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글
2011년6월 강연(지금 이 시점에 있어서의 主一無適의 의미-안병주 명예교수)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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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점에 있어서의 主一無適의 의미
안병주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1.
“儒學이 自己革新을 이룩해 나가면서 현대사회와 어떤 관련을 맺고 어떻게 기여하여야 하느냐”라는 現代儒學의 今日的課題를 풀어나가려 할 때, 우리는 지금 이 시대의 時中, 이 시대의 急務가 무엇인가를 먼저 깊이 省察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筆者도 다른 기회에 발표한 유사한 취지의 글에서 유교의 寡欲倫理와 ‘公’과 ‘均’ 思想의 새로운 思惟樣式에의 재투자에 대해 언급한 바도 이었다. 또한 중국 明末淸初의 黃宗羲의 明夷待訪錄, 그리고 조선 왕조의 실학자 茶山 丁若鏞의 유교적 혁명론인 「湯論(湯王革命論)」, 또한 중국의 康有爲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은 朴殷植의 「儒敎求新論」 등에 주목하면서 原初儒家에 보이는 유학의 民本思想에 대해 강한 관심을 표명한 바도 있었다. 民本은 물론 民主와는 다르다. 民本은 다만 ‘爲民(for)’이 강조될 뿐, ‘民에 의한(by)’도 ‘民의(by)’도 아니다. 게다가 ‘民을 위하여’라고 는 하나, 民과 일체가 되어서가 아닌, 高座에서 下視하는 ‘視座’의 문제가 유학의 民本思想의 가치를 貶下하게 만든다. 필자는 이 시대의 今日的課題로서 儒學을 부흥하기 위하여는, 철저한 이론 보완을 거쳐 순수한 理念으로서의 愛民의 民本思想을 새 시대의 새로운 思惟樣式 속에 재투자해서 살려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로운 思惟樣式 속에서의 儒學의 부흥이라는 큰 테두리의 문제를 고민하기에 앞서 직접 피부에 와 닿고 직접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그 직접 닥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온 국민의 賤丈夫化와 갈수록 심각해지는 配慮 철학의 빈곤이다. 온 국민의 賤丈夫化는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와 나라와 민족의 ‘格’을 떨어뜨린다. 이익을 獨占 壟斷하는 사람을 孟子는 賤丈夫라고 하였다. 壟斷은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인데 원뜻은 흙을 깎아 높이 隆起된 高所를 의미한다. 어떤 천한 사람[賤丈夫]이 이 高所에 혼자 올라 가 사방의 市場을 관찰한 뒤 그 이익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賤하게 여기게 되었고, 征商 즉 상인에의 세금부과가 이 賤丈夫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孟子(공손추장구 下)에 보인다.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人口에 膾炙된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내 욕심만 채우자니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 ‘信用’을 내던지는 사람도 많은 사회다. 이런 것을 걱정한 분이 옛날에도 계셨다. 윤리 실천의 주체로서의 ‘自我’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믿음이 崩潰된 인간사회에 신용관계가 定着되기를 열망하고, 사람 사는 세상에 사랑[仁]과 마음 씀[恕]의 配慮 철학이 확립되기를 누구보다도 힘쓴 孔子의 모습을 論語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사람이 社會的存在라고 하는 것을 항상 念頭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孔子(儒家)의 주장인데, “어진 사람은 자신이 서고자 함에 남도 세우고 자신이 成就하고자 함에 남도 성취하게 한다”(顔淵편)는 黃金律과 같은 이 命題는 洋의 동서를 막론한 보편적인 진리이다. 기독교의 윤리학에서도 황금률로 愛誦되는 聖書의 말씀이 있으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신약성서 누가복음, 6장 31절)가 바로 그것이다. “남이 나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안연편ㆍ위령공편)라고 하는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이상에서 우리는 나와 우리들의 인품의 ‘格’을 올리고 사회 전체에 고루 配慮의 철학이 普及되기 위한 滋養分으로서의 儒學의 의미를 살펴보았거니와 여기에서는 그 학문적 방법으로 李退溪의 敬의 철학과 主一無適의 의미를 이제 살펴 볼 단계가 되었다.
2.
‘敬’한 글자를 聖學의 始終의 要로 보고 聖學十圖 전체를 모두 敬으로서 主로 삼은 李退溪에 있어 “敬은 一心의 主宰이고 萬事의 本根”이었다. 그런데 이 ‘敬’의 중요성은 朱子學이라는 先行의 학문체계 속에서 이미 지적되고 있어 그것은 반드시 퇴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大學圖(성학십도 제4도)에서는 大學或問(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특히 “敬者는 一心之主宰요, 而萬事之本根也라”라든가, “然則敬之一字는 豈非聖學始終之要也哉아”라고 한 주자의 말을 퇴계 자신이 끌어대어 쓰고 있다. ‘主宰’니 ‘本根’이니 ‘始終之要’니 하는 말들은 주자의 말이다. 퇴계 創作의 말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선행의 敬철학에 비해, 퇴계의 경우는 理철학의 철저화라는 특성이 우선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退溪 64세 때의 「心無體用辨」은 心에 체와 용이 없다는 설을 비판, 心에 體와 用이 있음을 밝힌 것인데, 퇴계의 理發설은 체용이론을 바탕으로 理의 능동성을 이론화하여 理動說과 理到說로까지 발전한다. 이와 같은 퇴계의 理개념의 특성은 理의 實在性과 價値性(理尊說)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理尊說은 단순한 主理나 理優位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이해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說도 있다. 이같은 理尊的思考를 통해서 퇴계의 敬의 철학은 성립된다. ‘敬’에 의해 마음을 主宰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하면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有機的인 작용의 전부를 제어하는 것, 극언하면 마음이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敬을 설명하는 말 가운데는 ‘主一無適’이라는 개념이 있다. 「敬齋箴圖」(제9도)는 主題 자체에 글자 그대로 ‘敬’字가 있고, 그림의 중앙에 크게 위치한 ‘心’字의 양 옆에는 ‘主一’(左)이라는 두 글자와 ‘無適’(右)이라는 두 글자가 布置되어 있다. 또한 「夙興夜寐箴圖」(제10도)에는 그림 한 가운데 중앙에 ‘敬’字를 크게 그려 놓고 있는데 이 「숙흥야매잠도」는 퇴계 자신이 만든 것이다. 聖學十圖는 퇴계철학체계의 완성을 의미하며 주자학에서 중요시된 敬의 철학은 이 성학십도에서 再集大成된다. 主一無適의 適은 ‘갈 적’字이니, 마음이 한 가지 일에 集中되어서 다른 데로 분산되어 감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고 영어까지 사용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精神力의 集中度 즉 concentration의 高度化를 의미한다. 莊子 齊物論편에 보이는 「無適焉, 因是也」의 無適도 거의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고려 말의 학자요 名筆인 韓脩(1333-1384)의 호는 柳巷이다. 詩集으로 單卷 1冊인 柳巷集의 머리 부분 末尾에는 그의 12대손인 南塘 韓元震이 쓴 「主敬跋說」이 부록되어 있다(1863, 哲宗14년, 후손 韓在益에 의해 重印된 木活字 重印本). 이 「주경발설」에 흥미 있는 일화가 보인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옛날에 우리 先祖 柳巷선생께서는 고려 말에 文章과 德行으로 세상의 모범이 되셨는데 그 학문은 敬을 主로 하였다. 언젠가 陽村 權公(近)과 함께 闕下에서 同直할 때 <19세 年下의> 權公이 밥을 먹으면서 책을 보고 있었다. 선생(柳巷)이 말하기를 ‘그대는 敬을 主로 하고 있지 않는군. 한편으로 먹고 한편으로 보고 있으니 그래서야 마음이 어떻게 主一할 수 있겠는가?’ 하니, 권공이 悚然히 心服하여 선생을 終身토록 스승으로 생각하였다. 생각건대 당시에는 程朱의 說이 우리 동방에 아직 크게 행하여지지 않았음에도 선생의 敬을 말씀하심이 이처럼 默合하였으니, 心學 工夫에 깊이 自得함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以上 南塘의 문장에서는 그의 조상 柳巷 韓脩의 학문의 深造自得에 대한 높은 평가가 그 主眼이 되고 있지만, 어떻든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당시에 新書 독서가나 新學問 연구자들 사이에는 이미 程朱의 主一無適의 敬의 학문이 보급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마침 어떤 소설을 읽다가 主一無適과 관련하여 참고가 될만한 이야기를 보았기에 소개해 본다. 分子生物學으로부터 腦의 연구로 移行하여 성공을 거둔 腦神經醫學의 理論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精神力의 集中度 즉 concentration을 높이기 위하여는 감각의 일부를 제한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곧 blind method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다른 관심 분야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부득이 눈을 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바로 主一無適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부득이하면 짧게라도, 일정기간을 정해 놓고 그 기간 동안 마음(정신)을 한 가지 공부에 主一無適으로 집중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考試에 합격할 수도, 외국어에 능통할 수도, 금메달을 딸 수도 없었을 것이다. 孟子에도 흥미 있는 이야기가 보인다. 楚나라 사람에게 齊나라 말을 가르치려면, 초나라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사람을 莊이니 嶽이니 하는 제나라의 번화가에 수년 동안 대려다 놓아 두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비록 매일 매를 때리면서 초나라 말 하기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이다(雖日撻而求其楚라도 亦不可得矣리라 - 등문공장구 6장)”라고 맹자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초나라 말을 일정 기간[數年] 제한하고 오직 제나라 말만을 집중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하여 얻는 主一無適의 기막힌 효용인 것이다.
3.
이상에서 主一無適이라는 集中力의 기막힌 效用에 대해 보았거니와, 敬의 哲學ㆍ主一無適의 학문을 통해 退溪가 추구한 것은 무엇인가. ‘敬’ 한 글자를 聖學의 始終의 要로 본 聖學十圖, ‘敬’의 철학이 퇴계에 와서 그 再集大成의 위업을 달성한 聖學十圖, 이 성학십도의 ‘聖學’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사람으로서의 ‘格’을 성인의 경지에까지 끌어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리하여 그 사회 구성원 전체의 賤丈夫化를 막고 他者를 配慮하는 ‘配慮의 習慣’의 확실한 體得을 期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지금 이 시점에서의 主一無適의 진정한 의미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저 멀리에 있는 이상적인 인간으로서의 聖人槪念이 孟子<의 등문공장구 上에 보이는 顔淵>에 와서는 보통 사람들도 누구나 노력하면 도달이 가능한 성인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이 같은 성인 개념의 內包의 변화는 중국 宋代의 新儒學과 조선왕조 李退溪ㆍ李栗谷 등의 성인 개념에 至大한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이르러 학문의 목적은 致富나 出世와 같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聖人志向의 完璧에 가까운 道德主義로 일대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李退溪에 이르러서는 성인이 되기 위한 集中力(主一無適)을 강조하는 敬의 철학이 성학십도에서 集大成되었으며, 李栗谷은 擊蒙要訣(立志章)에서 “초학자는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하는데, 반드시 성인이 될 것을 목표로 삼고서 털끝만큼도 自小退託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학문의 목적을 성인에 두는 聖人自期의 학문관에 철저할 수 없다고 自小退託하기 쉽고, 他者에 대한 配慮에만 始終하기 또한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학문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한 周濂溪까지도 「太極圖說」에서는 성인을 그 능력이 天地와 같고 귀신처럼 吉凶을 안다고 표현하여 다시 凡人과의 거리를 벌려 놓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같은 큰 의미의 성인 보다는 우선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處方을 退溪의 聖學의 主一無適의 의미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히, 지금도 여전히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전국민 賤民化와 他者의 不幸에 대한 配慮心의 증발현상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타자의 불행에 직면할 때마다, 또는 타자와의 관계가 발행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조건반사적으로 타자를 생각하는 仁恕의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는 主一無適의 노력,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69년부터 40년간, 하버드대학의 총장을 지낸 수학자 C. W. 엘리엍의 말을 우리는 여기서 잘 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퇴직에 즈음하여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日野原重明라는 사람이 쓴 책에서 본 것인데, 엘리엍 총장은 학생들에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라고 하였다. 日野原氏의 말처럼, 이 말은 지금 이 시대에도 결코 시대착오적 발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증폭되는 말이다. 지금의 世態와 대비해 볼 때, 지금 이 시점에서 退溪의 敬철학의 主一無適이 갖는 의미를 저 엘리얼 총장의 말을 거울로 해서 照明해 볼 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습관적으로 발동되는 사람을 어떻게 聖人, 또는 聖人의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