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2011년3월(인문학의 윅와 그 극복 방안-송재소 교수)

  • 등록일 2015-04-01
  • 조회수 4
첨부파일

인문학의 위기와 그 극복 방안

 

송재소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1.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으니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 시대의 화두(話頭)가 되었다. 이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인문학의 개념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많은 논자들이 서양의 개념을 원용하여 인문학을 정의하려고 시도해왔다. 그 결과 인문학, 인문과학, 사회과학 3자의 동질성과 변별성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할 때의 인문학의 성격이 온전하게 밝혀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서양의 학술사(學術史)가 우리의 학술사 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근대 학문이 서양의 틀을 빌어서 그 체계가 확립되긴 했지만, 서양과는 문화전통이 다른 우리가 서양 학문의 외피(外皮)를 갑작스럽게 빌려왔다고 해서 학문의 내용과 진행 방향이 같아질 수는 없다. 또 지금 서양에서도 인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는지,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 위기의 정도가 어떠한지, 서양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아마 한국과는 사정이 많이 다를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과 서양은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환경과 경제적 여건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며 “이것이 인문학이다. 이것이 인문학이 위기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문학의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전제로서의 인문학의 개념을 동양의 학문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정치학이 정치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역사학이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듯 인문학(人文學)은 인문(人文)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면 인문이란 무엇인가? 인문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출전은 󰡔주역(周易)󰡕이다. 󰡔주역󰡕 비괘(賁卦)의 단사(彖辭)에 이렇게 씌어 있다.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사시(四時)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化成)한다.

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

이에 대한 정자(程子)의 주(註)를 통하여 좀더 분명한 뜻을 알 수 있다.

 

천문이란, 해와 달과 별이 뒤섞여 있고, 추위와 더위, 음과 양이 교대로 변화는 것을 말하는데 그 운행을 관찰함으로써 사시(四時)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다. 인문은 인리(人理)의 질서인데, 인문을 관찰함으로써 천하를 교화하여 천하가 그 예속(禮俗)을 이루는 것이다.

 

天文謂日月星辰之錯列 寒暑陰陽之代變 觀其運行 以察四時之遷改也 人文 人理之倫序 觀人文 以敎化天下 天下成其禮俗

 

󰡔주역󰡕에서는 이 세계의 현상을 크게 천문과 인문으로 구분하고 있다. 천문은 자연계의 현상을 가리키고 인문은 인간사회의 여러 현상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천문과 인문을 나란히 대비시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연계의 현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해와 달과 별의 운행에는 그 나름의 질서가 있고, 더위와 추위가 교대로 찾아오는 것도 어떤 법칙에 의한 현상이다. 이런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자연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일정한 법칙과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인리(人理)의 질서”로 표현되어 있는데, 인리(人理)란 인간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인리의 질서”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수행하기 위한 질서라 말할 수 있다. 이 질서가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법칙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인문이라는 것이다.

공영달(孔穎達)은 󰡔주역󰡕에서의 인문의 개념을 구체화시켜 “시서예악(詩書禮樂)”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시서예악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인간행동의 준칙을 담은 책이다. 그러므로 인문의 개념 자체가 이미 규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선초(鮮初)의 정도전(鄭道傳)의 글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월성신은 천지문(天之文)이요 산천초목은 지지문(地之文)이요, 시서예악은 인지문(人之文)이다. 그런데 하늘[天]은 기(氣)로써 존재하고 땅[地]은 형(形)으로써 존재하지만 사람[人]은 도(道)로써 존재한다. 그러므로 “문(文)은 도(道)를 싣는 그릇이다.”라 할 때의 문(文)은 인문(人文)을 말한 것이다. 그 도(道)를 터득하면 시서예악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아지고 삼광(三光 : 해와 달과 별 - 필자)의 운행이 순조로우며 만물이 옳게 다스려지는데 문(文)의 성대함이 이에 이르러 극치에 달한다.

 

日月星辰 天之文也 山川草木 地之文也 詩書禮樂 人之文也 然天以氣 地以形 而人則以道 故曰文者載道之器 言人文也 得其道 詩書禮樂之敎 明於天下 順三光之行 理萬物之宜 文之盛 至此極矣

(「陶隱文集序」)

 

정도전도 공영달의 소(疏)를 따라 시서예악을 인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인문은 도(道)를 싣는 그릇이라고 말했다. 인문 곧 시서예악의 글은 그 속에 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인간사회와 자연계를 함께 지배하는 최고의 원리를 지시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는 인문의 공능(功能)을 강조하려는 의도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인문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인문학은 이러한 인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文’이란 글자의 뜻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文’이란 원래 무늬 또는 문채의 뜻으로 쓰인 글자이다. 이 문채는 어떤 사물 고유의 속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일월성신은 하늘 고유의 무늬이고 산천초목은 땅 고유의 무늬이다. 일월성신이야말로 하늘을 하늘이게끔 해주는 무늬이고 산천초목이야말로 땅을 땅이게끔 해주는 무늬이다. 일월성신의 무늬가 없으면 하늘이라 할 수 없고, 산천초목의 무늬가 없으면 그것은 더이상 땅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문은 인간 고유의 무늬이다. 인문이 있으므로 해서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인 이상 인간 고유의 무늬인 인문이 있어야 한다. 인문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로 격하된다.

이렇게 보면 하늘의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이 천문학(天文學)이고 인간의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시서 예악이 인문이라고 했을 때의 시서예악은 포괄적인 개념이다. 시서예악은 인간의 윤리와 행동규범을 제시하는 전거로서의 대표성을 지니는 개념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동양적 전통의 맥락에서의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고 인간의 삶의 질(質)에 대한 학문이다. 결국 인문학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2. 인문학이 왜 위기인가?

호랑이에게는 호랑이의 무늬가 있고 기린에게는 기린의 무늬가 있듯이 인간에게는 인간의 무늬가 있다. 이 인간의 무늬가 인문(人文)인데 요즈음 이 무늬가 점차 퇴색해가고 있다. 이것이 위기이다. 인간의 무늬가 퇴색한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상실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무늬가 퇴색할수록 인간의 무늬를 연구하는 인문학이 지혜를 모아 이에 대처해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인문학의 위기이다.

인문학의 위기의 원인이 인문학 자체에 있다는 논의가 있다.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인문학은 그 용도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을 탐구하고 가치관의 문제를 연구하는 인문학의 역할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술 만능주의적 사고가 아무리 팽배해 있더라도, 물질적 이윤추구만이 삶의 목표라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규범적 가치관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의 비중이 더 크게 보인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으면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본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위 시를 읽고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양심적인 지식인에게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또한 우리는 역사의 거울에 현재를 비추어 보고 거기서 교훈과 지혜를 얻는다. 히틀러의 광적(狂的)인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앞으로는 그런 전쟁이 왜 일어나서는 안 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주역󰡕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사유방식에 대하여 근원적 성찰을 할 수 있다.

인문학의 대표적 분야라 할 수 있는 문학․역사․철학이 존립할 공간은 이렇게 넓은 것이다. 인문학은 가치관의 문제를 다룬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인가를 연구하는 것인 인문학이다. 그래서 전쟁과 학살과 거짓과 허위를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하거나 ‘나’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진전을 인문학은 일정하게 저지하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가치의 진공상태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예방해주는 것이 인문학의 임무 중의 하나이다.

인문학의 위기의 원인은 인문학 자체에 있다기보다 외부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우선,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세계화 이데올로기가 인문학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교통수단의 발달과 정보통신 기술의 향상으로 국가 간의 거리가 좁혀져 자본과 상품의 이동이 훨씬 용이해졌다. 그래서 각국의 무역장벽을 없애고 자본과 상품의 수출입을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다. 세계화를 주장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피차간에 모든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국가 간의 무역에 있어 공정한 게임을 하자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근원적인 불공정 장치가 이미 내장되어 있다. 이 세계화의 결과 다국적 기업이 전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초국적 금융자본이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지배하게 되어 국가 간의 심한 불평등을 초래하고 있다. 또한 경쟁력 향상을 위한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인원 감축과 대량 해고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도 몇몇 국제 투기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 경제를 하루아침에 마비시킬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국가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이다. 이 무한경쟁의 틈새에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오직 경제적 이익추구만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린 마당에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을 돌볼 까닭이 없다. 인문학적 마인드로는 더 이상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화의 첨병 노릇을 하는 것이 컴퓨터를 비롯한 IT 기술인데, 컴퓨터의 발달로 인한 정보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인문학 위기의 원인이라는 논의도 있다. 컴퓨터의 급속한 발달에 인문학이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문학 위기의 원인일 수는 없다. 정보화와 인문학이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속성상 인문학은 컴퓨터에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지나친 정보화가 인문학의 발달을 저해하는 측면 있다. “정보화만이 살 길이다.”라 하며 초등학교에서부터 인터넷 교육을 시키는 바람에 전 국민이 인터넷에 중독되어 있는 상황에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인문학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정보화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국가의 정보화 전략은 계속 추진되어야 마땅하다. 문제는, 인문학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정보화를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컴퓨터 기술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학문 영역이지만 일반 국민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컴퓨터 조작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국민의 정부 시절, 취임한지 한 달 만에 물러난 어느 교육부 장관의 취임 제1성이 “컴퓨터와 외국어를 교육의 지표로 삼겠다”는 요지의 발언이 있었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 말 속에는 “어떻게 해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없다. 일국의 교육정책을 책임지는 장관이 이렇게까지 막나가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거듭 말하지만 컴퓨터 교육이 필요 없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다만 컴퓨터 만능주의로 흘러 그것이 인문학의 고사(枯死)로 이어지는 사태를 우려하는 것이다. 아마 지금과 같은 인터넷 열기가 앞으로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인간 사고양식의 질적인 변화가 도래하여 지금까지의 인류와는 다른 ‘신종 인류’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미국의 기술문명 비평가인 니컬러스 카는 구글을 포함한 “인터넷 업체들이 가장 꺼리는 것은 한가롭게 한곳에 머물러 천천히 읽어내려 가거나 골똘히 사색에 잠기는 것”이라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터넷망을 옮겨 다니는 속도가 빠를수록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골똘히 사색하는” 기능이 거세된 인간은 “신종 인류”일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이제는 ‘나는 검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할 판이다. 이탈리아의 언어학자이며 소설가인 움베르트 에코는 “인터넷은 신(神)이다. 하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다”라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무엇이든 빠르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신적인 존재이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라는 것이다. 이 멍청한 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 인간 고유의 무늬(人文)가 바뀔 것이고 따라서 인문학의 개념도 다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을 빈사상태에 빠지게 한 주된 원인은 이 나라의 교육정책에 있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교육정책 때문에 학문이 이루어지는 핵심적 공간인 대학이 황폐화되고 있다. 이 잘못된 교육정책의 핵심에는 ‘시장논리에 의한 대학경영’이라는 해괴한 이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이란 자가 대통령의 절대적인 후원 하에서 밀어부친 시장논리의 도입은 그 후 역대 교육부 장관들에 의해 일관되게 추진되어 오고 있다.

시장논리란 수요와 공급의 논리이다. 소비자의 수요가 있으면 생산자가 상품을 생산하여 시장에 공급하고, 수요가 없으면 공급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경제논리이다. 대학교육도 이 경제논리에 따라 운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관련용어도 교육 수요자, 교육 공급자 등의 명칭이 통용되고 최근에는 교육시장이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이 시장논리에 의한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자는 왕이다. 소비자의 구미에 맞추어야 물건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에서도 수요자인 학생을 왕으로 모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수요자 중심의 교육인데, 이것은 학생을 이해하고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차원의 교육이 아니고, 모든 것을 학생위주로 운영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교육과정까지도 수요자 중심으로 개편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교육’의 결정판이 현행 학부제이다. 학부제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제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행 학부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이러한 장점을 무효화시킬 만큼 심각하다. 에를 들어보자. S대학교의 인문학부의 경우, 영문, 불문, 독문, 중문, 노문, 국문, 한문의 7개 학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부로 입학하여 2학년 진입 때 전공을 선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국에서 최초로 전면적 학부제를 실시한 이래, 인문학부로 입학한 학생의 90%가 매년 영문학 전공을 지원하고 한문학 전공에는 많을 때는 2명, 적을 때는 한 명도 지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학부제를 강행하라는 것이 교육부의 방침이다. 말로는 학부제가 강제사항이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교육부는 당근과 채찍으로 이를 교묘하게 강요하고 있다. 현행제도가 계속 유지된다면 아마 머지않아 한문학과를 포함한 비인기학과는 폐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령 폐과되더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학부제의 논리이다. 시장에서 돈 주고 물건 사는 것과 같이, 수요자인 학생들이 돈 내고 지식을 사는데 자기 구미에 맞는 것만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 수요자인 학생들이 배우기 싫다는데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학부제 하에서 지원자가 적어서 폐과된 사례가 실제로 있다. 그 대학의 총장은 철저한 시장논리에 따라 학교를 운영한 것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 총장은 교육부 장관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런데 지원자가 없는 비인기 학과가 대부분 기초학문 분야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기초학문의 토대 없이는 응용학문도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이러한 상식까지 무시하는 것이 학부제이다. 인문학도 이 기초학문 분야에 속한다. 생존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이 준엄한 경쟁의 시대에 그렇지 않아도 졸업 후 취업이 잘되는 학과, 돈이 되는 학과로만 몰리는 학생들의 풍조에 학부제는 부채질을 하고 있다.

교육에는, 배우는 사람이 배우기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가르쳐야 할 부분이 있다. 종아리를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을 시키는 것은 시장에서 물건 파는 것과는 다르다. 요사이 학생들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모든 일이 즉흥적이다. 그래서 성과가 느리게 나오는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 이것도 인터넷 식 사고의 결과 인듯한데 이런 학생들을 ‘소비자’로 모시고 소비자 중심의 교육을 하라는 것이 학부제이다. 이러한 제도가 학생들로 하여금 인문학을 더욱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학생들은 쉽고 편한 공부만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제도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학부제에서는 필수과목도 없어졌다. 학생들이 싫어할지도 모르는 과목을 강제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요자의 요구에 맞추어야 한다. 이런 제도 하에서 인문학이 생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3. 인문학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금 우리 대학에는 학문의 숨결이 사라졌다.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의 장(場)이 아니다. 대학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판이 되어 버렸다. 대학 운영자들은 부가가치가 생기지 않는 학문은 가차 없이 퇴출시킨다. 대학 캠퍼스 어디에도 학문을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학생을 보기 어렵다. 오직 영어와 컴퓨터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교수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교수들의 연구업적을 계량화하여 평가하기 때문에 ‘계산된’ 논문을 ‘전략적으로’ 써야 한다. 수강학생의 숫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미요시 마사오 교수의 글이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겠기에 잠시 인용해본다.

 

대학의 학부생을 위한 강의실은 갈수록 교육보다는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토크쇼의 장소로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의실은 슬프게도 아무런 알맹이 없는 면허증과 전문기능을 제외하고 거의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공허한 장소가 되었다. 한때 교수들은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기업의 세계에 있어서처럼 단순한 전문기능인, 사업가, 출세꾼, 기회주의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생각하고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것을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으로 들어갈지 모른다. (󰡔녹색평론󰡕, 통권 48호, p.38)

 

그렇다. 현 사태를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앞에서 인문학 위기의 원인을 나름대로 짚어 보았으니 그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님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선 강대국의 힘의 논리인 세계화 이데올로기를 막을 힘이 없다. 아니 정부가 앞장서서 세계화를 외치고 있다. 김영삼 정권 이래 ‘세계화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 아래 총력을 동원하여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있겠는가?

가장 평범하고 가장 교과서적인 답변은, 모두가 인문학적 가치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대학 경영자와 교수와 학생 모두가 인문학적 가치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에만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인간에게서 인간 고유의 무늬가 퇴색하고 있는 이 비극적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중에서 정부의 각성이 가장 중요하다. 정부, 특히 교육부는 하루빨리 이를 깨달아 그에 부응하는 정책을 펴야한다.

먼저 현행 학부제를 전면적으로 근본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대학에는 인문학을 연구하는 학과가 있어야 한다. 학과의 존폐를 시장논리에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물론 교육부에서는 인문학과 기초학문의 보호, 육성을 위해서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학부제가 존재하는 한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기초학문과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원인이 바로 학부제에 있는데 학부제를 개선하지 않고 인문학을 보호, 육성한다는 것은 임시 미봉책에 불과하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학과가 있고 이들 학과에 지원하는 학생이 있고 가르치는 교수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도 요란스럽게 대학을 뒤흔들었던 실험대학 제도의 참담한 실패를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을 위한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 인문학은 학문의 속성상 그 성과가 느리게 나타난다. 아예 성과가 보이지 않기도 한다. 인문학에 투자를 하면서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클릭하면 금방 화면에 나타나는 인터넷 식 성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인문학에 대한 지원방식도 개선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일이 적시하지는 않겠지만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를 받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번거로운 신청서류와 짜증나고 불필요한 각종 증빙서류를 갖추려다 보면 막상 연구할 의욕이 사라질 지경이다. 물론 이런 제도를 만든 데에는 교수들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행정편의주의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대학 경영자들의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 먼저 ‘경영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 대학은 부가가치를 산출하는 기업경영과는 다르다. 대학을 문자 그대로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학문의 중앙에 인문학이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대학다운 대학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학이 더 이상 교육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학은 스스로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