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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의 추억(이성무)-2012년 5월 강연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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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의 추억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이 성 무

 

 

 

1. 임진왜란의 경험

 

올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7주갑이 되는 해이다. 돌이켜 보면 ‘壬’년에는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고려가 멸망한 임신년(1392),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1592),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년(1762), 임오군란이 일어난 임오년(1882) 등이 그러하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만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征明假道)이었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는 조선이 허락할 리 없다. 조선은 즉시 이 사실을 명에 보고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오랑캐들끼리 싸우게 놔두자고 하면서 구원병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 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다. 최후의 방어선인 문경 새재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내 주었고, 명장 신립도 충주에서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싸울만한 군사도 없었고, 군사정보도 없었다. 선조가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안 것은 왜군이 상륙한 후 나흘 뒤였고, 신립도 적이 10리 밖에 올 때까지 몰랐다고 한다. 조선군은 지휘체계가 서지 않아 도원수, 순찰사, 순변사, 병사, 수사 등 명령이 여러 갈래서 나왔고, 왜군을 보기도 전에 산골짜기로 도망갔다. 왜군이 칼 잘 쓰고 조총까지 가진 세계 최정예의 군대였으니 무리가 아니다.

서울을 사수한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선조는 피란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분고분하던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비문서를 불태운다고 궁궐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선조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백성은 착취의 대상이었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조를 따르는 조신들도 다 도망가고 몇몇만 따라가는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렇게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이르렀다. 왜군의 선발대였던 고니시 유기나까(小西行長)는 뒤를 바짝 추격해 평양을 함락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선조와 이항복은 의주로 갔다가 여차하면 명나라로 내부(內附)하자고 하고, 윤두수 등은 함경도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도체찰사 유성룡이 반대했다. 임금이 한 발자욱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조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다. 왕이 없으면 구심점이 없어져 백성들이 돌아 설 것이고, 명나라가 도울래야 도울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망명정부도 불가능하다. 도망만 다니는 조선군을 믿을 수 없었던 선조는 끝까지 명에 의존하고자 했다. 뒤에 왕 자리만 보장해 준다면 국권까지 포기하려고 한 왕이 아닌가? 유성룡은 동북의 여러 고을이 아직 건재하고, 충의에 찬 의병이 며칠 안에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어디로 갈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성룡은 함경도로 가는 것도 반대했다. 함경도로 갔다가 길이 막히면 명군과의 연락이 끊기고 강경파인 가또 기오마사(加藤淸正)에게 사로잡혀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조가 숙천에 이르러 어디로 갈 것인가를 의논하는 그 순간, 함경도가 몽땅 가또에게 점령되어 두 왕자가 포로가 되었다. 함경도로 갔으면 왕이 생포되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선조는 의주로 가 이덕형을 보내 부랴부랴 명의 지원군을 요청했다. 유성룡은 시간이 없으니 빨리 구원병을 보내지 않으면 조선군이 몽땅 왜군이 되어 요동으로 쳐들어 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명도 왜군이 요동으로 진격하면 가뜩이나 몽고, 여진족과 싸우느라고 지쳐 있는데 일본이 요동으로 쳐들어 오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니까. 명의 입장에서 오히려 군사를 보내어 조선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7월 19일 조승훈(祖承訓)의 5.000군을 보냈으나 적을 가볍게 여기다가 패배해 돌아갔다.

심각하게 여긴 명은 다시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5000군을 주어 이원익의 조선군 8.000과 함께 평양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처음이요 마지막 승전이었다. 승전한 이여송은 황제에게 승전보를 올리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유성룡이 아무리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자고 해도 움직이지 않다가 벽제전투에서 패전한 후 평양으로 다시 후퇴했다. 그리고는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고니시 유끼오와 휴전회담을 계속했다. 휴전회담에는 조선은 끼워 주지 않았다. 6.25 휴전회담에도 한국은 끼지 못했다. 그 회담에서 조선을 분할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성룡이 계속 남진을 주장하고 휴전회담을 반대한 것도 조선이 분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명군은 조선군이 왜군을 공격하거나 왜군을 죽이는 것도 금지했다. 이로 보면 임진왜란은 명일전쟁이다. 조선군의 역할은 군량을 공급하는 역할 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해전은 이순신의 분전 때문에 조일전쟁이었다.

심유경은 평양 점령 2개월 후인 9월 1일 평양 북쪽 10리 밖 강복산 밑에서 고니시와 휴전회담을 개최했다. 이때까지 4개월간 고니시는 의주로 진격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진격했으면 선조와 조신들이 생포되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이순신이 남해안에서 일본 해군을 격멸했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를 “하늘의 도움”이라고 했다. 2차 휴전회담은 용산에서 열렸다. 이 때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명 강화사절의 일본파견을 요구했다. 그리고 진주성싸움 이후에 3차회담에서 1) 황제의 딸을 후비로 줄 것, 2) 8도 중 4도와 수도는 조선에 돌려 줄 것, 3) 포로가 된 두 왕자(순화군, 의화군)는 돌려 보내되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을 요구했다. 한강 이남 4도를 활양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이 결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의 책봉사가 “히데요시가 책봉을 받고 사은했다”고 거짓 보고했다.

회담이 결열되자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1597년 2월 14만 5000의 병력으로 조선을 재침했다.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그가 죽자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국토가 초토화되고 사상자를 많이 내기는 했으나 한 뼘의 땅도 잃지 않고 평화를 되찾았다. 다만 명군의 행패와 분할통치론, 직할통치론으로 시달렸다. 그렇지만 8년간 2천만 양 전비를 쏟아 부은 명은 망하고 조선은 여전히 친명파 정권이 정권을 유지하다가 한말에 똑같은 일본군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2. 조선분활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조선을 침공했는가? 그는 오랜 동안의 전국시대의 쟁패에서 일본을 통일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무장들이 양산되었다. 이는 히데요시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이 훈련된 무장들을 조선, 명 정벌에 동원하면 일석이조이다. 문약한 조 · 명을 정벌해 영토를 넗히고 부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질 수 있고, 국내에 두면 골칫거리인 무장들을 정복전쟁에서 소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히데요시의 명이 조금만 길었다면 이 두 가지 숙원을 이루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스가와 히데노리(須川英德)는 히데요시가 중국을 정복하면 천황을 북경으로 옮기고 자신은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의 중요한 무역항인 영파(寧波)로옮겨 국제무역을 주도하려 했다고 한다. 명나라가 부패하고 몽고 여진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흥세력인 히데요시가 그런 야망을 가질만하다. 그러나 조 · 명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조선은 쉽게 차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만약 고니시가 의주까지 진격했거나, 선조가 함경도로 피란갔더라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또한 명 · 일의 사신이 각각 그 주군을 속이지 않았어도 조선은 분단되었다. 전쟁에 지친 명나라가 일본의 약간 무리한 요구라도 들어 주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은 심유경과 고니시의 휴전회담에서 조선의 하4도 활양이 관철했더라면 조선은 분단되었을 것이다. 6.25가 아니고 이미 DeO 한반도는 분단되었을 것이다. 명도 한강 이북만 차지해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 되지 않도록만 하면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명일전쟁에서 각득기소(各得其所: 각각 그 하고자하는 바를 얻다)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사국인 조선만 손해 보는 것이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위해 손해보지 않는다.

일본은 애초부터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원병으로 온 명도 조선을 분할통치하거나 직할통치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을 바꿀 생각도 했었다. 1593년 11월 명은 사신을 보내 조선의 사정을 면밀히 살피도록 했다. 더 이상 조선을 구해 줄 수 없으니 왕은 교체하고 사신으로 온 행인(行人) 사헌(司憲)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에 사헌은 선조를 만날 때 스스로 남면하고 선조는 북면하게 했다. 모욕을 받은 선조는 사신에게 사표를 냈다. 유성룡은 평소 잘 아는 유격장군 척금(戚今)을 설득해 이를 무마했다. 유성룡은 백관을 인솔하고 사헌 앞에 서서 조선의 불행은 명을 치려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다가 당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사헌이 납득했다. 선조의 유임도 인정했다. 그는 선조에게 유성룡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

분할통치가 수그러들자 곧 직할통치론이 대두했다. 명이 막대한 전비를 보전해 주지 못한 왕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직할통치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요동 총독 손광이었다. 그는 조선의 군신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정동행성(征東行省)처럼 명의 순무사가 조선의 군신을 행성에 소속시켜 직할하자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명군이 있어야 불측한 자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는데 있었다. 국가의 주권이 없어져도 자기의 왕권만 유지하면 된다는 심산이었다. 을사오적보다 더한 배신자다.

1596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에서는 형개(邢价)를 총독으로, 양호(楊鎬)를 경리로 파견했다. 급수가 시랑(侍郞)급에서 상서(尙書)급으로 오른 것이다. 양호는 부임하자마자 경리아문을 설치하고 조선의 병권을 장악했다. 선조와 대등한 위치에서 신료를 접견했다. 양호의 권한은 국정 전반에 미쳤다. 조선에 대한 직할통치가 사실상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1882년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때까지 원세계(袁世凱)가 국정을 천단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1597년 12월에 양호는 울산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숨기다가 정응태(丁應泰)에게 탄핵되어 소환되었다. 선조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유성룡을 사신으로 보내고자 했다. 유성룡은 양호의 전횡을 미워해 가지 않았다. 이정구가 대신 갔다. 정응태는 조선이 왜군을 끌어들여 요동을 탈취해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고, 감히 조(祖)니 종(宗)이니 하는 천자나 쓰는 묘호를 쓴다고 공격했다. 선조는 거적을 깔고 황제의 처분을 가다렸다. 그리고 유성룡은 주화오국(主和誤國: 화의를 주도해 나라를 그르쳤다)의 죄목으로 이이첨과 성균관 유생들의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 되었다. 그 날 이순신도 노량해전에서 순직했다. 왜일까? 선조는 말리는 체 하면서 자기의 전패(戰敗) 책임을 유성룡에게 둘러씌워 쫓아냈다.

 

3.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국의 주변에는 중국과 일본, 몽고와 여진 · 거란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시대는 무치주의, 정복전쟁이 유행해 서로 무력으로 다투었다. 그러나 고구려 · 백제가 당나라에게 망하자 살아남기 위해 신라는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일본은 바다가 가로놓여서인지 무치주의를 계속했다. 고려 · 조선은 붓을 빠는 선비들이 지배하는 선비의 나라가 된 반면에 일본은 칼을 든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무사의 나라가 되었다. 이는 두 나라 역사를 크게 다르게 전개하게 했다.

문치주의의 국가안보는 외교로 지켰다. 이른바 책봉체제(冊封體制)다. 중원을 차지한 중국은 천자의 나라가 되고 주변국가는 제후의 나라가 된다. 천자와 제후 간에는 주종(主從)관계가 이루어진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사대(事大)를 한다. 제후국은 1년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고 조공(朝貢)을 바친다. 그 대신 천자는 제후국에 회사품(回賜品)을 준다. 이른바 조공무역이다. 이것으로 국가 간의 평화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면 주변국끼리는 어떤 관계를 가졌나? 교린(交隣) 관계였다. 물론 서로 자기 네가 소중화(小中華)라고 우기면서 갈등을 빗기는 했지만 보통 때는 그런대로 평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중 강대국이 생기면 균형이 깨져 전쟁이 벌어진다. 따라서 전쟁은 교린국 간에서만 일어났다.

그러므로 문치주의 국가에서는 군사를 기르지 않는다. 군사를 기르려면 돈이 많이 들고 잘못하면 무인들에 의해 구테타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문약(文弱)에 흐르기 마련이다. 조선도 전형적인 문치주의 국가였으므로 문약했다. 농토도 적고, 인구도 적어 강군을 육성할 수 없었다. 더구나 사대교린으로 200년간 평화가 지속되어 국방의식이 희박했다. 돈을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다가 아예 국가에서 군포(軍布를 받았다. 이러니 군사훈련, 무기준비, 정보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질 수 없었다. 이러니 군사는 있으나 마나다.

반대로 일본은 무치주의 국가로 상공업을 장려하고 외국무역에 역점을 두었다. 군비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왜구의 노략질이 가장 돈을 손 쉽게 버는 방법이었다. 왜구는 노략질을 일삼지만 항상 실전경험을 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거기다가 전국시대에 번주(藩主)들이 치열하게 싸웠으니 강군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칼과 성(城)이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이같은 선비와 무사의 싸움이다. 그러니 선비가 지게 마련이다. 문과 무는 치우쳐서는 안 된다. 조선은 문에 너무 치우쳤다. 그러니 강국이 처들어오면 위태롭다. 힘이 없으면 남의 나라에 업신여김을 당한다. 임란 때 명나라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조선은 꼼짝 없이 망했다. 명 · 왜에 의한 반도분단, 명의 분할통치론. 직할통치론이 제기된 것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친명정책으로 일관하다가 300년 뒤에 무기력하게 그 일본에게 망하고 말았다.

유비무환이다. 지금도 북한을 놓고 중 · 미 · 일 ·소가 6자회담에서 대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귀감삼아 군사력을 기르고 국방의식을 높여야 한다. 지난 번 천안암 피격 때 전 국민이 무감각했다. 임란 전에 선조나 조신들이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쳐들어오지 않기를 바래 무사안일하게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을 상기해 보자. 다행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고, 문무가 균형 잡힌 국가를 영위하고 있으니 그 때보다는 유리하다. 다만 국민의 튼튼한 국방의식과 자주의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