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벼슬살이 가운데 서서

  • 등록일 2015-03-27
  • 조회수 100
첨부파일

2. 벼슬살이 가운데 서서

 

39세-40세(1539년 己亥-1540년 庚子)

 

12월에 상례를 마치자 조정에서 다시 정6품에 해당하는 홍문관의 수찬과 경연의 검토관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올라가지 않았다.

마흔 살이 되면서 주로 임금에게 바른 말을 올리고 임금의 학문적인 의문점에 대하여 바른 의견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승문원, 경연의 벼슬길을 차츰 차츰 승진해 올라가게 되었다.

 

41세(1541년 辛丑)

 

가뭄과 전염병이 심하였다.

임금에게 학문적인 책을 읽어주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자리[경연 經筵]에서 말하였다.

 

임금이 더욱 수양하고 반성하며 정치에 정성을 쏟으면 하늘이 감동하여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행사이든 나라에서 행사를 할 때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서 그에 못 미치지도 않고 그를 지나치지도 않아야 백성들이 화합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이 화합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정치가 잘되고 재앙이나 사고의 뒷수습이 잘 되며 나아가서는 천재지변이나 갑작스런 사고들이 예방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때에 퇴계는 고향에 있는 영지산(靈芝山)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호를 지산(芝山)이라 불렀다.

이 해에 잠시 특별 시간을 얻어 뚝섬이 있는 한강 가의 독서당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독서당이라는 곳은 나라에서 인재를 기르기 위하여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을 엄격하게 가려 뽑아서 학문 연구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특별히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여 주는 곳이었다. 특별 연수 기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뽑혀온 벼슬아치들 대부분이 술 마시고 시 읊으며 풍류만을 즐기면서 규정을 어기고 있었다. 젊은 퇴계만은 홀로 단정한 모습으로 그 곳에 살면서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책을 읽으며 깊이 있게 공부하였다.

이때에 읊은 시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덥거나 춥거나 술잔을 찾으며

옆 사람들이 나보고

어리석다 비웃는구나.

나를 손가락질하며

담장 구석에 붙어 서 있는

저 두 그루

꽃 핀 배나무라 하는구나.

(늦봄에 우연히 짓다[暮春偶作])

 

여름에는 한 달 정도 평안도 지방 의주로 출장을 다녀왔다.

이때 퇴계는 학다리(지금 서울의 서소문)에 살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밤알이 여무는 계절이 되자 담을 넘어 와 있는 이웃집 밤나무 가지에서 알밤들이 퇴계의 집 마당으로 떨어졌다. 그는 자기 집 아이들이 생각 없이 그것을 먹어 버릴까봐 일삼아 알밤들을 주워서 담 너머 주인집으로 되 던져 주곤 하였다.

겨울이 되자 세자를 옆에서 모시며 학문을 가르치는 정5품 문학이라는 직책까지 겸하게 되었다.

연말에 병환이 생겨 임금에게 사직하기를 희망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으로 벼슬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42세(1542년 壬寅)

 

3월 19일. 임금이 종이 쪽지에 임열(任說)·이황(李滉)· 민전(閔荃)·김저(金䃴) 등의 이름을 적어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올해는 근래에 없던 흉년이다. 3월 보름 이후부터 5월 보름 이전까지가 흉년 구제 시책이 가장 필요한 때인 만큼 적절한 조치를 못하면 그 피해가 크다. 안사언은 흉년 구제 시책을 태만히 한 까닭에 파직하였지만 그 밖에도 구제 시책을 부지런히 펴지 않는 수령이 한둘이 아니다. 4개 도가 더욱 심하니 나의 곁에 있는 사람 중에서 가려 보내려 한다. 암행어사처럼 분주하게 돌아다니지 말 것이며 거느린 무리나 음식은 되도록 간략하게 하고 험하고 외딴 마을까지 샅샅이 방문하라. 떠도는 자는 몇 명이고 굶어 죽은 자는 몇 명이며, 도와주어서 목숨을 살린 자는 몇 명이고 굶주려서 죽게 된 자는 몇 명이며, 어느 수령은 성심껏 구휼하고 어느 수령은 지원을 게을리 하는가 따위의 일을 탐문해서 온다면 내가 친히 본 것이나 다름없으며, 백성들 또한 나의 걱정하는 생각이 깊은 줄을 알 것이다.”

드디어 임열을 전라도로, 이황을 충청도로, 김저를 경상도로, 민전을 경기도로 각각 보냈다.(󰡔중종실록󰡕)

이와 같이 흉년 대책을 세우려는 임금의 뜻에 따라 충청도 지방 어사로 임명되어 늦은 봄부터 초여름까지 충주, 진천, 천안, 태안, 전의, 공주 등 각 고을을 돌아보았다.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간사한 관리들을 가려 낸 뒤에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보고 내용은 탐관오리들이 관청의 물건을 제 물건 같이 가져가며 굶주린 백성은 구하지 않고 있으니, 먼저 탐관오리들의 책임을 물어 죄를 벌하는 일부터 하고 나아가서 굶주린 백성을 잘 어루만져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인귀손(印貴孫)이라는 공주 판관은 거칠고 탐욕스러움이 심했으므로 그 이름을 바로 적어서 보고하였더니, 임금이 그의 죄를 다스렸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도 3년을 견딜 수 있는 곡식을 저축하여 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흉년 대책을 말하였다.

가을에는 임금의 비밀 명령을 받고 강원도 지방 암행어사로 나가서 원주, 영월, 평창, 횡성, 홍천, 춘천, 양구, 강릉 등지를 돌아보고 돌아와서 󰡔관동일록(關東日錄)󰡕이라는 기행 일기를 썼다. 이 때 금강산에 가까이 가서도 산을 직접 구경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43세(1543년 癸卯)

 

정월에 경상도 거창에서 그 곳에 사락정(四樂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살고 있는 장인의 회갑 잔치를 베풀었다.

퇴계의 장인 권질(權礩) 공은 10여 년을 예안 지방 산골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뒤 이 곳 거창으로 내려와서 남은 생애를 보내고 있었다.

퇴계는 이 장인을 위하여 자기 고향인 온혜나 청량산 가까운 곳에 살집을 마련해 드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때 직접 살고 있는 환경을 보니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새와 물고기를 벗하고 지내시는지라 자기의 계획은 필요 없게 되었음을 느끼면서 시를 읊는다.

 

기구한 운명 다 겪으시고도

기개 아니 꺾이시며

전부터 몸에 단단히 익히신 바는

산골에 사시는 일이니

세상의 모든 일 다 잊으시고

사락정 가운데 흠뻑 취해 지내옵소서.

(사락정을 제목으로[題四樂亭])

 

이때 퇴계의 지산이란 호는 고향에 있는 영지산에서 그가 젊은 시절 글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 살고 있던 작은 집 지산와사가 아직 남아 있어서 언제나 그 곳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외가 쪽 아저씨이자 벼슬 선배인 이현보 선생이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이 집을 수리하여 거처하면서 산천을 즐기고 있었다. 더구나 정월 어느 날, 그 분이 퇴계에게 시를 지어 농 섞인 편지와 함께 보내 왔다.

 

“……자네 옛날에 이곳에 살면서 스스로 영지산인이라 불렀으나 이제 내가 먼저 돌아와서 차지하였으니 손님이 주인을 몰아낸 꼴이네. 될 수 있으면 빨리 소송을 하여 찾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네……”라는 내용이었다.

퇴계는 존경하던 어른으로부터 이렇듯 허물없이 친근한 편지와 시를 받고는 절로 미소를 머금으면서 기꺼이 영지산인 곧 지산이라는 호를 이현보 선생에게 넘겨 드렸다.

가을에는 역시 옛 홍문관 벼슬살이 시절 상관으로 모셨던 이언적 선생이 경상 감사가 되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한양 남쪽 교외까지 나가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송별하였다.

또한 성균관 유학 시절부터 서로 뜻이 맞아 사귀던 김인후가 어버이를 받들기 위하여 고향 가까운 고을의 수령 자리를 임명받아 내려가게 되자 그의 인품과 뜻을 기리는 긴 시를 읊어 그를 떠나보내면서 말한다.

“……생각나거든 아끼지 마오. 안부 편지 띄우는 일을……”

이 일에 자극을 받았음인지, 겨울에 들어서면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버이 무덤에 성묘하였다. 그러고는 고향에 그냥 눌러 살 뜻을 굳힌다. 그래서 예빈시 부정, 사헌부 장령 등의 자리를 임명받고도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때 퇴계의 심정은 그가 조식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한갓 옛 것을 그리는 마음뿐이었는데,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께서 늙으셨기 때문에 친구들은 과거를 보아 국록을 받도록 하라고 굳이 떠밀었습니다. 나 또한 알찬 식견도 없었던 나머지 문득 마음이 움직여 합격자 명단에 들고 말았습니다. 티끌 속에 파묻혀 하루도 겨를이 없게 되니 다른 일이야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 뒤로 병은 날로 깊어지고 또 스스로 헤아려 보아도 세상을 위하여 공헌할 것이 없었습니다.

비로소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돌려 점점 옛 성현의 책을 가져다 읽게 되니 그제야 크게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고쳐 바꾸어서 처음에 실패했던 일을 다시 회복하는 모습을 얻고자 사직을 하여 벼슬자리를 피하고는 책 보따리를 안고 지고 옛 산골로 들어와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더욱 찾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하늘의 신령함에 힘입어 만에 하나 조금씩 한 치 한 치 쌓임이 있게 된다면 이 생애를 헛 보내지는 않겠지요. 이것이 나의 10년 전부터 가졌던 뜻이요 소원이었습니다……

 

44세(1544년 甲辰)

 

홍문관 교리와 승문원 교리를 함께 맡으라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영주를 지나 문경 새재를 넘고 충주를 거쳐 다시 한양으로 올라간다.

이 때 이현보 선생은 시를 읊어 퇴계를 떠나보냈다.

한양으로 올라와서 임금에게 절을 올리고는 성을 나가서 지난날 책을 읽던 독서당으로 가 있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정4품 벼슬로 승진하였으나 병을 이유로 한가한 직책을 주로 맡았다.

가을에는 다시 독서당에 나가며 주로 학문적 연구를 하는 관청인 홍문관, 경연, 춘추관, 승문원의 벼슬자리를 맡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겨울이 깊어지는 음 11월 보름날 중종 임금이 승하하였다. 그는 중종의 생애와 업적을 글로 기록하는 행장을 짓는 일에 참여하고 명나라에 국상을 알리는 문서를 썼다.

명나라에 보내는 글 내용이 아주 뛰어나고 글씨도 참 잘 썼다고 명나라 예부 사람들이 감탄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게 되어 조정으로부터 말 한 필을 상으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