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삶
벼슬길의 출발
-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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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살이 시절
1. 벼슬길의 출발
34세(1534년 甲午)
정식 과거를 보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웃 동네에 살았던 당시의 대학자 이현보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말했다.
“요즈음 시절에 기대되는 사람으로서는 이 사람을 뛰어 넘을 이가 없으니 나라의 다행한 복이요 우리 고을의 경사다.”
한편 어머니는 말하였다.
“너의 학문을 익힘이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의 성품이 남들과 다르므로 벼슬은 현감 한 자리 정도에 그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의 뜻이 너무 높고 깨끗하여 세상에 잘 맞지 않으므로 고을 하나만 맡아 지내고 높은 벼슬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겁을 내어 너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퇴계는 늘그막까지 어머니의 이 말을 잊지 않고 따르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나 다를까. 과거에 급제하고 처음으로 직책을 정할 때였다. 처음에는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부서인 외교문서 담당 승문원과 실록 편찬 기초자료인 사초(史草) 담당 예문관 및 춘추관의 벼슬자리를 추천 받았다.
그러나 세력 있는 대신의 방해를 받아 승문원의 말석 자리인 종9품 부정자(副正字)에만 임명되었다. 이 때 퇴계가 역사를 기록하는 자리를 맡아 요직에 앉는 것을 방해한 사람은 당시 정치 세력가이던 김안로(金安老; 1481-1537)였다. 그는 퇴계의 처가가 있는 영주 사람이었다. 같은 고향 사람인 이황이라는 젊은이가 갓 과거에 합격하여 보직 발령을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마땅히 자기를 찾아 와서 인사를 하고 환심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퇴계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줄에 서 주지 않았기 때문에 괘씸하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김안로는 기묘사화 때에는 조광조와 같은 신진사류로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뒤에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의 맏딸이며 세자(뒤에 인종이 됨)의 누나인 호혜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하면서 남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훈구세력들과 맞먹는 권세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사극에서 여인천하로 그려질 정도로 비빈들과 외척들 간의 암투가 심하던 이 시절에 세자의 외삼촌 윤임과 합세하여 세자를 둘러싼 궁중의 권력 암투에 깊이 관여하였다. 갖은 책략으로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내어 정적들을 죽이고 귀양 보냈기 때문에 공포정치의 주축으로 알려져 있었고 1534년에는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라 있었다.
35세-36세(1535년 乙未-1536년 丙申)
부산 동래까지 왜국의 노비들을 호송하여 출장을 가다가 여주에서 그 고을을 다스리고 있던 이순(李純)이라는 목사를 만났다.
이순 목사는 20여 년 전부터 중국 송나라 때의 채침이 쓴 『홍범황극내편』이라는 책을 연구하고 있었으며 『주역참동계』라는 책도 읽고 있었다. 그래서 퇴계는 이순 목사로부터 이 두 책의 내용에 대하여 설명을 듣게 된다.
『홍범황극내편』은 『주역』이라는 책에 설명되어 있는 64괘와 하도・낙서라는 그림에 드러나 있는 수의 이치에 의하여 하늘의 일도 땅의 일도 그리고 세상의 일도 풀이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세상일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주역참동계』는 역시 『주역』의 음양 오행 64괘와 간지(干支)가 서로 결합하는 납갑법(納甲法)의 이치를 빌려 가지고 사람의 정신력과 생명력이 융합되어 이루어진다는 내단(內丹)을 수련하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심성 수련에 관한 심오한 지침서로서 후한 때에 저술된 이후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책이다.
동래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고향에도 들려서 어머니를 잠시 뵙고 올라갔다.
이 해가 다 저물어 가는 때에 첫째 부인이었던 허씨의 친정 아버지 곧 퇴계의 첫 번째 장인 허묵제(許黙齋) 공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퇴계는 다음 해 초가을이 되어서야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 왔다가 장인의 빈소가 있는 의령으로 가서 그 영전에 곡하고 왔다.
이 때에 고향의 지방 부윤이었던 이현보를 모시고 강가에 지어져 있는 애일당이라는 정자 뒤의 언덕에 올라 시를 짓기도 하였고 때때로 안동 지방에 있는 여러 정자와 누각을 찾아 시를 읊으면서 휴가를 지냈다.
휴가가 끝나고 늦가을이 되었을 때에 벼슬이 호조좌랑으로 올랐다. 오른 벼슬자리에 한 석 달 있었을 무렵,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때에 고향 친구로부터 배랑 밤이랑 정성어린 물건과 함께 열 장이 넘는 긴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퇴계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생각이 뭉클 일어나서 긴 시 한 수를 읊었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아- 어버이께 이별을 고하고
서리 바람 찬 국화의 계절에
서쪽으로 올라와서
한 일이 무엇인가?
가슴만 답답한 채
말없이 벼슬에 얽매여
공무에만 바쁘다가
병든 몸을 걱정할 틈 없었네.
광음은 문득 문득 아니 머물러
쫓기듯 섣달그믐에 이르니
나그네 베개에는 시름도 많을세라.
꿈결에 혼이 문득 날아올라
나의 몸을 만져보니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데
나라에 보답하는 일도
그 또한 제대로 못 되었네.
어찌하여
일찌감치 어리석음 인정하고
초가집 돌아가서
편안히 있지 아니하는가?
힘들여 밭 갈아서
세금 넉넉 바치고는
맛있는 것으로 어머니 받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것이 참으로 내 분수에 맞으련만
오래도록 스스로 결단을 못 내려
명리 우거진 숲에 억지 낯을 들고
억누르고 감추어 숨기는 가운데
하릴없이 정신을 잃었구나.
오히려 술 마시고 흐트러질 줄이나 알지
학문의 참다운 가르침은
얻을 길이 없는 채
헤어진 옷조차 잡히고 꾸어온
항아리 속 좁쌀도
다 떨어져 간다네.
벼슬살이 좋다지만 싫증만 나고
고향 갈 마음은 그칠 수가 없구나.
…………………….(년말에 고향 편지 받고 느낌[歲季得鄕書書懷])
37세-38세(1537년 丁酉-1538년 戊戌)
음력 10월에 어머니 춘천 박씨께서 예순 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마음은 남달리 아팠다. 그가 과거를 본 것도 홀어머니를 잘 모시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며 이 해에 들어서 6품 벼슬로 승진하고부터는 어머니를 친히 모시고 봉양하려는 마음에서 지방으로 나가기를 원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급히 고향으로 내려와 지극한 효성으로 상례를 치른 끝에 몸이 회초리 같이 마르고 병을 얻게 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12월에 어머니를 온계 동네 뒷산에 묻고 만 2년 동안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정성을 다하여 상례를 치렀다.
조정에서는 1537년 10월에 김안로가 문정왕후 세력인 윤원형 윤원로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모략이었다는 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심복이던 허항, 채무택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낙인찍혀 유배를 당한 뒤에 사약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