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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細亞의 上昇을 보는 西方世界의 視線(김경동)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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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細亞의 上昇을 보는 西方世界의 視線: 近代化와 儒敎를 중심으로
[退溪學振興協議會 月例朝餐會 講演 槪要, 2009. 11. 4]
金璟東 (KDI國際政策大學院 招聘敎授, 서울大學校 名譽敎授,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1. 東亞細亞의 上昇氣流
“지난 10년 사이에 世界에서 가장 力動的으로 급속히 成長하는 지역인 開發型아시아는 이제 繁榮의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 中國을 비롯하여 印度에 이르는 이 지역은 고통스러웠던 1997-98년의 아시아 金融危機 이후 1인당 所得이 倍 이상 상승하였다. 1990년 이래 아시아에는 하루 $2 未滿의 소득으로 연명하는 貧困層 人口가 4億名이나 감소하였다. 이렇게 적어도 表面上으로는 길고 험난한 開發의 道程에 선 아시아가 이제는 祝杯를 들어도 마땅할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바야흐로 ‘아시아의 世紀’(Asia Century)가 눈 앞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축배를 들기엔 아직 이른 듯하다.” (Time 誌, 2009. 10. 12, 41면) 금년(2009년) 현재 國內總生産(GDP) 규모로 美國이 약 14兆달러로 1位고 中國이 약 8兆달러로 2位를 차지하여 지난해의 3位에서 日本을 제치고 2位 자리를 차지하였다. 日本이 3位로 약 3兆7千億달러, 韓國은 작년에 9千3百億달러로 15位로 내려 앉았다. 印度가 약진하여 지난 해에 이미 12位로 上昇하였다. 주목할 것은 東亞 三國을 합치면 美國을 거의 따라 잡는 수준(약 12兆6千달러)이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香港, 臺灣 및 싱가포르를 더하면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 뿐 아니라, 全 世界的인 불황 속에서 成長勢를 유지하는 나라 중에는 단연 中國과 韓國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은 아시아의 상승과 관련한 知性界의 見解를 조금만 더 살펴보기로 한다. 1989년에 내가 學會長이던 韓國社會學會가 주최한 國際會議의 주제가 “21世紀 아시아” 였다. 거기에서 基調講演을 맡은 美國의 사회학자는 지금 인류가 全地球的 軸이 바뀌는 大變容의 시대에 놓여 있음을 선언하면서 近代化의 震源이 北아메리카로부터 東아시아로 移動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 뒤, 1996년에는 香港에서도 “21世紀 아시아”라는 같은 제목의 국제회의를 열었는데, 거기서는 “21世紀가 과연 ‘아시아의 世紀’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이때만 해도 아직 1997년의 換亂이 勃發하기 전이었으므로 얼마간의 樂觀을 눈감아 줄만하다. 그리고 당시 經濟危機의 源泉은 분명 아시아였다. 그럼에도, 21세기를 맞이한 2002년에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儒敎的 東아시아의 상승’(the rise of Confucian East Asia)을 언급하였고(중국계 유학자 Tu Weiming의 言明), 이어 최근까지도 ‘아시아의 상승’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印度系 싱가포르의 知性人은 “서방의 상승이 세계를 변용시켰다. 아시아의 상승도 그와 맞먹는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그래서 아시아의 상승은 온 세계를 위해서도 有益할 것이다” 라고 전망하였다. 그런 渦中에도 樂觀的 태도는 수그러들지 않은 셈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留意할 것은 이와 같은 낙관론을 펼친 두 사람은 모두 아시아 系 知識人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美國發 경제불황의 쓰나미가 밀어닥친 가운데 세계의 시선이 中國으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中國이 세계를 救濟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2009년 8월 10일자 Time 誌의 特輯主題다. 거기에는 『中國이 세상을 통치할 때: 西方世界의 終末과 새로운 地球的 질서』라는 유럽 著述家의 책을 소개하면서 中國이 더욱 더 强力하게 성장하여 결국 앞으로 半世紀 아니 그보다 더 빨리 세계의 指導的 國家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언명이 있음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자 記事에서 “美國과 中國의 관계가 21세기를 좌우할 것이다” 라고 한 美國의 오바마 大統領의 말을 상기시킨다. 최근 다른 기사에서도 소위 G-2(美中)를 言及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要素가 숨어 있다. 비록 西方世界의 지식인들이 東아시아의 새로운 擡頭에 대하여 놀라움과 기대를 보인다 해도, 아직은 暗暗裡에 半信半疑하는 憂慮와 一抹의 懷疑를 떨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축배를 들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評한 것이 바로 그러한 보기다. 그리고 최근의 다른 기사에서도 中國의 可能性에도 불구하고 넘어야 할 山이 많다는 점을 잊지 않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시아(특히 東아시아)의 上昇現象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상승의 意味가 무엇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同時에 비록 지금은 上昇勢를 타고 있지만 일부에서 염려하고 懷疑하듯이, 만일 21세기가 東아시아의 시대가 아닐 수도 있다면 그 原因은 무엇인지도 물어야 한다. 이 어려운 질문에 答하기 전에 우리는 잠시 西方世界의 知性界에서 대표적이라고 할만한 한 가지 의견을 傾聽할 필요가 있다. 지난 1990年代初 KBS TV放送 프로그램 製作을 위하여 하버드大學의 다니엘 벨(Daniel Bell) 敎授와 인터뷰를 하러 간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서양의 文明史家들 중에는 문명의 震源地가 東方에서 始發해서 西쪽으로 점차 移動하여 마침내 21世紀가 되면 北美州로부터 東아시아로 옮아 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이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 先生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한 Bell 敎授의 응답은 明快했다. 經濟力만 가지고 말하라면 21세기에는 분명히 東아시아가 最大經濟圈으로 자리할 것임을 否認하기 어렵다. 그러나 새로운 문명의 發源이라는 견해를 受容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 이유는 科學技術의 혁신에 있는데, 技術革新이 없이 새로운 문명을 일구기가 어려운 데다 그 혁신은 다시 과학분야의 理論的 知識을 필수 요견으로 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의 創出은 美國의 대학원과 같은 硏究中心大學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 사람의 의견만 더 추가하겠다. Michael Novak이라는 대표적 保守論客이 “과연서양문명은 쓸모없는 것이었나?”라는 題下의 글을 쓴 일이 있다. 역시 1994년의 일이다. 그의 自問自答은 이렇다. 정치적으로 民主主義가 독재보다 나은 體制이고 경제면에서 資本主義는 社會主義보다 더 公正한 체제라는 결론을 얻는데, 문제는 道德이다. 이 측면에서 西方世界가 제공할 수 있는 대답은 매우 窮塞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儒敎를 떠올리게 되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問題는 약간 뒤로 미루기로 한다.
2. 近代化와 西方이 본 東亞細亞 및 儒敎
東亞에 대한 서방세계의 認識을 검토하려면 近代化의 脈絡에서 읽어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 過程에서 저들의 생각이 바뀌어 왔을 뿐 아니라 儒敎의 의미와 重要性 문제를 포함하여 앞으로 우리 스스로가 물어야 할 “21세기는 과연 아시아의 世紀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探究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近代化 談論의 前史
한 마디로 근대화는 16세기 初를 전후하여 西유럽에서 시발한 거대한 文明史的 변화를 總稱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래 문명의 發祥地였던 동방세계가 훨씬 더 先進的인 문명을 향유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서양은 문명의 滔滔한 흐름 속에 뒤안길에 있는 조그만 시냇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동방의 高級文化에 접한 뒤로 내부의 치열한 競爭을 거쳐 마침내 동방세계가 꿈도 꾸지 못한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새로운 서양의 문명은 기존의 어떤 문명보다도 우수한 科學技術을 개발하고 거기에 기초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航海術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이에 힘입어 西洋發 근대화는 全 지구적인 文化接變(acculturation) 을 일으키며 강력한 힘으로 뻗어 나갔다. 이에 비하여 동방문명은 더 이상의 革新을 성취하지 못한 채 19세기 帝國主義 시대를 맞이하였고 서양문명을 一方的으로 수용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 들게 되었다. 따라서 근대화 초기부터 서양의 東方觀은 일정한 偏見에서 출발한다. 대체로 16세기부터 유럽인들은 스스로 ‘문명사회’ 혹은 ‘開明’한 사람들이라는 正體意識을 갖추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모든 다른 나라들을 ‘未開’사회로 看做하는 편견과 우월감을 품게 되었다. 아시아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啓蒙主義 시대의 몽테스퀴외(Montesquieu)는 아시아의 제국들을 ‘동방의 專制政體’(Oriental despotism)로 규정하였고 이런 편견은 19세기 지성계의 代表走者格인 헤겔(G. W. F. Hege)이나 칼 맑스(Karl Marx)도 傳承받았으며 마침내 20세기까지도 이어졌다. 헤겔은 아시아의 악덕 압제정치로 말미암아 역사는 進步를 경험하지 못하는 無歷史의 역사라 비판하였고 맑스는 그 유명한 ‘아시아적 생산양식’(the Asiatic mode of production)도 모두 이 동방의 전제정치에서 起因한다고 보았다. 이제 20세기의 서방 社會科學界는 동양사회 혹은 아시아라는 막연한 範疇보다는 중국과 儒敎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적 노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방면에서는 막스 베버(Max Weber)라는 독일 학자가 단연 獨步的이고 그의 연구에서 우리는 서방세계의 유교관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端初를 찾을 수 있다. 본래 베버의 주된 관심사는 西유럽에서는 合理的 근대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는데 아시아에서는 왜 그것이 불가능했는지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서양은 기독교 改新敎倫理(The Protestant Ethic)가 이를 가능케 하는 精神的 원천이었음을 밝힌 그는 그렇다면 아시아사회에는 이와 近似한 기능을 하는 宗敎가 없었던가를 묻는다. 여기에 儒敎가 등장한다. 다만 여기서 그의 유교관을 자세히 해설할 수는 없고 요점만 간추린다. ① 유교의 現世主義: 세상은 좋은 곳이고 여기서 누리는 長壽, 건강, 富 그리고 死後에 깨끗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최상의 福德이다. ② 秩序와 禮: 현세의 복덕을 누리기 위해서는 道라는 永久的, 超越的 세계질서와 宇宙的 調和에서 연유하는 社會秩序에 적응해야 한다. 세속적 권력으로 정한 질서에 충실한 同調가 최고의 가치다. ③ 人間觀: 인간의 本性도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道德的 완성이 가능한, 윤리적으로 善한 존재다. 聖賢의 古典에 대한 철학적, 문학적 교육이 自我完成의 보편적 수단이다. 개인의 理想도 하나의 小宇宙답게 全人格的으로 조화로운 균형잡힌(中庸) 인격체로서 自我를 교양하는 것이며, 유교의 이상적 인간인 君子는 전통적 의무를 완수함에 있어 體面과 品位를 드러내야 하므로, 자아완성의 목표와 기본 덕목은 절차와 의식의 총체인 禮를 지키는 일이다. 이에 이르는 수단은 늘 경계하는 합리적인 克己이며 어떤 불합리한 情炎으로 단정한 자세에 흐트러짐이 일어나지 않게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다. ④ 倫理觀: 유교에는 기독교와 같은 의미의 罪라는 관념이 없다. 윤리적인 죄란, 전통적 權威, 부모, 祖上, 位階上의 上司 등에 대한 無禮이며, 전래의 관습, 전통적 儀禮, 안정적 사회의 因習의 위배가 곧 罪다. 이런 罪觀의 종교적 근거는 呪術的 靈魂숭배로서 天子인 皇帝가 精靈을 다독거리는 儀式, 조상숭배의 祭禮 등으로 體現하는 것이지, 기독교처럼 來歲, 초월적 身의 윤리적 요구와 언약 등 豫言者的 요구 등은 결여하며, 인격의 內的 형성, 일상의 태도 등은 강조하지 않는다. ⑤ 社會組織原理: 精靈에 대한 信仰에 기초한 家族 內의 孝를 중심으로 하는 敬愛心이 가장 강력한 사회조직의 기초다. 이것이 擴大家族, 친족집단의 강한 結束을 가능케 하고 中國의 유교식 經濟組織은 결국 개인적 孝나 경애심이 制御하는 인격적, 人情的인 結社體의 성격을 띤다. 孟子가 墨子의 兼愛를 맹렬히 비난했던 것도 孝와 같이 구제척인 特殊關係 속의 사람들에 대한 경애심이 사회조직원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은 반복적으로 친족의 足鎖에 묶어두고 企業活動과 같은 機能的 관계보다 구체적 사람들에게 人情的으로 속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속박은 교육받은 支配層이 地位를 지탱하기 위하여 유지했다. 이러한 지배층의 통치수단으로 채택한 유교적 家産制 국가와 官僚制 또한 中國의 근대화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⑥ 經濟倫理: 기독교 개신교 윤리는 이러한 親族의 족쇄를 탈피할 수 있었으므로 서양에서는 普遍的 관계로 이루어지는 合理的 자본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유교적 심성 자체는 반드시 反理財로 치우치지 않았음에도 경제정책이 자본주의적 경제심성을 조성하지는 못하였다. 서방의 淸敎徒主義는 모든 것을 客觀化하여 합리적 기업으로 變容시키고 순수한 사업적 관계로 融解시키며 합리적 법률과 合意로써 전통을 대치한 데 비해, 유교적 생활양식도 합리적이었지만 경계하는 마음으로 실행하는 克己도 外的인 體面과 품위에 치중했으며 세상에 적응하는 뜻으로 외적으로 점잖은 거동을 하는 유교의 사대부는 개신교처럼 종교적으로 결정되는 內的인 합리성이 결여했으므로 相互信賴가 없었고, 이런 不信은 경제부문의 신용과 사업적 신뢰의 성립에 장애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인들의 냉철함, 검약, 取得性向, 富에 대한 높은 가치부여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 精神’을 분출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중국인이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에 부응할 능력이나 재주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勃興하지 못한 것은 유교적 세계관, 사회질서관, 인성관 등이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의 심성이나 정신상태가 자본주의에 걸맞은 것으로 啓發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2) 本格的 近代化 談論 속의 儒敎
유교가 근대화 담론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는 시기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특히 활발한 논의를 시작하던 1960년대다. 이 시기 서방지성계의 儒敎觀은 거의 일관되게 否定的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유교는 東亞의 근대화에 障碍가 되는 전통적 요소의 대표로 지목받았다. 이러한 관념은 기본적으로 근대를 전통과 대비하는 二分法的 사고에 기인한다. 당시 西方學界는 근대화를 전통을 극복하는 변화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東亞의 전통 중에 가장 보편적이면서 강력하다고 간주한 유교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있는 견해를 소개하는데, 이러한 서방학계의 생각을 東亞의 학계에서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했다는 사실이다. 한두 가지 대표적인 보기만을 든다. 첫째는 현대 한국 儒學의 선구자인 玄相允 선생의 언급이다. 그는 유교가 우리사회에 끼친 功은 ① 君子學의 勉勵, ② 人倫道德의 崇仰, ③ 淸廉節義의 존중이고, 罪는 ① 慕華思想, ② 黨爭, ③ 家族主義의 弊害, ④ 階級思想, ⑤ 文弱, ⑥ 産業能力의 저하, ⑦ 尙名主義, ⑧ 復古思想이라 한 것이다(『朝鮮儒學史』, 1960). 둘째는 현대 儒學界의 원로인 李佑成 교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동국대학교, 『한국근대화의 理念과 방향』, 1967).
오늘날, 우리는 유교 속에서 근대화의 요소를 찾아내기 전에, 먼저 유교의 前近代性에 대 한 철저한 淸算 工作이 急務의 하나로 제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苦惱에 차 있는 우리들의 근대화 과정의 一作業일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 그저 安易하게 유교 속에 肯定的 요소를 찾으려고 하다가는 도리어 逆效果를 거둘 우 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에 대한 긍정적 요소의 攝取는 유교에 대한 否定的 공작이 어느만큼 成就된 이후에 論議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접어들면 ‘儒敎 後 假說’(the post-Confucian hypothesis)이라는 이름으로 東亞의 開發 또는 근대화 과정에서 유교의 긍정적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는 論旨가 힘을 얻기 시작한다. 이들 논의의 核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東亞의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그리고 최근에는 중국) 등이 20세기 후반에 高度 경제성장을 성취한 배경에는 문화의 전통적 요소가 寄與條件으로 작용하였다. ② 이들에게 共通한 문화전통은 儒敎다. ③ 유교적 價値志向과 行動規範이 국민의 정치경제적 행위에 영향을 미쳐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을 가능케 하였다. ④ 이는 서양의 자본주의 전개과정에서 기독교 改新敎倫理가 작용했던 것과 흡사한 기능을 수행했으므로, 東亞의 유교는 서방의 개신교윤리와 ‘機能的 等價物’(functional equivalent)이다. 이러한 유교기능론의 배경에는 ‘문명의 衝突’(clash of civilizations)을 우려하는 서방세계의 우월감에 대한 위협이 감추어져 있음을 看破해야 한다. 문명의 충돌은 서방문명권에 대한 이슬람권과 유교권의 威脅으로 인식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한 편으로는 東亞의 飛躍的인 성취를 일단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처지를 무시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못 자신들의 우월감에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어쩌면 장차 東亞의 상승세가 서방의 全地球 차원의 支配的 지위를 代置하는 데까지 갈 수도 있다는 警覺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실상 1980년의 세계무역의 상황은 미국이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東亞 諸國과 심각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당시 워싱턴市에 위치한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에서 연구생활을 하면서 目擊한 바로는 미국의 당국자와 전문가들이 기회만 있으면 일본과 한국을 싸잡아 保護貿易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변화가 儒敎肯定論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하나는 1980년대 이후부터 아시아의 非儒敎圈 국가, 특히 東南亞에서도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시작한 사실이다. 유교를 전통적 요소로 간직하지 않은 동남아의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儒敎를 제시할 수 없는 논리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아시아에서 폭발한 外換金融危機였다. 이미 이때 일본은 심각한 不況을 겪으며 ‘잃어버린 10년’을 읊조리고 있었고 한국은 특히 이 換亂의 중심에 있었다. 여기에 다시 儒敎傳統의 부정적 효과가 도마에 올랐다. 情實資本主義(crony capitalism)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不正腐敗, 도덕적 해악(moral hazard), 국가의 과도한 시장개입, 관치금융, 政經癒着 등이 합리적인 금융과 경제운용에 장애가 되었는데, 그 배경은 다름 아닌 이지역의 유교적 緣故主義, 가족주의와 같은 특수주의, 人情主義, 국가와 관료지배 등이 재벌의 支配構造와 금융구조를 왜곡시킨 원천으로 작동하여 초래한 결과라는 견해에 무게가 실리며 유교에 대한 批判的 목소리를 내게 되었고 이는 마치 1960년대 초기 근대화 담론을 聯想케 하는 논지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21세기초, 東亞의 상대적 융성을 중국의 飛翔에서 목도하기 시작한다. 최근의 월街 發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상대적으로 상처를 적게 입고 성장의 底力을 드러내는 중국이나 한국을 바라보며 서방세계는 또 한 번 다시 儒敎를 탁상 위에 올려놓을 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 되었다.
3. 東亞細亞의 未來와 儒敎: 西方世界의 觀點
1) 西方觀點의 兩面性
마지막으로 고려할 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東亞와 유교를 보는 서방세계의 觀點에는 양면성이 깃들어 있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앞으로 근대화와 全地球化가 진전하면서 東亞의 지위가 어떻게 변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유교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검토다. 위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대로 서방의 知性界는 대체로 아시아에 대하여 일정한 優越意識을 곁들인 편견을 지녀왔고 그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妙한 兩面性을 드러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러한 양면성이 시대적 맥락에 따라 서로 엇갈린 반응으로 表面化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에는 단연코 東亞가 後進地域이었고 따라서 그 전통적 요소로서 유교는 剔抉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다 이지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을 보고서는 이제 유교야말로 이지역이 성공한 전통적 문화의 背景으로 부각시키려 하였다. 이지역이 金融危機를 경험하게 되자 이번에는 또 한 번 유교적 전통의 탓이라 지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중국의 上昇氣流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지금부터 東亞를 注視해야 할 대상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의외로 여기에는 유교가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아시아의 미래와 세계의 版圖變化를 고찰할 계제와 만난다. 그 맥락에서 유교는 어떤 대접을 받을 수 있는가? 우선 앞에서 소개한 벨 교수의 견해부터 살펴보면 東亞가 경제적으로 세계를 主導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 같지 않고 다만 持續的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인 과학기술혁신의 潛在力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논지다. 그것은 과학의 基礎理論을 창출할 수 있는 연구중심의 대학원 교육에서 미국을 능가할 나라는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유교의 문제를 논할 이유를 찾지는 못한다. 굳이 지적한다면 유교적 權威主義 조직원리로 말미암아 科學技術革新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수준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서방의 학계가 특별히 問題提起를 한 사실이 없다. 그보다는 서양문명의 功過에 대한 노박의 질문이 우리의 직접적 관심사가 될 법하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서양문명의 功이라 주장하면서도 ‘道德’의 문제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적어도 일부 학자들이 여기에 대하여 유교가 未來 인류를 위한 道德律을 제공하는 문명사적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2) 文明史的 展望에서 본 儒敎 미래 인류가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道德價値와 기준을 동방문명이 제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유교의 役割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거창한 질문을 제기했을 때 그 동안 서양의 학자들이 이런 문제에 접근한 모습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유교는 宇宙論을 포함하여 形而上學, 인성론, 敎育論,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政治理論, 경제경영론 등을 포괄하는 매우 廣範圍하고도 多角的인 사상체계를 통칭한다. 이 중에서 哲學的 학문체계로서 유학과 지배층이 의지한 政治哲學은 일종의 '高級 儒敎'(High Confucianism)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아시아론을 중심으로 서방학계나 동방의 社會科學이 주로 다루어 온 유교는 소위 ‘低級 유교’(Low Confucianism)로서, 別稱 ‘부르주아 유교’(bourgeois Confucianism), ‘유교적인 마음의 습관’(the Confucian habit of the heart) 아니면 ‘유교에서 파생한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 가치관’(the Confucian-derived values in the lives of ordinary people)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저급 유교가 東亞의 근대화나 경제성장에서 작용한 기능을 중심으로 분석할 때 서방학자들이 열거한 항목은 아래와 같다. ① 현세지향, 특히 세상사에 대한 적극적 태도, 인간조건의 변용 및 완성 가능성에 대한 믿음 ② 자아를 중심으로 점점 넓혀가는 인간관계와 상호연관성의 흐름 ③ 자기수양의 중요성 ④ 지속적인 기율의 생활, 특히 근면과 검소의 강조 ⑤ 호혜성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의무의식 ⑥ 개인중심성 기피, 집단지향성 ⑦ 민사소송 기피 성향 ⑧ 권위의 존중과 동시에 권위의 책임 중시 ⑨ 도덕적 공동체로서 정치질서 인식 ⑩ 정부와 정치지도자의 주도적 지위 필요성 인정 ⑪ 사회적 화합과 안정의 기초로서 가족에 대한 관심 중시 ⑫ 교육의 우선적 중요성 강조 此際에 한 가지만 더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근대화론의 文脈에서 유교의 기여여부 내지 功過를 논의하는 것과 거의 병행하여 나타난 또 하나의 論爭은 이른바 ‘아시아의 가치’론(Asian Values)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론적인 문제가 있지만, 개략적으로 언급하자면 이 또한 儒敎圈을 둘러싼 아시아의 가치 문제로 집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논란의 중심에는 싱가포르의 리콴유(Lee Kuan Yew)가 있고 그는 이 문제의 핵심은 역시 儒敎的 전통이라고 인식한다. 그가 동서양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그가 지칭하는 아시아는 東南亞가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 홍콩 등 漢字文化圈 혹은 유교권이다. ② 이들 사회에서는 개인은 家族의 맥락 속에 존재하고 擴大家族, 친구들 및 전체사회의 부분으로서 정부는 가족이 가장 잘 제공하는 것을 개인에게 주지 못한다. ③ ‘修身齊家平天下’를 언급하며 동양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최대한 만끽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사회를 지향한다. ④ 엄격한 기율, 예의바른 행동, 스승존경, 스승에게 말대꾸하지 않음, 암기 등은 東亞 의 공유전통이다. ⑤ 東亞 문화는 배움과 學問, 근면과 검약, 미래를 위햔 현재 쾌락의 猶豫 등을 중시한다. ⑥ 정치제도에서 國民의 욕구충족, 국민 抑壓 철폐, 국민의 機會 극대화를 추구하는 ‘편안한 정부’를 강조한다. 이것이 리콴유라는 개인의 견해라면, 지금까지 이 아시아 가치 담론에서 여러 사람들이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상당히 장황하지만 역시 여기서도 유교적 덕목들이 지배적이다. ① 개인적인 心理的 행동성향 중심 가치 • 근면, 검약, 저축성향, 금욕주의, 욕구충족의 지연, 성취의욕, 노도윤리 • 규율있고 예의바른 행동, 질서의식, 자기수양, 자제심, 자신감, 도덕적 확신 ② 개인의 行爲指針으로서 사회적 가치: 교육 • 도덕적 향상을 위한 교육, 실천을 주이시하는 교육, 자신과 가문의 영예를 위한 성공의 방편으로서 교육, 높은 교육열과 교육에 대한 일반적 헌신, 배움과 학문의 중시 ③ 사회의 組織原理와 관련한 가치지향 • 집합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화합, 안정, 권위주의, 위계질서 강조 • 인간관계의 특징으로서 신의 존중, 인정주의, 화목한 관계, 민사고발의 기피, 자기중심적인 것의 혐오, 사무적 관계 기피 ④ 政治文化 관련 가치지향 • 國家觀: 국가와 사회 융해(미분화), 가족의 확대개념으로서 국가 • 국가의 機能: 국가의 선도적 역할 기대, 감독규제뿐 아니라 개발, 교육, 동원 기능 • 政府官僚의 역할: 단순한 행정집행자가 아니라 국익의 선도자, 지도자, 지성인, 국민의 교사 • 政治指導者觀: 도덕적 모본, 지위에 따른 의무 중시, 인간관계의 연줄(연고)에 대한 의무 중시, 뛰어난 인간성 선호, 온화한 설득형 기질, 온정주의 리더십, 동정적으로 지원하는 지도자, 능력과 경륜과 지혜 구비 • 爲民思想: 민본주의, 국리민복, 민생이 정치의 중심 ⑤ 世界觀 • 생태적 自然主義: 자연과 일치 조화 추구, 자연 속의 인간 • 現世主義: 聖俗의 구분 모호, 세속적 종교의식 중시, 현세의 변화, 지위, 영화, 부귀공명, 祈福 중시 • 地位志向性: 지위획득과 상승 추구, 가문을 위한 출세, 지위획득 목적의 교육 • 崇文思想: 武보다 文을 숭상, 문과와 전문직 선호, 상업주의 기피, 상공업 경시, 安貧樂道 서방학계가 이런 식으로 유교를 규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이와 같은 目錄이 담는 항목은 유교의 尨大한 체계 속에서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마치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지면서 코끼리를 규정하려는 장님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둘째, 이런 항목들의 성격을 면밀히 구분해서 접근해야 한다. 이들 중에는 유교의 理想的인 가치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實生活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들도 있는데, 지금까지 유교적 가치들 중 일부는 이상적인 가치로 중시하기는 했어도 실천 단계에서는 이상대로 행하지 못하고 어긋나는 행동이 무수히 나타났다는 점이다. 셋째, 어떤 것은 주로 과거 전통사회에서 의미가 있었으나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별로 걸맞지 않는 가치도 있다. 이런 구별 없이 무조건 같은 범주로 취급하는 것은 方法論上의 문제가 있다. 넷째, 이런 항목들이 각기 어떤 방식으로 근대화나 경제성장에 기여했는지, 아니면 장애가 되었는지를 분명히 分析的으로 구분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냥 두루뭉수리로 유교적 덕목이나 가치는 이런 것들이 있는데 이들이 도움이 되었다거나 방해를 했다는 식 접근은 無責任하다. 방법론적인 문제점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부 유교적인 가치와 덕목 내지 행위지침들이 過去의 경제성장에는 긍정적 기여를 했다 해도 앞으로 經濟構造나 전지구적인 상황이 급변하는 맥락에서도 그대로 適用해서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여기에 대한 서방학계의 태도는 비교적 曖昧模糊한 편이나, 대체로 否定的인 쪽으로 기운다. 다음은 과연 동아시아가 새로운 문명의 震源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 爭點을 보는 방법으로는 우선 東亞가 서양문명이 제공할 수 없게 된 어떤 독특한 道德律을 인류에게 보여주고 모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측면과, 또 한 편으로는 진정으로 서양문명을 代置할 만한 새로운 문명의 創造가 가능하냐 하는 요소로 나누어 보는 길이 있다. 첫번째 쟁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東亞의 역할을 기대해볼 만하다는 조심스러운 견해가 있다. 하나는 서양의 技術文明이 자아낸 자연생태계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본래 동방사상에 깊이 뿌리내린 自然調和論的 사상을 잘 가다듬어 전지구적인 사상으로 昇華시킬 수만 있다면 환경보호에 이로운 生態觀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한 가지는 서방세계가 지나친 自由主義와 個人主義의 강조로 말미암아 가족과 共同體의 해체 및 붕궤를 경험하게 된 데 대해서 유교적 共同體主義(Confucian communitarianism)가 대안적 이념으로서 공동체 복원 운동의 지침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東亞의 知性界가 좀 더 노력을 경주하여 연구를 하면 긍정적인 기여를 할 여지는 있다고 보아도 좋을 줄 안다. 문제는 두 번째 쟁점이다. 과연 東亞가 新文明의 창조를 주도할 만한 역량과 準備態勢가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서방세계의 태도는 아직은 아니라는 쪽으로 기우는 것이 분명해보인다. 이는 첫 번째 쟁점보다는 훨씬 더 심각한 苦悶과 努力을 요청하는 분야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意識構造, 社會構造, 政治文化, 經濟運用 시스템, 특히 敎育體制 등 손대야 할 부문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儒敎的 전통이 과연 어느 정도 肯定的인 기여를 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 眞摯하게 물어봐야 하고 또 연구와 穿鑿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