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삶
청년시절
-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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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년 시절
20세(1520년 경진庚辰)
『주역』이라는 책을 연구하였는데, 너무 깊이 빠져서 밥 먹는 것도 잊고 잠자는 것도 잊곤 하다가 건강을 해쳐서 그 뒤 오랜 세월을 고생하게 된다.
21세(1521년 신사辛巳)
의령 허씨 허묵재(許黙齋)의 맏딸과 결혼하였는데, 신부도 스물한 살로 둘의 나이가 같았다. 신부 집이 그가 살고 있는 온계 마을로부터 서북쪽으로 70여 리 떨어져 있는 영주군 푸실이라는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곳으로 가서 예절에 따라 혼례식을 올리고 부인을 대려 왔다.
막내아들로서 결혼을 하였으므로 딴 집으로 나가 살게 되었는데, 이 때 나누어 받은 논이 여섯 마지기였다.
23세(1523년 癸未)
그들 형제를 보고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언제나 타일러 주시던 할머니가 93살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이 해에 맞아들 준(寯)이 태어났다.
겨울에 퇴계는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에 유학을 하였으나, 기묘사화의 뒤끝이라선지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가지런하고 엄숙한 모습과 깊은 마음 공부를 홀로 지니고 있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드러나게 되어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도 많고 헐뜯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그치지 않아서 두 달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짧은 유학 기간 동안에 심경(心經)이라는 책을 얻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있어서 큰 수확이었다. 심경이라는 책이야말로 마음 공부에 대하여 옛 성현들이 핵심을 찔러 말해 놓은 구절들을 잘 정리하여 모아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고 비로소 그는 인격의 완성을 위하여 양심과 본성을 보존하고 기르는 일이야말로 옛 성현들이 대대로 이어가며 전해 준 가르침이며 사람의 가장 근본된 학문이라는 점을 가슴 깊이 느꼈다. 기묘년에 죽은 선비들이 그렇게 부르짖던 도학의 방법이 거기에 있었다.
퇴계는 이 책을 보면서 더욱 마음 다잡아 그 학문의 길을 걷기로 한다. 그가 일찍이 뜻은 세웠으나 뚜렷한 방법을 몰라서 그 동안 밤길을 헤매듯 길을 찾고 있던 학문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평생 동안 그는 심경을 어느 경전 못지않게 존중하고 믿었다.
『심경』을 읽을 때 퇴계는 깊이 글 속에 빠져 거듭 거듭 읽었다. 어떤 때는 ‘이러한 구절대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행위 하여야 하며 옛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던가?’하고 생각하면서 실제 있었던 일들을 찾아보았다. 또 어떤 때는 그 구절의 뜻과 그에 담긴 철학적 이치를 밝게 살피기도 하였다. 그렇게 오래 오래 계속하자 자연히 마음속이 열리면서 무엇이든지 환하게 깨닫지 않는 바가 없게 되었다.
이 무렵 집 살림이 어려워 과거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시험에 붙거나 떨어지는 것에 크게 마음 졸이지 않았다. 스물네 살 때에 계속 세 번이나 떨어지고도 마음 아파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이웃 집 하인이 그를 업신여기는 말투로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한 숨 지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뒷날 퇴계 선생은 이 때 자기가 사람들의 대우와 관심에 대하여 민감하였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말하면서 제자들은 그렇지 않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25세~26세(1525년 乙酉~1526 丙戌)
청량산에 들어가 책을 읽었는데 이 무렵 셋째형과 넷째형이 서울로 올라가서 넷째형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형들이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게 되자 스물여섯 살 때에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형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 집에는 아버지 때부터 모아 놓은 책이 많았기 때문에 퇴계는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이 기뻐서, “푸른 산 옆구리에 덩그런 집이 맑고 깨끗한데, 만 권 도서가 가득하구나. …… 산 살림에는 할 일이 없다 하지 마오. 내 평생 하고픈 일 얼마인지, 누구보다 헤아리기 어렵소……”라고 시를 읊는다.
이때에 이미 학문을 평생 사업으로 삼으려는 뜻이 굳건하게 섰던 것이다.
27세(1527년 丁亥)
지방 과거 시험인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고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났다.
하지만, 부인 허씨가 출산 탓으로 너무 쇠약해졌던 때문인지 채를 낳은 다음 달에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주에 있는 친정집 선산에 장례지내 주고는 겨우 칠년을 같이 하고는 아름다운 부인을 잃게 된 슬픔을 늘그막까지 잊지 못하였다.
28세(1528년 戊子)
서울로 올라가 진사 시험을 치고는 합격을 알리는 방(榜)이 붙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고향으로 향하였다. 한강에 도착하기 전에 방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별로 기뻐하는 빛이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30여 년 뒷날 어느 제자가 이때의 일에 대하여 “선생께서는 그 때 이미 청운의 뜻을 버리고 계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퇴계 선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아니하였다 한다.
30세(1530년 庚寅)
같은 예안 지방에 살고 있던 사락정(四樂亭) 권질(權礩)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권씨 부인의 아버지인 권질은 본래 서울에서 상당히 높은 벼슬자리를 맡았었으나 사화 에 얽혀서 10년 째 예안 지방 청량산 쪽 어느 산골로 유배되어 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퇴계가 인품이 훌륭하고 학문에 뜻이 높은 젊은이로서 부인을 잃은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위 삼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사락정은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죽은 권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거제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다시 신사무옥에 얽혀서 예안으로 유배당하여 살고 있었다.
권질의 동생 권전(權磌)은 1521년에 안처겸과 함께 기묘사화에서 득세한 남곤 등은 사림을 헤치고 임금의 총명을 흐린 간신배들이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모의를 하였는데 이것이 사전에 고자질 당하여 처형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것을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고 부른다.
31세~32세(1531년 辛卯~1532년 壬辰)
셋째 아들 적(寂)이 태어났다.
그때까지 살고 있던 집에서 건너다보이는 영지산 북쪽 기슭에 조그만 집을 짓고는 집 이름을 지산와사라 부르고 스스로는 영지산인(靈芝山人)이라 불렀다.
셋째 형 의(漪)가 세상을 떠났다.
33세(1533년 癸巳)
지난 해 말에 경상남도 곤양군수로 있는 어득강으로부터 쌍계사로 놀러가자는 편지를 받고 1월에 들어서면서 남쪽으로 여행길을 떠난다. 세상 떠난 허씨 부인의 친정인 의령에 들렀다가 사촌 누나들이 시집가 살고 있는 함안 창원을 거치고 진주 마산을 보면서 곤양에 도착한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쌍계사까지 관광을 하지는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 여행 길에 남명을 만났는가에 대하여서는 확실한 결론이 없으나 대체로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남행 길에서 농촌 백성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모습과 도회지 부자들이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30대 청년으로서 느낀 감회를 시로 읊었다.
양양 길 가고 있는 이른 봄 하순이라
동풍은 관청의 버들을 흔들고
기러기 오리들은 못과 내로 흩어지는데
군청 성곽은 높이 웅장하고
다락집 솟을 문들이 수풀처럼 우쭐대는구나.
집집이 잘도 수리 정돈하여
앞 가린 주렴들이 반공중에 걸렸으니
이 곳은 참으로 번화하여
흉년에도 이러하구나.
예능 익히는 저 사람은 어느 집 도령인가
몸 뒤집으며 멋지게 말달리고
들놀이 아이들은
밝게 웃으며 구불구불 어디로들 가는가.
너희들은 교만과 방탕을 삼갈진데
하늘의 재앙을 어찌 모르고 있는가?
부자가 아침 저녁 편암함을 탐할 때
가난한 자들은 이미 흩어져 유랑하여
길 가운데 엎어져 죽어도
아내 자식을 구하지 못한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어찌 걱정을 않다가
곳간이 비면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인가?
가슴 아픈 꼴 볼 때마다
우두커니 서서 한탄만 길구나.
(양양 길에서[襄陽道中])
봄을 지나고 넷째 형 해(瀣)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 유학 생활을 하면서 김인후와 만난다. 그러나 이 시절 성균관 태학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의 풍습이 10년 전이나 다름없이 이미 타락되어 있었다. 퇴계의 실망이 컸던 나머지 오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만다. 김인후와 작별의 시를 나누었고, 울적한 속마음을 푸는 시 몇 편도 지었다.
이 때 지은 시에 의하면, 나라에서 운영하는 태학관은 잘 먹고 노는 곳으로 변해 있었고 선비들이 과거 본다는 핑계로 병역이나 빠지면서 공부하는 척하는 곳이었다. 오히려 책 읽는 사람을 보고는 비웃음이나 치는 곳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초가을이 되자 마침내 한양을 등 뒤로 하고 고향을 향하여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마침 밀양 부사로 부임하는 권벌(權橃)을 만나 동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