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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문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조용헌)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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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문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조용헌(조선일보 조용헌살롱 집필)
명문가는 전통고택을 보유한 집안이다.
어떤 집안을 명문가로 볼 수 있는가. 명문가의 기준은 무엇인가. 보는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한 기준이 적용될 수 있겠지만, 필자는 그 기준을 전통고택의 보유 여부에 두고자 한다. 전통 고택을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으면 명문가라고 생각된다. 어떤 집안이 전통고택을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첫째는 재력이다. 재력이 없으면 수천평의 대지에 평균 50-60칸에 달하는 기와집을 유지할 수 없다. 이 정도의 고택을 유지관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를 상징하기도 한다.
둘째는 역사와 전통이다. 고택들은 1백년에서 - 5백년까지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에 해당되는 건물들이기도 하다. 고색 창연한 문화재급 건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집안이 거기에 비례하는 전통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명문가의 기준가운데 하나는 자기나라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이다. 고택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생활자체가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세 번째는 긍지와 자존심이다. 아파트로 옮기지 않고 생활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전통고택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자존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자존심이란 자신들의 선조와 집안에 대한 긍지이기도 하다.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자존심과 역사를 버릴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에 아직까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는 도덕성이다. 동학, 일제 36년, 6.25와 같은 역사적 전환기에 이러한 집들이 훼손되거나 불타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도덕성이 바탕에 깔려 있다.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존경받지 못한 집들은 역사적 전환기에 불타거나 사라졌다. 현재까지 유지된다는 사실을 뒤집어 보면 그만큼 검증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최부자집의 철학
-조선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경주에 가면 최부자집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부자집이었다. 이 집은 9대진사, 12대 만석군을 지낸 집안으로 유명하다. 부자가 3대를 가기 어렵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12대 동안이나 만석군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최부자집의 경륜과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최부자 집에서는 대대로 가훈이 내려온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원칙이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셋째 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마라.
다섯째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등이다.
첫째, 進士 이상은 하지 마라는 원칙을 보자.
이는 한마디로 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조선시대 進士라는 신분은 初試 합격자를 가리키는데, 진사라고 하는 것은 벼슬이라기 보다는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자격요건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면 양반신분증이라고나 할까. 만약 어떤 집안에서 3대에 걸쳐 초시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白頭로 지내면 한미한 집안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조선시대와 같은 신분사회에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진사 정도는 유지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최씨 집안은 진사를 넘어서는 벼슬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까워진다는 영국속담처럼, 조선시대는 당쟁이 심한 사회였으므로 벼슬이 높아질수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쟁에 휩쓸리기 쉬웠다. 한번 당쟁에 걸려들어 역적으로 지목되면 남자는 死藥을 받거나 아니면 유배형이고, 그 집의 여자들은 졸지에 남의 집 종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소위 滅門之禍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씨 집안에서는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한다는 것은 멸문지화의 가능성에 접근하는 모험으로 여겼던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은 나중에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벼슬의 기회가 있다면 얼씨구 좋다 하면서 우선 당장 하고 보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집안은 그러질 않았다. 벼슬의 종착역이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끝까지 꿰뚫어 본데서 나온 통찰력의 산물이 바로 ‘진사 이상 하지 마라’ 이다.
둘째,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만석은 쌀 1만가마니에 해당하는 재산인데, 이 이상은 더 재산을 불리지 마라는 말이다.
돈이라는 것은 가속도가 붙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처음 어느 궤도에 오르기 까지가 어렵지 그 궤도를 넘어서는 재산을 모으면 그 다음부터는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상황에 돌입한다. 돈이라는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최부자집은 만석이상 불가의 원칙에 따라 그 이상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환원 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방법이었다. 당시의 소작료는 대체적으로 수확량의 7 - 8할 정도를 받는 것이 보통 관례였는데, 최부자집은 남들같이 7 - 8할 정도를 소작인들에게 받으면 재산이 만석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그 소작료를 낮추어야만 했다. 예를 들면 5할이나 받거나 아니면 그 이하로도 받았다. 이 정도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주변 소작인들은 앞을 다투어 최부자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최부자집의 논이 늘어나면 날수록 자기들은 혜택을 보게 되니까. 사촌 논사면 배 아프다는데 이는 정반대이다. 상상해 보라. 저 집 재산이 늘어나야 오히려 나에게 좋다고 여기는 상황을. 저 집이 죽어야 내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집이 살아야 내 집이 산다는 相生의 방정식을 생각해 보라. 이 어찌 아름다운 장면이자 통쾌한 풍경이 아니겠는가!
둘째와 같은 맥락의 가훈이 넷째 흉년에 논 사지 말라 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흉년이 들어서 아사 직전의 상황에 직면하던 때에는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헐값에 넘기기도 하였다. 우선 당장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까 논 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는 ‘흰죽 논’도 있었다. 흰죽 한 끼 얻어먹고 논을 내놓았다고 해서 흰죽 논이다. 쌀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부자는 바로 이러한 기아상태의 흉년이야말로 없는 사람들의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서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相剋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최부자는 이러한 상극의 방정식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흉년에 논 사게 되면 나중에 원한이 맺히게 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헐값에 논을 넘겨야만 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두 수 앞만 내다보면 그 원한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은 불문가지이다. 필자가 보기에 최씨 가문의 도덕성과 아울러 고준한 지혜가 결합된 산물이 바로 둘째와 넷째의 항목이다.
셋째가 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이다.
조선시대는 삼강오륜과 禮를 강조하다보니 사회분위기가 자칫 경직될 수 있었다. 그 경직성을 부분적이나마 해소해 주는 융통적인 사회 시스템이 바로 과객을 대접하는 풍습이었지 않나 싶다.
과객은 길가던 손님을 말한다. 요즘같이 여관이나 호텔이 많지 않았으므로 여행을 하던 나그네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양반집이나 부자집에 며칠씩 또는 몇 달씩 그 집 사랑채에 머물다 가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 조선시대 양반 주택에서 안방은 오로지 여자들만의 공간이었지만, 바깥의 사랑채는 남자들만의 열린 공간이었다. 사랑채에는 주인 양반의 손님들도 머무르기도 하고, 지나가던 나그네가 갑자기 찾아와서 무료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과객들의 전용공간이기도 하였다.
이들 과객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몰락한 殘班으로서 이 고을 저 고을의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하는 고급 룸펜이 있었는가 하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도 있었고, 무술에 뛰어난 협객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풍수와 역학에 밝은 술객들도 있어서 주인집 아들의 사주와 관상도 보아주기도 하고, 「정감록」을 가지고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안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이 「토정비결」이었다고 한다면, 바깥 사랑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은 「정감록」이었다. 주인양반은 온갖 종류의 과객들을 접촉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서 여행이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이들 과객집단은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여론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최부자집에서는 이들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어느 정도 후하게 대접하였는가를 보자. 최부자집의 1년 소작수입이 쌀 3천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천석은 가용으로 쓰고, 1천석은 과객 접대하는 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썼다고 한다. 1년에 1천석을 과객 접대하는데 썼다고 하니 당시의 경제규모로 환산해 보면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최부자집에서는 과객을 접대하는 데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과객 중에서 上客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매끼 식사할 때마다 ‘과매기’(마른 청어를 일컫는다) 1마리를 제공하고, 中客에게는 반 마리, 下客에게는 4분의 1마리를 제공하였다. ‘과매기’는 전라도나 충청도에는 없는 경상도 특유의 음식이다. 포항, 울산 지역에서 마른 청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현재는 마른청어 대신에 마른꽁치를 과매기라고 부르는데, 주로 날씨가 추운 겨울에 제맛이 난다. 처음에는 약간 비릿하면서도 씹고 난 후에는 꼬소롬한 맛으로 기억된다.
최부자집에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숫자가 100명이 넘을 정도 였다고 한다. 100명까지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에서 수용할 수 있지만, 숫자가 그 이상 넘어설 때는 최부자집 주변에 살고 있던 초가집(노비들이 사는 집)으로 과객들을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부득이 주변의 노비 집으로 과객을 분산해야 할 때에는, 그 과객에게 반드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과매기 1마리와 쌀을 쥐어서 보냈다.
쌀을 쥐어서 보내는 방법이 특이하였다. 최부자 집에는 과객 배급용으로 쌀이 가득한 네모난 뒤주를 여러 개 비치해 두고 있었는데, 그 뒤주의 구멍은 남자의 두 손만 겨우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특이한 형태의 뒤주였다. 과객이 그 뒤주에 양손을 넣어서 손에 잡히는 양 만큼만 쌀을 퍼 갈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과객이 최부자집에서 쌀과 과매기를 가지고 주변의 노비집으로 가면, 그 노비집에서는 무조건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도록 룰이 정해져 있었다. 과객들을 접대하는 댓가로서 최부자집 주변에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면제 받았다. 5-60리 멀리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제대로 내야 했지만, 인근의 노비들은 과객대접 한다는 공로로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최부자집 주변 노비들은 과객 접대가 주요한 임무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밤을 지내고 떠나는 나그네에게는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과매기 한 손(2마리)과 하루분의 양식, 그리고 몇 푼 노자를 쥐어 보냈다. 어떤 과객에게는 옷까지 새로 입혀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최부자집이 과객대접에 후하다는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입소문을 타고 조선팔도로 퍼졌다. 강원도 전라도는 물론 이북 지역에까지 최부자집의 명성이 퍼졌다고 한다. 이는 결국 최부자집의 덕망으로 연결되었다. 중국에 삼천 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 맹상군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1년에 천석의 쌀을 과객에게 대접하는 최부자가 있었던 셈이다.
과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조선팔도로 전해진 최부자집의 덕망은 세월이 흘러 일제 때 식산은행 頭取(총재)로 조선에 부임했던 일본인 ‘아리가’(有賀光豊)에게까지 전해져서 한 가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조항도 같은 맥락이다. 사방 백리라고 하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의 영역이다. 주변이 굶어 죽고 있는 상황인데 나 혼자 만석이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는 부자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작수입 3천석 가운데 1천석을 주변의 빈민구제에 사용한 것도 이런 차원이다. 불교의 「유마경」이 생각난다. 유마거사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했다는 유명한 말 “중생이 모두 아픈데 내가 어찌 않 아플수 있겠느냐!”
다섯째가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었다. 재산관리의 상당권한을 여자가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만큼 실제 집안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하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숟가락도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여 백동숟가락의 태극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과객 대접에는 후했지만, 집안 내부 살림에서는 후하지 않았던 것이다. 7대 조모는 삼베치마를 하도 오래입어 이곳 저곳을 온통 누더기로 기워 입고 있고 있어서, 서 말의 물이 들어가는 ‘서말치솥’에 빨래를 하기 위해서 이 치마를 하나만 집어넣으면 솥이 꽉찰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너무 많이 누덕 누덕 기워 입어서 물에 옷을 집어넣으면 옷이 불어나서 서말치솥이라 할지라도 솥단지가 꽉 찼다는 말이다. 최부자집 여자들의 절약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화이다.
최부자집의 수신철학 -六然-
이상의 여섯가지 원칙이 최부자집의 齊家하는 철학에 해당된다고 하면, 이외에도 六然이라고 하는 修身의 가훈도 있었다. 六然이란 다음과 같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최부자집의 장손인 崔炎(69)씨의 술회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매일 아침 조부님 방에 문안을 가면 붓글씨로 조부님이 보는데서 이 六然을 반드시 써야만 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군자다운 행동을 하도록 철저히 교육받았던 것이다.
필자는 이 六然을 바라보면서 경주에 살았던 水雲 崔濟愚 선생의 「東經大典」에 나오는 ‘不然其然’이 연상되었다. 같은 然字 돌림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로 해석되는 ‘不然其然’은 부정을 거친 대긍정을 통하여 사물이 지닌 모순성과 양면성을 수용하는 철학이다. 然의 사전적 의미가 ‘그러하다’, ‘그렇다고 여기다’의 뜻인만큼 이 글자는 전체적으로 관용, 긍정, 초연의 의미를 담고 있다. 六然도 그렇고 不然其然도 그렇다. 양쪽이 유사하다.
崔炎씨에게 물어보니 崔水雲 선생도 최부자집과 같은 집안의 경주 최씨라고 한다. 부산 동의대학 崔海晉 교수는 「최부자 경영 사상의 현대적 조명」(1999년)이란 논문에서도 이를 주장한다. 최수운의 아버지 최옥(1762-1840)은 최부자 國璿의 조부인 崔震立의 6대손이므로 崔國璿의 玄孫인 彦璥과는 12촌이었으며 近庵集이라는 문집을 내었으나 벼슬에 낙방한 처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찍부터 최부자와 통교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만 최제우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한 후에는 상당 기간 동안 통교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은 후손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이상을 놓고 보면 六然과 不然其然은 최씨 집안의 然哲學에서 유래한 것인가!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최부자집의 가훈을 음미하면서 나는 로마천년의 철학이 생각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할 것 같으면 로마천년을 지탱하도록 한 철학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 였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번역하면 ‘혜택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전쟁터의 최전선에 나가 싸우면서 피를 흘리는가 하면 공중을 위해 자기의 금쪽같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곤 하였다. 귀족은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책임지는 것이 귀족이고, 노예나 평민은 그 책임이 없거나 약했다. 여기서 로마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나왔다.
시오노가 「로마인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몇 번이고 반복하여 강조하는 대목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이다. 이것은 가진 자가 못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그렇다. 도덕적 의무를 통해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최부자집의 원칙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도덕적 실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보람을 증가시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삶의 질은 의미와 보람에 달려 있는 것 아닌가. 재산은 만석이상을 모으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의 실천을 통해 최씨들은 주변도 살고 자신들도 물론 행복하였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좋은 일을 많이 한집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이라 하였다. 이는 요즘의 민법이나 형법보다도 훨씬 강력한 윤리적 기제였으며 동시에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이끄는 철학이었다. 조선의 積善之家 必有餘慶 정신은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일맥 상통한다. 최부자집의 원칙들은 한국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이다.
六然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 사람들의 미덕이 ‘톨레랑스(tolerance)’이다. ‘관용’ 또는 ‘용인’으로 번역되는 톨레랑스는 프랑스 정신이라고 할만큼 프랑스인들에게 체질화 되어 있다고 한다. 톨레랑스는 남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19세기까지 프랑스 파리가 세계의 수도로 역할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온갖 다양성을 넉넉하게 수용할 줄 아는 톨레랑스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가 언뜻 볼 때는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난잡으로 흐르지 않고 세련된 문화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톨레랑스라는 것이다.
나는 홍세화로부터 톨레랑스를 배웠는데, 최부자집의 액자에 걸려 있는 六然을 보면서 조선 선비의 톨레랑스를 느꼈다.
이를 종합하면 최부자집의 修身은 톨레랑스, 齊家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둘을 합하여 이름을 붙여 본다면 ‘최부자집 정신’이 되겠다. 재물과 벼슬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인간삶인데, 보통 인간이 이 욕망을 제어하고 절제하면서 산다는 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 통찰력에서 지혜가 나오고 이 지혜를 후손들에게 전승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종교의 계율로 나타나는데, 그 계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최 부자집 정신이기도 하다.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흉년에 논 사지 않는다. 과객대접을 후하게 해야 한다. 벼슬은 진사이상 하지 말라. 주변 백리 안에 굶어죽은 사람이 없게 한다.”는 정신을 지녔던 최부자집. 이게 바로 조선의 선비정신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이기도 하다. 최부자집의 선비정신이 있었기에 12대 만석군이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졸부만 있고 진정한 부자가 없다고 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본 받아야 할 집안이 아닌가 싶다.
명문가의 전통문화 -안채과 사랑채의 분리-
한국의 명문가들의 주택구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안채과 사랑채의 분리이다.
이들 고택들은 대부분 여자들이 거주하는 안채와 남자들이 거주하는 사랑채가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그 사이를 왕래하려면 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집안을 방문하는 외부 손님들 가운데 남자 손님들은 안채에 들어갈 수 없다. 식사는 어떻게 하는가? 식사는 안채의 부엌에서 만들어서 사랑채로 운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랑채에는 부엌이 없었기 때문이다. 밥상을 들고 안채의 부엌에서 사랑채로 옮기는 일은 하인들이 맡았다.
일부 고택의 경우에는 사랑채에 부엌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구 남평문씨(南平文氏)의 고택인 광거당(廣居堂)의 경우에는, 사랑채인 광거당에 별도로 부엌이 설치되어 있어서 음식을 나를 필요가 없도록 하였다. 이는 안채와 사랑채인 광거당이 100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던 탓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분리한 이유가운데 하나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내세우는 성리학의 영향이 컸다. 夫婦有別 속에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금욕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