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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維新과 새마을운동 (고병우)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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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서거 30주년에 생각한다

十月維新과 새마을운동

-대붕(大鵬)의 깊은 뜻을 연작(燕雀)이 어찌 알랴-

 

고병우(전 청와대 경제비서관, 전 건설부 장관)

 

1. 유신선포는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었나?

 

1)최근의 한반도 정세

 

북한 왕조 집단은 최근 들어 부쩍 위협과 공갈을 섞어가며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핵 실험을 감행하고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며 우리 국민들을 알아서 순종하라는 엄포를 놓고 있다. 북한 사교집단(邪敎集團)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무기는 핵(核)뿐만 아니다. 미사일이 휴전선 전역에 배치되어 언제라도 발포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의 화학무기다. 공중에 살포하면 순식간에 모든 생물체가 잿더미가 되는 최악의 무기다. 이런 무기들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PSI에 참여하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정식군복을 입은 자가 당당히 발표를 했다. 수 십년 똑 같은 복장 똑 같은 음성으로 살기등등하게 나오는 여자 아나운서는 우리 동포들을 향해 살기를 띄고 입에 거품을 품고 있다. 언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위기일발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위로는 대통령에서부터 아래로는 모든 서민, 시장의 상인들까지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양치기소년의 외침이 되어버린 것 같다. 허황된 말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2) 유신선포 직전의 한반도 정세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는 말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없이실전으로 공격해 왔다. 야간에 무장특공대를 청와대에 침투시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시도하였다. 다행히 위기는 경호를 담당한 경찰들의 노력으로 변고를 면했다. 단원중의 한명인 김신조를 체포하여 북한당국이 지시했다는 자수를 받았다. 1970년 6월에는 연평도 부근 공해상에서 한국 함정을 공격하고 납치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았다. 그랫더니 뒤이어 미군의 정보선인 푸에불로호를 납치해 가고 미군 정보기도 격추시켰다. 또 삼척. 울진지역에 100여명의 무장공비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후방 교란작전을 펼쳤다. 그 훨씬후 판문점에서 발생한 도끼 만행사건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 북한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낸 일이 있지만 이 때는 북한군이 우세한 때문이었는지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고 지나갔다. 대신 국내적으로 방위력 증강과 경제개발에 국력을 집중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70년대에 들어오자 북한의 호전적 세력이 의연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과는 반대로 세계는 데탕트의 무드가 조성되고 있었다. 서독정부가 동독정부와 평화적 교류를 선언하고 통일독일을 위해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1971년 8월에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1,000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제창하며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의했다. 북한도 세계적 분위기에 따라 이 회담에 응해 왔다. 정부는 우리도 독일처럼 남북간에 평화회담을 할 것을 결심하고 북한에 제의했다. 이리하여 남북 '7.4공동성명'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3) 국론통일의 필요성 부각

 

남북대화 중에 깜짝 놀랄 일을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회담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데 비해 북한 대표들은 수첩에 적어온 대로 읽는 것 밖에는 개인적인 의사표시나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경직된 북한 대표들을 두고 우리는 남북대화가 헌법위반이라느니 성급하다느니 극에서 극에 이르는 중구난방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때 협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나아가 남북대화가 평화통일에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국론을 통일하고 국내결속을 다지기 위한 체제개편의 필요성이 강력히 요구되었다.

한국인의 몸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지 몸에도 맞지 않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직수입해서 옷에 몸을 맞추기는 어렵다. 다른 나라들도 민주국가이면서 그 형태는 각각 자기들의 여건에 맞게 조정해서 시행하고 있다. 영국과 일본처럼 군왕제를 존치한채 내각책임제로 정치를 하는 나라도 있고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도 있다. 인도네시아는 500명의 국회의원 중 100명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통령은 '국민협의회'라는 조직에서 간선제로 선출하는데 그 국민협의회 위원의 50%는 국회의원이 겸직하고 나머지 50%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래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하의 대통령직선제는 문제가 너무 많다.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을 앞에 두고 국론분열이 너무 심한 상황을 직시하며 이와 같은 체제는 개편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여기 저기서 제기되었다.

 

4) 당시의 국내외 정세

 

이런 시기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소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모든 나라가 특히 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자기나라는 자력으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나왔다.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도 철수하겠다는 정책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호시탐탐 남한을 교란하고 무력통일을 획책하고 있는 북한의 호전주의자들을 앞에 두고 미국이 6.25한국전쟁 때 북한에 파병을 해서 우리를 공격했던 바로 그 중국과 국교를 추진하면서 주한 미군의 철수가능성을 공언하는 뉴스는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들을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이런 때에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의 최고책임자의 심경을 생각해 보라.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특별한 용단을 직접적으로 결심하게 만든 사람이 또 있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씨였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선거공약으로 향토예비군을 해체하겠다고 공약을 하였다. 향토예비군은 국군의 월남 파병으로 국내 방위력을 보충하기 위한 제도이며 영세중립국이라는 스위스도 국가방위를 위해 두고 있는 국방체제다. 그에 더해 남북연방제 통일방안등 북한에 유화적인 공약을 내걸고 나왔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서둘러 국가보위와 사회안정을 위한 긴급조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를 '十月維新'으로 선포한 것이다. 사족으로 말하면 유신이란 문구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계셨던 최규하위원(후 대통령)과 명망이 높은 서울대의 박종홍교수가 시경(詩經)에서 주나라의 개혁을 위해 건의되었던 주유구방(周維舊邦)이나 기명유신(其命維新)이라는 말에서 채용한 용어이다.

 

5) 시월유신의 의의

 

그 당시는 군사력은 물론 경제면에서도 우리가 북한에 뒤지는 입장이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북한에 비해 부족했던 여건을 알면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시장경제체제의 우월성을 확신하며 월남파병으로 부족해진 병력을 향토예비군으로 보충하고 경제는 5개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자신을 가지고 남북간에 체제경쟁을 하자고 선언했다. 이렇게 강하게 나오니까 북한에서도 남북 적십자 회담에 응해 오고 마침내 '평화통일을 위한 7.4 공동성명까지 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이렇게 강하게 대해야 말을 듣는 집단이다.

시월유신은 국내 혼란을 막아 국론을 통일하고 북한의 호전세력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정책이지 장기집권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다. 나라의 불안을 부추기는 야당, 특히 김대중씨의 무절제한 정치발언과 북한의 침략야욕을 봉쇄하기 위한 극약처방인 것이다. 김대중씨는 본인은 부인했지만 당시 국회에서는 물론 항간에서도 여론이 팽배했다. 즉 유신 선포 후 미국에 건너간 김대중 전대통령 후보는 대한민국은 독재정권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에는 원조도 주지 말고 주한 미군도 철수시켜라. 그리고 대한민국의 망명정부를 세우고 남북간에 연방제 통일을 추진하겠다고 주장하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6) 유신체제는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한 발언을 하는 야당 대통령 후보와 혈투를 벌이는 직선제하의 대통령 선거판에서 국가안위가 위태롭게 느껴졌다. 대통령 선거를 국민의 직접선거방식 보다는 간접선거제로 바꾸고 4년 마다 하는 대통령 선거를 6년에 한번씩 하기로 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위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로 제도를 일시적으로 변경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한 사람의 손만 보고 모두가 따라서 찬성표를 드는 선거를 보면서 그들의 위협하에 언제 어떻게 공격받을지 모르는 우리가 잠시 경제력이 커지고 군사력이 북한을 능가할 때까지 간접선거로 선거제도를 바꾼 것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를 두고 철천의 독재자라고 비난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의 3대를 계승하는 왕조체제에는 왜 말이 없는지 알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 자신도 70년대 중반 유신반대 세력의 반정부 투쟁이 한창일 때 사석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당과 재야의 주장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한 일이 있다. 난들 왜 서구 민주국가처럼 자유와 민주를 구가하는 대한민국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자유와 민주도 먹고 살만한 수준의 국민과 국력을 갖추어야 가능하지요. 나도 나중에 우리 한국을 멋진 민주주의 국가로 키울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 ]부분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김길홍 전 의원이 증언한 내용이다.)

유신체제는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던 국가의 안보를 위한 긴급조치였지 박정희 대통령이 종신 집권을 하기 위한 통치체제는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10년 가까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보필한 김정렴(金正濂) 비서실장에게 1978년 유신 2기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술회한 일이 있다. 즉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이 계획대로 잘 되고 있는데 1982년쯤에는 가장 중요한 방산기술이 완성될 것이다. 그러면 2기의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 전인 1983년쯤에 김종필씨(당시의 국무총리는 최규하)를 총리로 다시 오게 한 다음 사임할 생각이다. 임기 1년 내의 대통령 유고 시 에는 재선거 없이 국무총리가 잔여임기를 계승한다고 되어있으니 김종필 총리체제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면 무리 없이 정권이 이양될 수 있다.고 술회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김정염 비서실장이 자서전으로 쓰신 '아! 박정희'에 분명히 기술해 놓은 것을 보아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2. 새마을운동은 유신체제의 지지기반을 위한 것이었나?

 

1)새마을운동의 배경

 

최근 '새마을운동'이 유신체제의 지지기반이라느니 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어느 부락이라느니 새마을에 대한 이론(異論)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 어느 젊은 교수가 '그들의 새마을운동'이라는 저서를 낸 것을 모 일간지에서 크게 부각시켜 소개한 것을 보았다. 많은 조사를 하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쓴 글이겠지만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민족사적 운동에 대해 기록을 하려면 당시의 주역들이 건재한데 주역들의 이야기를 듣고 확인을 해야지 당무자들의 설명을 듣지도 않고 자기가 새마을 지도자였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글을 쓰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여기에 새마을운동의 배경과 새마을운동의 철학과 새마을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당시 참여했던 실무자로서 증언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새마을운동을 '유신체제의 지지기반'으로 만들려고 추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새마을운동의 공식선포는 1973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새마을운동의 싻을 오랫동안 배양해 왔다.

 

2) 혁명공약과 공업입국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전국민이 기아선상에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살고 있었다. 국민은 굶주리고 있는데 정치는 정쟁에 여념이 없고 청년들은 '북으로 가자 남으로 오라' 하며 구호를 외치는 등 사회불안은 극심했다. 이 시기에 청년장교들이 청렴 강직한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모여 군사혁명을 도모한 것이다. 혁명정부는 혁명공약으로 반공을 국시로 하고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는 국민들을 하루 빨리 구출하고 경제발전을 도모할 것을 약속했다.

이 무렵 민간에서도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백운산 개척농장을 비롯한 개척농장들이 만들어지고 고구마를 심는 등 먹을 것을 만드는 농촌운동이 일부에서 일고 있었다. 농촌의 상록수라고 할 수 있는 청년들이 부락민을 설득하여 마을을 일으키는 사례도 생겨났다. 그러나 대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는데 유독 김용기 선생이 이끄는 '가나안 농군학교'는 성공적이었다. 김용기선생은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유명한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한 분으로 유명했다.

혁명정부는 정권을 인수하고 보니 국고는 바닥이 나 있고 농촌은 피폐하고 지하자원도 없는 극빈상태였다. 여기에 기술자도 없고 투자할 자본은 더더욱 전무했다. 빈곤이 악순환 하는 후진국에서 국민을 빈곤에서 해방을 시키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1961년에 혁명을 한 정부가 바로 그 다음 해인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착수했다. 그러나 1966년까지의 제1차 5개년 계획기간 중에는 농촌개발이나 식량증산 등 중농정책에 매달릴 수가 없었다. 수입대체산업을 건설하고 가공무역으로 수출을 증대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황무지에 서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먼저 공업입국을 계획하고 일제가 정유공장을 짓고 있었던 울산에 가 보고 공업입지의 적지임을 확인했다. 먼저 정유공장을 건설하고 석유화학공장, 비료공장, 시멘트공장을 착공하면서 모든 공업의 기초소재인 제철공장을 건설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했다.

국내수요로 보아 30만톤 규모의 제철공장을 만들자니 경제성이 없고 작은 국내시장을 보고 외국의 전문기관들은 한국에는 제철공장을 지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고 돌아가 버렸을 때 박정희 의장은 국제경쟁력이 있는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하면서 300만톤 규모의 포항종합제철공장을 계획했다. 외화라고는 무일푼인 대한민국이 어느 선진국도 거들떠보지 않는 제철공장을 계획하고 자금의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할 수 없이 대일청구권자금을 여기에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요즈음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제철공장인 포항제철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진입도로 등 주변 외곽시설은 모두 정부가 국가예산으로 만들어 주고 자금부족은 은행으로부터 차입을 해서 쓰게했지만 그 은행차입을 전액 출자로 전환시켜 주었기 때문에 이자지불이 필요 없는 공장을 만들어 냈다. 포항제철이야말로 그 누가 무어라 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와 마음에서 탄생된 공장이고 그렇기에 지금 세계 제1의 제철소가 된 것이다.

 

3) 농공병진 정책의 도입

 

제1차 5개년 계획이 당초 예상보다 높은 성장률로 완성이 되자 (계획 성장율 7.1%에 실적은 8.5%) 박정희 대통령은 그제서야 농촌에 눈이 돌아가게 되었다. 1967년 연초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후 처음으로 농공병진정책(農工竝進政策)을 선언하고 농어민소득증대사업과 농어촌개발공사 설립을 명하였다. 나는 1967년3월 농림부에 전임을 했는데 전임하자마자 이 두 가지 중요한 대통령의 특별지시사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농어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작정 생산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생산물을 수집하고 저장하고 가공하고 공동출하를 하여 시장에 내어놓아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위해 농어촌개발공사(農漁村開發公社)를 설립하라는 지시를 한 것이었다. 타당한 지시였지만 농림부의 분위기는 기존의 농.수협(農.水協)이 있는데 중복이 된다고 반대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상공정책을 담당하고 있다가 농림부로 전직을 한 직후라서 이런 농림부의 분위기와는 관계없이 농어촌개발공사의 설립이유와 설립방식을 정리하였다. 김영준 장관님의 인도에 따라 난생 처음으로 만나 뵙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부리핑을 올렸다. 다행히 만족스런 반응을 받았다. 그 해 7월부터 작업하여 입법을 하고 시행규칙을 만들고 공사의 자본금 납입과 사무실 확보, 사장과 임직원의 구성 등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심정으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다음 해 2월에 차균희 전 농림부장관을 사장으로 하는 농어촌개발공사를 발족시켰다.

 

4) 농어민소득증대에 대한 구상

 

나는 농업정책을 입안하는 농업경제과장으로서 농어촌개발공사가 원료농산물을 수집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는 각 농작물의 집단재배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 농림부 실무자들이 만들어 놓은 농산물주산단지 조성계획을 농민소득증대 사업계획으로 바꾸어 당시 김영준(金榮俊) 장관님께 보고했다. 김 장관은 그 보고서를 보자 곧 바고 청와대로 가자고 하여 박정희 대통령께 농민소득증대사업계획을 보고 드렸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연초에 지시했던 농어민소득증대사업 구상에 합당하신지 사업내용을 하나하나 점검하시고 계획서 작성방법, 사업시행방법, 각 부처가 협동해서 추진할 것 등 세세한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농민소득증대를 어민을 포함하여 농어민소득증대로, 모든 계획은 농어민의 자력부담을 조건으로 할 것, 규모를 농림부 단독으로 하는 것으로 해서 작게 만들지 말고 관계 경제부처뿐만 아니라 내무부와 보사부도 같이 참여하는 전 부처의 종합계획으로 만들 것, 융자재원이 부족하면 내무부의 지방교부금을 재원으로 하여 금융자금을 이차보조(利差補助)하는 방식을 도입해서 사용하라는 등 세세하면서도 철학이 담긴 지시를 하시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국에 90개의 농특사업단지를 지정하고 시도지사가 시행책임을 맡고 농림부가 지도 감독을 하는 체제를 만들어 1968년부터 1971년까지 4개년 계획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5) '하면 된다' 정신

 

당시 우리의 농어촌은 농번기에만 일을 하고 겨울 철이 되면 투전이나 하면서 놀고 먹는 나태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낙네들은 보리고개를 이겨내지 못하고 굶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처음에는 겨울철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고등소채를 재배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설명을 해도 말을 듣지 않아 강제로 끌어 내다 십히하여 설득을 해 가면서 사업을 추진하였다. 많은 현금작목들이 권장되어 농어민들이 돈을 만져보게 되자 둘째 해인 1969년부터는 희망농가가 급격히 많아졌다. 이 때 경쟁심을 북돋우기 위해 나는 지역별 시. 군별로 사업경진을 시키고 우수농민은 시상을 하기로 했다. 1969년 첫해에 최고상을 수상한 분은 유명한 충청북도 청원군의 하사용(河四容)씨였다. 하사용씨 내외는 머슴살이 식모살이 하면서 번 돈으로 벼려진 땅 200평을 사 가지고 비닐하우스사업에 참여하여 고생 끝에 큰 수확을 했다고 성공사례를 발표할 때 단상에서 듣고 계시던 박정희 대통령은 눈물을 닦으시며 치사를 하시는데 준비된 원고가 아닌 즉석연설을 하시며 저렇게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하니 성공하지 않았느냐 누구나 '하면 된다'고 하는 소위 캔 두 스피릿(can do spirit)을 처음으로 역설하셨다.

이후 참여 농어가는 증가하고 농촌에서는 서로 현금작목을 얻어 하려고 줄을 섰다. 1970년 마침내 농특사업에 참여한 농어민의 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을 초과하였다.

 

6) 새마을가꾸기 사업

 

이 때 마침 내무부에서는 시멘트 생산이 과잉이 되어 이를 농촌에 무상으로 분배해 주고 마을 가꾸기 사업을 권장하는 일이 있었다. 전국 34,000개 부락에 시멘트 200부대씩과 철근 0.5톤씩을 고루 나누어 주면서 시범사업으로 마을 길 넓히기, 교량 만들기, 공동빨래터 만들기 등 10개 사업을 예시해 주었다. 1년 후 부락 별 실적을 평가해 보니 절반 정도의 마을은 부락발전에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했는데 반해 일부 마을들은 나누어준 시멘트와 철근을 부락민들이 고루 나누어 가지고 가 자기집 부엌도 고치고 표가 나지 않게 사용해 버렸다. 평가교수단의 평가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 해에는 잘 한 마을에 집중적으로 추가지원을 하고 우수마을과 부진한 마을을 구분하여 지원했다. 이렇게 마을간에 경쟁을 부치니 서로 우수마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역해 보였다. 이리하여 그 운동의 이름을 '새마을가꾸기'라고 했는데 1972년부터 농어민소득증대사업과 새마을가꾸기사업이 농촌발전운동이라는 면에서 공통됨으로 이 두지 사업을 통합하여 새마을소득증대사업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7) 새마을운동의 철학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스스로 '새마을운동'을 1972년에 창안하시고 배경과 철학과 추진방법을 직접 정리하셨다.

근면, 자조, 협동(勤勉, 自助, 協同) 의 새마을운동을 농촌운동에서부터 전국민운동으로 확산해나가도록 지도하되 어디까지나 참여 농어민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합의하여 만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뒤에서 그들이 필요한 부분을 도와주는 방식을 취하라. 모든 운동은 환경개선에만 치중하지 말고 소득증대에 직결돼야 실증이 나지 않고 오래 지속된다. 우리 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보장되어야 품위 있는 생활도 문화생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힘은 한 사람의 힘은 약해도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단합하여 협동을 하면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람의 힘은 1+1=2가 아니라 1+1=2+a 가 된다. 이 a는 가 될 때도 있지만 무한대로 클 수도 있다. 이 a의 힘은 지도자와 구성원의 협동수준에 달려있다. 새마을 운동에는 반드시 유능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합의하여 지도력 있고 설득력 있고 솔선수범하는 의욕이 있는 젊은 이를 선출하여 그 지도자의 지도에 따라 일사분란 하게 밀고 나가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다행히 이 시기에 제대한 장병들이 농촌에 많이 있었다. 유능한 지도자가 있는 마을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마을운동은 행동철학이다.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업선정은 반드시 부락민이 모두 합의하는 사업으로 해야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민족의 잘살기 운동이다. 성급히 서둘지 말고 자진해서 협력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만 하는 운동이 아니다. 도시에서도 자기들 환경에 맞는 운동을 찾아서 하면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의 이론과 행동강령'을 1972년4월26일에 작성했다. 나는 총18매로 된 메모식 이 원고를 가지고 있다.

 

8) '새마을운동'의 선포

 

그런데도 곧바로 이 원고에 따라 대통령지시사항으로 내려 밀지 않고 1년을 지켜보신 뒤였다. 대통령께서는 어느날 나에게 하문하신 일이 있다. 고 비서관! 요즈음 농촌이 좀 움직이는 것 같소? 하신다. 나는 농특사업지구를 비롯해 활발해 지는 것 같습니다. 했더니 다른 나라에도 이런 농촌운동이 있나? 하시기에 이스라엘은 모샤브, 기브스운동으로 사막을 옥토로 가꾸었고 덴마크는 그룬드비라는 지도자가 노래를 부르며 농촌운동을 해서 부유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이웃 일본도 전후 매우 피폐해 있었는데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 운도'를 전개하며 마을 한가운데 농기구창고를 만들어 두고 사용희망자가 순서에 따라 이용하고 깨끝이 닦아 반납하는 것을 제가 직접 가보고 왔습니다. 고 보고하였더니 그게 '새마을 만들기 운동'이란 말 아니야? 하시면서 공감하시는 것이었다. 그 후 1973년11월 전남 광주에서 대대적인 '새마을운동 선포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농촌에서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 도시로, 학교로, 직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나갔다. 새마을운동이 힘차게 타오르는 것을 보신 박정희 대통령은 혼자말씀으로 우리 국회의원들도 새마을 지도자들처럼 선출되어 나오면 한국의 정치수준도 생산적으로 발전할 것 같다고 푸념하시는 말씀을 엿들은 일이 있다.

새마을운동이 유신체제의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조직되고 전개된 것이 결단코 아니라는 사실을 이상과 같이 새마을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새마을운동의 철학과 전개과정을 보시면 누구라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시월유신은 장기집권 또는 종신집권을 위해서 취해진 조치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은 유신체제의 지지기반 확산을 위해 전개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두는 바이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