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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남학파의 동향(김학수)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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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남학파의 동향 -분화와 통합의 100년사- 金鶴洙: 학술회원(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실장) 1. 서언 중앙집권적 양반관료국가였던 조선왕조는 17세기에 들어 정치ㆍ학문ㆍ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대북정권을 종식시켜 서인정권의 초석이 마련되었고, 학문적으로는 朱子學의 이론적 심화와 더불어 禮學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주자학적 宗法 질서가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리면서 士林時代의 이념과 가치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벌가문이 형성되어 갔다. 특히, 사림정치시대의 정착기로 인식되는 17세기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학문 등 사회 제 영역에서 사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 어느 시기보다 높아져 있었다. 그리고 학문 경향에 있어 道學의 숭상은 학연, 즉 淵源ㆍ師承意識의 강화를 수반하여 본격적인 學派의 시대를 열어 갔고, 학파는 곧 政派를 의미했던 당시의 정치ㆍ학문적 환경 속에서 인조반정과 서인정권의 수립은 우율을 종사로 하는 기호학파가 조선의 학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서인정권의 수립과 기호학파의 부상은 남인 영남학파의 입지를 크게 축소시켰고, 그러한 흐름은 조선후기 내내 그대로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嶺南’은 영남학파의 본산으로 학문적으로는 퇴계의 학통을 잇고, 정치적으로는 남인의 입장을 지켜 온 지역으로 일컬어져 왔다. 이는 여러 정파가 공존했던 서울 및 기호지방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보이는 사회적 풍토로 규정될 수 있으며, 인조반정 이후 남인의 정치적 열세가 확연해지면서 이러한 경향도 더욱 심화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 결과 영남학통의 계승이라는 淵源의 순수성과 南論의 표방이라는 정파적 단일성은 조선후기 영남학파 또는 영남사림 내에서 주류로 행세하는 양대 전제 조건이 되었고, 이에 일탈하는 세력은 ‘叛父背祖’, ‘換父易祖’의 무리로 매도, 배척되었다. 이러한 학문ㆍ정치적 ‘단속행위’는 서인 기호학파의 부상과 확산에 직면하여 퇴계학의 계승, 남인세력의 결집을 위해 불가피하게 모색된 측면이 컸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은 18세기 이후에나 적용될 수 있으며, 17세기 영남의 학문ㆍ정치적 상황은 이보다 훨씬 복잡, 다단하였다. 2. 퇴계ㆍ남명계의 길항과 퇴계학파로의 통합 16세기 중반 영남에는 퇴계와 남명이라는 뛰어난 유학자가 출현하여 각기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시켜 영남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를 크게 고조시켰다. 퇴계학파는 안동ㆍ예안을 중심으로 하여 강좌일대를 그 외연으로 하였고, 남명학파는 김해ㆍ진주 등 강우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 퇴계와 남명은 ‘同道同庚’의 緣이 있었으나 일생 상면한 적은 없었고, 학문 경향에 있어서도 퇴계가 朱子學의 이론적 심화에 착공하였다면 남명은 ‘程朱以後不必著述’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실천적 ‘敬義學’을 강조하였다. 양자의 이러한 학문적 성향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學風의 차이를 수반하게 되었고, 여기에 더해 남북분당, 대북세력의 서애 퇴진운동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거치면서 두 학파는 정치적으로도 남인과 북인으로 각립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1611년에 단행된 내암의 이른바 ‘晦退辨斥’은 두 학파가 빙탄의 국면으로 돌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남학계에 있어 17세기는 통합과 분화, 재통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畿湖學派’에 대칭되는 ‘嶺南學派’의 모양새를 갖추어가는 과정으로 풀이될 수 있고, 학문 그 자체에 못지 않게 당시의 정치ㆍ사회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학계 또는 학파를 구성하는 개체가 학인이자 곧 관료(정치가)였던 양반관료사회의 속성, 학문과 정치가 전혀 별개일 수 없었던 사림정치시대의 풍토와 관련이 있었다. 16세기 중엽 이래 지속되어 온 퇴계ㆍ남명 양 학파의 경쟁과 길항구도가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퇴계학파의 주도권이 강화되면서 남명⇒퇴계학파로의 이행이 가속화 된 것은 분명 통합적 현상이었다. 물론 남명⇒퇴계학파 쪽으로 전향한 세력들의 상당수는 내면적으로 남명에 대한 존숭 및 계승의식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外退內南’의 성격을 배제하기 어렵고,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서는 서인으로의 전향을 도모한 계열도 속출하였지만 인조반정 이후 모색되었던 영남사림의 이행의 기본구도가 남명⇒퇴계로의 흡수적 통합에 무게가 실려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영남학계는 17세기 초반에 접어들면서 고제 상호간의 주도권 경쟁과 그에 따른 분화가 촉진되었다. 퇴계문하에서는 서애계와 월천계가 退溪集의 편간과 서애의 주화오국 문제를 둘러싸고 분화되어 갔고, 다시 서애계는 廬江書院 위차문제를 계기로 학봉계와도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됨으로써 퇴계문인은 크게 월천ㆍ서애ㆍ학봉문파로 분화되어 갔다. 남명문하의 분기는 내암계와 한강계의 양대 구도로 전개되었는데, 적어도 인조반정 이전까지는 내암계가 상대적 우위권을 확보하였다. 퇴계ㆍ남명문인의 분화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한강의 행보였다. 주지하다시피 한강은 퇴계ㆍ남명 양문의 고제로 알려져 있으나 만년으로 갈수록 퇴계 쪽으로 경도되어 갔다. 1603년의 ‘동강만사’는 그러한 인식 전환의 구체적 표명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내암과의 관계도 점차 악화되어 갔지만 한강은 선조말~광해군초를 기점으로 양문고제로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특히, 1607년에 이루어진 안동부사 부임은 안동ㆍ예안 등 퇴계학파 본거지로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는 월천, 서애의 사망으로 안동ㆍ예안권이 뚜렷한 학문적 구심점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바로 이 때 한강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20명에 달하는 문도를 규합함으로써 寒岡學團의 외연을 확충함은 물론 자신이 월천ㆍ서애ㆍ학봉과 더불어 ‘퇴문4고제’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토대를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강은 ‘東岡輓詞’⇒내암의 접견 요청 거부⇒朴而立 고변사건⇒내암의 晦退辨斥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내암과의 사이가 더욱 악화되고, 심지어 일각에서 그를 두고 ‘배사’했다는 비난까지 떠도는 상황에서도 1617년에는 ‘남명종사소’를 주관하는 등 ‘南冥敬慕意識’을 심화시켜 나갔는데, 이 역시 嶺南盟主意識에 바탕하여 양문의 통합을 추구하려 했던 의지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1620년 한강이 사망하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남명학파의 저변이 흔들리게 되자 영남학계는 심각한 지형변화의 국면에 봉착하게 되었다. 남명계 한강문인의 퇴계연원 강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퇴계ㆍ남명에 대한 한강의 양측적 계승의식은 한강문인 내부에 孫處訥(慕堂) 계열의 ‘退溪推尊論’과 徐思遠(樂齋) 계열의 ‘南冥尊崇論’이 길항하는 배경이 되었는데, 인조반정으로 남명학파가 극심한 타격을 받아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자 상당수의 남명계 인사들이 퇴계학파 쪽으로 연원전향을 시도하였다. 한강의 남명적 성향을 가급적이면 드러내지 않는 대신 한강에게 있는 퇴계적 성향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 ‘한강신도비명’ 개정론은 ‘연원전향의 辯’으로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치밀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퇴계학파는 그 외연과 정통성을 더욱 확대ㆍ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퇴계학파의 문파적 분립 -치열한 논쟁의 수반-
퇴계학파는 南冥系에 대한 흡수와 수용을 통해 학파의 외연을 확대하며 영남학계에서의 정통성을 더욱 강화하게 되지만 門派的 분화라는 내부적 진통에 직면하게 된다. 새로운 학풍을 추구하는 학파의 속성상 분화 자체가 문제시 될 것은 없었지만 분화의 根因이 학문적 지향의 차이보다는 퇴계고제 상호간의 갈등과 우열경쟁에 있었다는데 문제점이 있었다. 퇴계집의 편간과 서애의 主和誤國 문제를 둘러싼 ‘月川ㆍ西厓論爭’과 서애ㆍ학봉의 여강서원 합향을 둘러싼 ‘위차논쟁’을 그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특히 후자는 안동과 예안이라는 지역별 대결구도를 넘어 향후 영남지역 퇴계학파를 양분[屛論ㆍ虎論]시키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부작용은 더욱 컸다. 이러한 학문 외적인 요인에 의한 문파적 분화는 학맥간, 지역간 대립과 갈등구도를 심화시키게 됨으로써 영남학계의 내부적 결속력 또한 크게 저하되었다. 한편 안동ㆍ예안은 퇴계의 생존시부터 퇴계학파의 본거지라는 지역적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영남학계를 이끌어 왔고, 이런 흐름은 월천ㆍ서애가 활동하던 1600년대 초반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606년 월천의 사망에 뒤이어 1607년 서애마저 사망하게 되면서 예안ㆍ안동권은 학문적 구심점으로서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어 갔는데, 이때 ‘嶺南盟主意識’을 바탕으로 영남학계의 주도권을 잡은 인물이 한강이었다. 한강은 1607년 안동부사 재임을 기점으로 퇴계학파의 본거지로까지 자신의 학문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게 되는데, 한강의 이러한 역할은 ‘寒岡學團’의 외연 확대를 넘어 영남학계의 무게 중심을 안동ㆍ예안에서 성주ㆍ인동 등 서부 江岸地域으로 선회시키는 의미가 있었다. 1) 서애ㆍ월천논쟁 ○『퇴계집』편찬에 따른 입장차이 -월천의 ‘전고수록론’과 서애의 ‘편집축약론’ -월천의 퇴계상: 향촌 중심의 교육ㆍ도학자 -서애의 퇴계상: 경세에 적극적인 학자ㆍ관료 ○ 임란시 외교노선과 관련한 월천의 서애 비판 2) 여강서원 위차 논쟁 ○ 여강서원(호계서원) 위차 논쟁 -宦歷과 年齒가 위차 결정의 기준으로 대두 -우복의 ‘廟門不可復開論’과 퇴계ㆍ서애ㆍ학봉 3구도로의 확립 3) ‘한강신도비명’ 개정 논쟁 ○ 신흠이 찬한 ‘한강신도비명’의 개정 논쟁 -남명계 한강문인의 ‘개정론’과 퇴계계 한강문인의 ‘개정반대론’의 대립 -한강신도비명에서 남명적 색채의 제거에 주안점⇒남명계 한강문인의 퇴계학파로의 전향의 변 4. 여헌ㆍ우복계의 성장과 쇠퇴 1) 여헌ㆍ우복계의 대두 이런 흐름 속에서 영남학파의 새로운 학문적 구심점으로 부각된 인물이 여헌과 우복이었다. 양인의 부각은 영남학계의 세대교체를 의미함과 동시에 각기 인동과 상주를 거점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학계의 무게 중심이 안동ㆍ예안이나 진주ㆍ합천에서 영남의 중서부 강안지역으로 이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헌ㆍ우복이 영남학계의 구심점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집권서인의 대 영남정책도 크게 작용하였다. 집권서인들은 대북계를 정권에서 철저히 배제시킴은 물론 이른바 ‘영남호강론’을 통해 안동ㆍ예안사림에 대해서는 강경적 통제책을 펼친 반면 상주, 인동, 성주 등 강안지역 사족은 적극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우복, 창석 등이 중용되는 가운데 여헌이 산림으로 징소되어 원로로 추앙을 받았으며, 이 외 鄭蘊(내암ㆍ월천ㆍ한강문인), 崔晛(한강문인), 趙靖(학봉ㆍ한강문인), 全湜(서애ㆍ여헌문인), 金榮祖(서애문인), 李潤雨(한강문인), 洪鎬(서애ㆍ우복문인), 權濤(한강ㆍ여헌문인), 金應祖(서애ㆍ우복ㆍ여헌문인) 등 인조조 영남남인의 핵심을 이루었던 인사들의 대부분도 한강ㆍ여헌ㆍ우복의 문인들이었다. 여헌의 학통에 대해서는 ‘五賢繼承論’, ‘晦退繼承論’, ‘寒岡繼承論’, ‘不由師承論’ 등 여러 견해가 존재하여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남명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여헌이 한강의 문인인지 여부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따르지만 그가 인동, 선산, 영천 등지를 중심으로 강학하며 문도를 규합함에 있어 처숙이었던 한강의 후원과 영향력이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여헌문인록」에서 확인되는 여헌의 문인수는 300여명에 이르며, 이는 퇴계ㆍ한강문인과 버금가는 수치이다. 여헌학단은 16세기 중엽 선산지역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던 松堂學脈을 토대로 형성되었으며, 인동ㆍ선산권, 성주ㆍ칠곡권, 의성ㆍ청송권, 안동ㆍ상주권, 서울ㆍ호서ㆍ관서권으로까지 확산되어 나갔는데, 그 중에서도 중심을 이룬 것은 인동ㆍ성주ㆍ영천지역이었다. 여헌학단의 특색은 퇴계ㆍ남명학파의 절충과 ‘불유사승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퇴계ㆍ남명학파의 절충적 요소는 한강 이래의 흐름과 추세를 계승한 측면도 있었지만 남명은 물론 내암에까지도 우호적 측면이 없지 않았던 여헌의 입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여헌은 남명학파권에서 무려 60명에 달하는 문도를 규합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원래 내암문인이었던 인물도 적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여헌은 鄭汝昌, 申季誠, 金宇顒, 裵紳, 朴齊仁, 朴惺 등 남명학파 주요 인사들과 관련된 문자를 찬술하는 한편 新山書院, 禮林書院 등의 원향론에까지 깊이 개입하였는데, 남명학파에 대한 여헌의 이러한 포용적 자세는 퇴계학통을 고수했던 우복학단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포은⇒5賢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학통체계와는 별도로 여헌의 사승을 공맹과 정주로 바로 연결시키려는 인식이 내포된 불유사승의식은 여헌의 일부 著述과 평소의 언행에서 비롯되어 점차 문인집단으로 확산되어 갔다. ‘師承이 없다’는 뜻의 ‘不由師承’ 또는 ‘無所師承’은 비단 여헌 뿐만 아니라 포은을 비롯하여 李彦迪, 徐敬德, 李滉, 李珥, 奇大升, 申欽, 趙翼, 朴世采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旅軒學團에서처럼 이러한 인식이 사제간의 교감에 의해 하나의 ‘집단의식화’하여 기존의 학통ㆍ도통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 또는 도전의식으로 발전한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불유사승의식’은 비록 그것이 自尊意識에 바탕한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성을 지닌 인식이었던 만큼 臨皐書院 並配論爭이나 한강과의 師承관련 논쟁에서 보듯 그 파장도 컸던 것이다. 이 점에서 ‘불유사승의식’은 여헌학단의 분명한 특징인 동시에 학단의 기반 약화를 초래하게 되는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한편 우복을 종사로 하여 형성된 우복학단은 풍산ㆍ상주권의 강안사족을 인적 기반으로 하였고, 穌齋계열의 수용과 흡수를 통해 학단의 토대를 강화하였다. 「우복문인록」에서 확인되는 우복의 문인은 100여명에 이르며, 그 분포에 있어서도 주로 상주ㆍ함창지역, 안동ㆍ예안지역, 예천ㆍ용궁ㆍ영주ㆍ순흥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여헌학단에 비해서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우복학단은 여헌학단과는 달리 남명계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고, 1635년 ‘퇴계변무소’의 대응과정에서 보듯 안동ㆍ예안사론에 대한 독자성을 강하게 추구하였다. 특히, 서애의 적전을 자처했던 우복은 서애계의 ‘溪門嫡傳論’을 공고히 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이런 정황은 1620년 서애ㆍ학봉의 여강서원 합향을 강행, 성사시키고, 위차를 ‘厓東鶴西’로 결정짓는 과정에서 분명히 확인되었다. 우복과 우복학단에서 서애계의 ‘계문적전론’을 강하게 추진했던 주된 목적이 퇴계⇒서애⇒우복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수립을 통해 학단의 학적 우월성을 확보하는데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복학단의 또 다른 특징은 서인과의 교류와 연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서애의 학문ㆍ정치적 기반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우복은 원래 우율을 비롯한 서인 기호학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만년에 이르러 우율에 대한 인식을 선회시키게 되었다. 서인계에서 ‘愚伏晩年悔悟之見’으로 부르는 이러한 인식상의 변화는 신석번 등 일부 우복문인들이 서인으로 선회하는 단초가 되었고, 나아가 상주지역이 영남내 서인[노론]세력의 구심점으로 대두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 여헌ㆍ우복계의 쇠퇴 17세기 초반 영남학파의 실체로 부상했던 여헌ㆍ우복학단은 17세기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기반의 약화 과정을 걷게 되었다. 여헌학단의 경우는 무리한 원향론의 추진과 사승관련 논쟁이 그 원인이었고, 우복학단의 경우는 서인계의 확산에 따른 남인계와의 대립이 원인이었다. ‘不由師承論’에 바탕하여 추진된 여헌의 임고서원 병향론은 芝山(曺好益) 문인은 물론이고 포은을 대종으로 받드는 당시 학계의 풍토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여헌문인들은 이를 무리하게 추진하다 끝내 실패하게 됨으로써 여헌학단의 위상은 크게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여헌의 사승관련 논쟁은 한강과 여헌 사이의 사제관계여부보다 훨씬 더 복잡한 내막을 지니고 있었지만 연원 문제와 맞물려 논쟁보다는 시비 차원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원색적인 공방이 펼쳐짐으로써 양측 모두 기반의 약화를 감수하게 되었다. 한편 우복학단은 우복의 ‘牛栗認識’의 변화를 계기로 서인과의 교류와 유대가 강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문인들이 서인으로 선회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申碩蕃이었다. 이후 신석번은 兩宋 등과의 정치ㆍ학문적 유대를 굳건히 하며 영남내 서인계 영수로서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고, 이런 흐름은 신석번의 문인 성호영의 아들 成晩徵에게로 이어졌다. 權尙夏의 문인으로서 ‘江門8學士’의 한 사람으로도 거론되는 성만징은 기호학통을 더욱 강화해 나감으로써 남인계와의 충돌이 불가피 했다. 남인이 절대 주류를 이루었던 영남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영남내 서인계의 연원이 우복에게로 소급되고, 또 그들이 영남내 서인공론의 주론자로 등장했다는 것은 분명 우복학단의 정치적 입지와 명분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1) 寒旅師承 논쟁 - 한강과 여헌의 연원논쟁 - 한려학파의 분화 촉진 - 미수의 학벌강화 - 한강학파의 정치적 외원 확보 (2) 임고서원 並配 논쟁 - 여헌과 포은의 동일시: 並享 - ‘불유사승론’에 바탕한 別立門派 의식 (3) ‘愚伏晩年悔悟之見’ - 우율에 대한 우복의 인식변화 - 서인 사계학파와의 통혼⇒영남내 서인세력 확산의 계기 5. 영남학파의 정치적 분화 일반적으로 영남은 영남학파의 본산으로 학문적으로는 퇴계ㆍ남명의 학통을 잇고, 정치적으로는 南論을 세수한 지역으로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조선후기 정치사의 맥락에서 영남의 실상을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영남의 학문, 정치적 이탈현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종전까지의 통념이 논증되지 않은 선언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조반정은 서인정권의 초석을 다지는 일대 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인은 서인에 의해 조용되는 이른바 관제 야당으로 전락한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이이ㆍ성혼문묘종사문제, 예송 등 사문 및 전례 논쟁과 관련해서는 서인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특히, 이 두 사안은 그 전개 과정에서 지방의 유림들이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어 서남 유생간에 격렬한 공론 다툼을 수반하기에 이르렀다. 사문 또는 전례와 관계된 서남간의 대립 국면은 영남내 서인세력의 확산에 영향을 미쳐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서인세력이 상주, 인동, 성주, 대구 등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형성하여 서인 공론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영남내 서인세력은 대체로 이이ㆍ성혼ㆍ김장생 및 송시열ㆍ송준길 등 기호학파 종사들과의 학연을 매개로 형성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나 원래 남인 영남학파의 일원이었다가 정치ㆍ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인으로 전향한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숙종조를 거쳐 영조ㆍ정조조에 이를수록 후자가 보다 일반화 되었다. 후자의 경우 학적 연원을 추적해 보면 우복ㆍ한강ㆍ여헌학맥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17세기 영남학파의 동향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이 시기는 우율문묘종사, 예송, 송시열고묘론, 김장생문묘종사론 등 굵직굵직한 정치적 현안이나 쟁점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서남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정치적 분화는 원래 남인 영남학파에서 서인 기호학파 쪽으로 정치ㆍ학문적 입장을 선회하는 계열의 증가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정치ㆍ학문적 입장의 선회는 주로 서애ㆍ우복계에서 한강ㆍ여헌계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었다. 예컨대, 초기 서인세력의 핵심을 이룬 가계가 평산신씨 신석번(우복문인)계, 인천채씨 蔡得海(우복문인)계, 장수황씨 黃紐(우복문인)계, 의성김씨 金廷堅(우복문인)계 등 주로 우복계에 집중되었던 반면 현종~숙종조를 거치면서 한강계에서는 영천이씨 이휴운계, 안동권씨 權濬계, 하동정씨 鄭弘緖계, 달성서씨 徐忭계, 여헌계에서는 인동장씨 장광한ㆍ용한계를 비롯하여 경산이씨 이주계, 밀양손씨 孫起業계, 밀양박씨 朴瓈계 등 한강ㆍ여헌계의 주요 가계로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우복ㆍ한강ㆍ여헌계의 이러한 서인화 경향은 남인의 입장을 고수하며 서인으로의 이탈세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학봉-갈암계와는 매우 대조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 안동권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동부지역에서 형성된 갈암학단이 퇴계학맥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것도 우복ㆍ한강ㆍ여헌계의 정치적 분화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서인으로 선회 또는 전향한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ㆍ사회적 기반의 강화를 위해 기호계 인사의 院享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로서 송시열ㆍ송준길의 오산서원 추배론과 이이ㆍ성혼ㆍ김장생ㆍ송시열ㆍ송준길을 제향하는 서원의 건립론이 대두되었는가 하면 갑술환국 이후에는 盤谷書院(거제), 竹林書院(장기), 老江書院(성주) 등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들이 속속 건립되어 영남내 서인[노론]세력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친서인 세력의 확산과 기호계 인물을 제향하는 원우의 증가로 대변되는 기호학맥의 영남확산이 상주, 인동, 성주 등 주로 영남의 서부 강안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 지역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던 우복ㆍ한강ㆍ여헌계가 영남의 남인 사회에서 영향력이 약화되는 구실이 되었다. 이들이 서인 기호학파를 표방하게 된 구체적 원인과 전향 세력의 주요 분포지가 상주ㆍ함창ㆍ성주ㆍ인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서부 지역에 치중된 배경에 대해서는 보다 치밀한 분석이 요구되지만 전향 세력들은 이이ㆍ성혼문묘종사론, 예송 등 조선후기 정치사의 주요 현안마다 영남지역 서인공론을 대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남인들과 크고 작은 마찰을 양산하는 가운데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갑술환국 이후에는 서인계[노론계] 원우 건립을 통해 기호학맥의 확산운동으로까지 그 행보를 진전시켜 영남학파의 정치적 분화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이러한 추세는 숙종 후반의 송준길ㆍ송시열 문묘종사론과 영조 초반의 무신란을 계기로 더욱 확대되어 갔다. 17세기 영남학파의 주도권이 월천 및 서애ㆍ우복계⇒한강ㆍ여헌계⇒학봉ㆍ갈암계로 이행했다고 전제할 때, ㆍ우복ㆍ한강ㆍ여헌계열에서 두드러졌던 서인화 경향과 거기에 따른 결속력의 저하는 17세기 후반 갈암을 구심점으로 학봉ㆍ갈암계가 영남의 새로운 학문적 구심점으로 부상하는 한편 향후 영남학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주된 동력의 하나가 되었다. 6. 갈암의 영남학파 통합 지향 17세기 중후반 영남학파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대두된 인물은 갈암이었다. 퇴계-학봉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계승자였던 그는 계파간 교유의 확대를 통해 점차 영남사림의 중망을 얻는 가운데 1689년 기사환국 이후에는 남인산림으로 징소되어 정치적 위상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학문적으로는 主理論을 천명함으로써 퇴계학의 계승에 진력하였다. 결국 갈암은 정치적으로는 숙종대 남인의 영수, 학문적으로는 퇴계학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 발전시킨 인물로 자리매김됨으로써 영남학파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점할 수 있었다. 이런 위상을 바탕으로 그는 영남사림들을 대대적으로 규합하여 갈암학단을 형성시켜 나갔다. 갈암문인 300여명 가운데 본디 가학의 연원이 서애ㆍ우복 및 한강ㆍ여헌학맥으로 소급되는 인사가 80여명에 이르고, 남명학파권의 인사도 45명에 이른다는 것은 갈암이 계파와 학맥, 지역을 초월하여 영남사림을 재결집시켰음을 의미했다. 갈암의 학문ㆍ정치적 활동 영역의 확대 과정은 퇴계학맥의 확대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남명 및 내암의 존재와 역할은 크게 축소되어 갔다. 갈암이 ‘東岡文集序’와 ‘東岡神道碑銘’을 찬술하면서 남명고제 東岡(金宇顒)을 퇴계문인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라든가 남명의 핵심문인이었던 곽재우의 諡狀에서, 남명의 지우였던 郭珣의 묘지명에서, 남명의 대표적 사숙인으로서 17세기 중반 남명학파를 사실상 이끌었던 謙齋(河弘度)의 행장에서 남명과의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영남사림을 퇴계학파적 인식과 시각에서 편제하려 했음을 말해 준다. 어떻든 갈암의 역할로 인해 退溪-鶴峯-葛庵學脈은 영남학파에서의 주도권을 확립할 수 있었으며, 이런 흐름은 18세기 이후 密庵(李栽)⇒大山(李象靖)⇒定齋(柳致明) 등을 거치면서 더욱 고착,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 학봉-갈암학맥의 주도권 강화는 여타학맥의 약화를 의미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7세기 영남학파는 통합과 분화, 재통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보기에 따라서는 분화 또는 분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인조반정 이후 중앙정계와 유리되어 있던 영남사림들이 ‘영남’이라는 지역 속에서 사족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영남학파의 ‘자기정체성’의 확립과정이기도 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