승하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론 명문가의 자제들인 이인좌, 정희량 등이 주동이 되어, 영조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경상도 북부 지역 유림들도 모의 과정에서 이들과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큰 화를 입을 뻔했다. 이인좌의 동생인 이웅좌가 거사전인 1728년(영조 4) 3월초에 안동에 머물러 있다가 안음으로 출발했는데 이때 권구(權榘), 김민행(金敏行), 권덕수(權德秀), 류몽서(柳夢瑞) 등,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접촉했다. 그러나 조사 끝에 이들은 끝내 동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여하튼 무신란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남 남인이 중앙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중앙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희망을 품게된 것은 정조 때였다. 당쟁의 와중에서 생부를 잃은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인인 채제공을 중용하였다. 그의 등용은 영남 남인에 대한 정조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감지한 영남 남인은 1788년(정조 12) 이진동을 소두로 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무신창의록』을 발간하였다. 이를 통해 정조는 이현일과 그의 문인 김성탁 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였고, 그들의 죄명을 탕척해주는 조치를 내렸다. 아울러 1792년(정조 16) 3월에는 사학(邪學)에 감염되지 않은 영남을 가상히 여겨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거행하였다. 그때 응시한 유생이 7,228명, 거둔 시권(試券)만 3,632장이나 되었다. 이때의 사실을 정리한 것이 현존하는 『교남빈흥록』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호의를 감지한 안동 유림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4월 영남만인소가 작성되었다. 안동에서 경상도내 각읍의 향교와 서원에 통문을 돌려 유생들을 규합하고, 안동의 이우가 소두가 되어 올린 이 상소는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영남만인소였고, 이를 계기로 정조의 왕권강화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도 정치적 복권을 꿈꿀수 있게 되었다. 특히 정조의 남인에 대한 대우는 대단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1796년(정조 20) 9월에는 이황의 봉사손인 이지순(李志淳)이 평안도의 영유현령으로 부임하게 되어, 이황의 위패가 서울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특명을 내려 성균관에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게 하고 만조백관과 성균관 학생들을 참여시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처럼 정조대의 영남 남인은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조는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벽파에 의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유림들은 정조의 사망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들은 정조가 노론 벽파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이러한 믿음은 200년을 격한 지금까지도 안동 유림의 뇌리에 박혀있고, 그것이 안동출신의 젊은 작가에 의해『영원한 제국』이라는 소설로 형상화되었다. 이후에도 1855년(철종 6)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가 안동 예안의 이휘병(李彙炳)을 소두로 하여 올려졌다.

 

3. 나가며

 

영남 남인들은 서인과 달리 현재의 어지러움은 군주의 문제가 아닌, 의롭지 않은 신하들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왕권을 강화화고, 국왕을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펴나가자는 입장을 취했다. 때문에 성리학 윤리 중 효와 함께 忠에 큰 가치를 두었다. 따라서 영남 남인은 충을 위해,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위해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개가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의병운동으로 떨쳐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1894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전쟁을 일으킨 이들도 영남남인이었고, 의병운동이 여의치 않자 1904년부터 신문화 신사상을 수용하고 계몽운동으로 전환하였다. 망국한 이후에는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개항 이후 안동 유림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안동의 계몽운동을 보면 개화를 촉구하고 있었지만 우리의 전통을 포기하고 완전히 서양화하는 것은 배격하고 있었다. 우리의 윤리 도덕은 존중하고 있었다. 만주에 가서 공산주의를 표방한 사람도 제사를 지내는 가례를 버리지 않았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요한 가치가 충이었기 때문에, 국권회복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