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참으로 벼슬을 떠나고 싶다

  •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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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으로 벼슬을 떠나고 싶다

 

45세(1545년 乙巳)

 

봄에는 중종의 장례로 바삐 지냈고 이어서 임금 자리에 오른 인종을 모셨으나, 이때부터는 임명되는 벼슬자리를 여러 번 사양하게 된다.

여름에는 종3품인 홍문관 응교 자리에 올랐으나 곧 인종 또한 승하하고 명종이 임금 자리에 오른다.

인종은 인품과 지혜를 갖추고 25년 동안이나 동궁 자리에 있은 청년(당시 31세) 임금이었다. 훌륭한 정치를 펼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 자리에 오르고도 중종의 초상 예절에 건강을 돌보지 않고 지극한 효성을 다하다가 건강을 크게 해쳤다. 음6월26일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져서 29일에 12살 난 경원대군에게 양위하고 7월 1일에 임금 자리에 오른 지 겨우 여덟달 만에 승하하고 만다. 야사에서는 경원대군의 생모로서 대비 자리에 있던 문정왕후가 인종의 어머니 자리에 있음을 이용하여 독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명종이 임금 자리에 앉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거쳐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한다.

 

이 무렵 조선과 왜국은 지난 적에 왜구들이 조선을 쳐들어와서 난동을 부린 일로 인하여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왜국 사람들이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왜국 사람들이 여러 번 저들의 지난 허물을 용서하고 친하게 지내자고 조선 조정에 간청하여 왔으나 거절해 버리고 있었다. 퇴계는 이러한 조정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어루만져 받아들이는 것이 뒷걱정을 줄이는 방책이라고 홀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지금 하늘의 재변(灾變)이 위에서 나타나고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어 큰 화가 중첩되고 국운이 콱 막히어 근본이 불안합니다. 그런데 변방이 허술하며 병력과 군량이 고갈되어 백성들은 원망하고 귀신까지 분노합니다. 이러한 우리 나라의 형편으로 볼 때 지금이 어떤 시기라 하겠습니까.

무릇 태백(太白) 별이 낮에 나타나는 것은 곧 병란이 일어날 조짐인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옛날 정치를 잘한 제왕도 앙화와 변란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미리 자신으로 인해 앙화가 야기되는 일이 없게 하였고 이미 앙화를 당하고 나서는 이에 대응할 준비를 할 뿐이었습니다.

이제 사람의 일을 잘 하여서 하늘의 재변에 응답하려 하면서도 저 섬 오랑캐가 들어와 뵙고자 하는 기대를 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자신으로 인해 화가 야기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지난번에 섬 오랑캐가 일으킨 변란은 조그만 도적들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을 죽여 없앴으며 왜관에 있는 자들까지 모두 쫓아냈으므로 나라의 위신은 이미 떨쳤습니다. 저들이…… 마음을 새롭게 하여 잘못을 고치고 머리 숙여 애걸하는데, 거짓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그렇다면 받아들일 뿐입니다.

지금 나라에 큰 화가 겹치고 운수가 막히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어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북쪽 오랑캐와는 이미 분명히 사이가 좋지 않으니 만일 남쪽 오랑캐를 어루만지지 못하여 남쪽과 북쪽의 두 오랑캐가 동시에 일어난다면 무엇을 믿고 이를 견디어 내겠습니까? 조정에서는 왜국과 교류를 끊어야 한다는 말을 임금님께 올리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백 년을 이어온 나라의 흥망에 관계된 근심거리이고 억만 백성들의 생명이 걸린 일이라 생각됩니다. ……

 

이 상소를 통하여 퇴계는 책만 읽는 선비에 그치지 않고 시국을 정확하고 멀리 보는 안목과 깊이 있고 현실감 넘치는 외교적 능력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서 많은 선비를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을사사화는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와 명종을 낳은 문정왕후를 둘러싸고 중종 때부터 이루어진 외척 세력 사이의 암투가 끝을 보는 사화이다.

명종이 자리에 오르고 한 달 남짓 지나자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 세력이 병조 판서 이기(李芑)를 앞세워서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 세력을 탄핵한다. 처음에는 윤임이 권력을 남용하면서 궁중에 편을 갈라놓았다는 죄목 정도였는데 차츰 반역죄로 몰아간다. 명종 대신에 성종의 셋째 아들인 계림군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죄상을 확정하기 위하여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진 형을 가하여 억지 자백을 받아낸다. 결국 계림군까지 반역에 가담한 것으로 판결을 냈다. 계림군은 100여 일 피신하여 다니다가 잡혀서 사형을 받았다. 중종의 아들로서 명종의 형제인 봉성군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직접 반역에 연루된 일은 없지만 상당히 영민하므로 계림군처럼 반역세력이 붙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문정왕후가 방안에서 발[珠簾]을 내린 채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고 방 밖에 명종이 앉아 나랏일을 처리하는 자리에서 대신들로 하여금 봉성군도 죄주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청을 하게 하여 결국 귀양을 보냈다.

이렇게 을사사화는 처음에 10여명의 대신들을 죄 주고 화근이 될 만한 왕자들에 연루된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5-6년을 계속하면서 100여명의 사림 명사들을 벌하면서 문정왕후를 주축으로 윤원형과 이기의 권세를 굳히게 된다.

사화의 주역을 맡았던 공로로 사직을 지켜낸 공신이라는 자격을 얻은 이기는 우의정에 오르고 병조판서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자기와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다 몰아내서 뒷걱정을 없애겠다는 생각으로 직접 사화의 대상이 아니었던 사림들도 모두 파면시켰다. 퇴계도 죄인으로 낙인찍힌 김저(金儲)와 같은 무리라고 지적하여 조정에서 파면을 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열흘도 못되어 이원록(李元錄)으로부터 ‘퇴계 같은 사람까지 파면시키게 되면 이 번 사화가 죄 없는 사람을 벌주는 계략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충고의 말을 듣게 되었다. 조카로부터 이 말을 듣게 된 이기는 다시 임금에게 가서 ‘이황을 파면토록 한 것은 사실을 잘못 알고 아뢰었던 일이었다’고 사죄하고는 다시 벼슬자리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비록 죄를 쓰고 형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행정과 군대를 한 손에 거머쥔 이기와 그 배후에서 정치 각본을 짜 내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실세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점 찍힌 것이다.

 

가슴 아팠던 한 해가 저무는 12월에 거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장인마저 세상을 떠났다.

 

46세(1546년 丙午)

 

명종 원년(元年)으로서 화담(花潭) 선생으로 알려진 서경덕(徐敬德)이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정월에 아들이 없는 장인의 장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가 장례 절차를 밟아주지 못하였다. 3월이 되어서야 휴가를 얻어 내려가서 못다 끝마친 장례 절차들을 갖출 수 있었다.

이 무렵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아들 준(寯)으로부터 살기가 어렵다는 편지를 받았다. 퇴계는 대답하였다.

“아비가 가난하여 아들이 가난한 것이 무에 이상할 것 있느냐?”

그리고 아울러 잘 참고 견디며 때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휴가 중에 고향에 돌아와서는 온계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강가에 우뚝한 월란암에 자면서 책을 읽었다.

4월에 일이 있어 한양 길에 올랐으나 병환이 있어 영주에서 되돌아오니, 5월에 벼슬자리에서 해직되었다. 이 무렵 퇴계의 심정은 다음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어린 날에

성현 말씀[西銘] 띠에 적어 몸 두르고 다녔건만

아직도 배움이 아득하니

계면쩍기만 하구나.

미친 듯 바쁜 중에도

천 겹 위험을 다행히 벗어나서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니

이제야 한가함 맛보겠구나.

얽매인 새도 나무에 깃들일 때가 있고

들 중도 곳을 따라 구름 산에 몸 붙이건만

뒤뜰의 꽃봉오리조차 다투어 비웃는 듯

어찌 이리 좀스럽게도

병들어서야 돌아왔는가!

(푸실 밭 집에 머무르며[留草谷田舍])

 

퇴계가 고향에 내려가 있는 초가을에 부인 권씨가 한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한양에서 세 얻어 살던 집은 현재 덕수궁 뒤편 전 대법원의 정원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다.

부음을 들은 퇴계는 모든 일들이 마음대로 풀리지 못함을 가슴 아파하면서 두 아들 준과 채에게 상주로서 지켜야 할 예절을 가르쳐 급히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빠른 시일 안에 발인을 하여 유해를 700리 길 고향으로 모셔 와야 하기 때문에 병을 앓고 있는 그 스스로는 올라가지를 못했다.

서울로 달려간 두 아들에게 부인과의 영원한 이별이 말로 할 수 없게 아프다는 것과 함께 무더위 속에서 초상을 치르느라 고생하는 너희들이 병이라도 얻지 않을까? 가난한 살림에 상례는 어떻게 치를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한양에서 정삼품 당상관 벼슬자리에 있던 넷째 형 해에게 상례를 주장하여 달라는 편지를 올리며 몸 둘 곳을 몰라 할 뿐이었다.

부인의 유해가 남한강을 배로 거스르고 소백산맥을 들 것에 들려 넘어서 가을이 무르익는 8월 하순이 되어서야 고향에 내려왔다. 영지산 북쪽 산자락에 묻어 드리고 아들 준이 움집을 지어 묘를 지키며 3년 동안의 상례를 치렀다.

 

퇴계는 온계에서 토계라는 시내를 따라 동남쪽으로 10여 리 내려 간 곳 부인의 묘가 건너 보이는 건지산 끝자락에 양진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숨어살기를 시작하였다. 이 양진암이 있던 곳은 현재 도산면 토계리 하계라는 마을에 속하며 이 곳 바로 위 산 중허리에는 퇴계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때 스스로의 아호를 토계로 물러났다는 뜻으로 퇴계(退溪)라고 쓰고 있었다. 퇴계라는 아호 속에는 단순하게 토계 땅으로 물러났다는 뜻뿐만 아니라 뒷날 50세 때에 읊게 되는 「퇴계」라는 시에서 말하고 있듯이 여러 가지 깊은 뜻이 함께 함축되어 있다.

 

몸은 물러나서 어리석은 분수에 마음 편하나

학문은 퇴보하여 늘그막이 걱정이더니

토계 물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시냇물 흐르는 옆에서 날마다 성찰을 하네.

(토계로 물러남[退溪])

 

차츰 뜻이 맞는 선비들을 사귀게 되고 편지도 오고갔다.

이 해에도 두 번이나 벼슬자리를 내려 받았으나 올라가지 않았다.

 

47세(1547년 丁未)

 

퇴계는 고려 때 해동공자라고 불렸던 최충(崔冲) 선생의 뜻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한 중국 송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아 그의 도학(道學)을 배우려는 뜻을 차츰 굳혀 가면서 마흔 일곱 살을 맞는다.

봄이 무르익자 황준량, 이숙량 등 젊은 선비와 함께 이현보 선생을 모시고 산천을 유람한다. 빼어난 경치에 젖어 그 아름다움으로부터 우주 자연의 진리와 사람의 심성을 헤아리고 시를 읊으며 차츰 도학의 향기 속에 몸이 젖어든다.

특히 월란암에서 󰡔심경󰡕과 󰡔심경주󰡕를 읽고는 하늘이 한 조각 밝은 거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그러한 대 자연 속 살림이 어쩌면 불교의 참선이나 도교의 신선 수련 쪽으로 기울 수도 있겠으나 자기는 어디까지나 당시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유교의 도학에 뜻이 있음을 밝히는 시를 읊는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안동 부사를 맡으라는 명이 내렸으나 받지 않았더니 다시 홍문관 응교로 임명하면서 임금이 불러 올렸다.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올라가서 홍문관에 신고하고는 독서당으로 나갔다.

 

이 무렵 홍문관에서는 의견을 모아 봉성군을 사형시켜야 마땅하다는 상소[箚]를 올리게 되었다. 봉성군은 이미 역모 혐의에 연루되어 울진으로 유배되어 있었는데, 각 관청들이 의견을 모아서 유배지로 사약을 내리자는 공론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홍문관에서도 단체 명의로 임금에게 올리는 하나의 상소문을 써 놓고 상관들인 정3품 부제학, 직제학과 종3품 전한들이 차례로 서명을 해 내려오므로 시골에서 갓 올라온 정4품 응교인 퇴계도 의례적으로 그들을 따라서 그 밑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봉성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공론을 조작하는 공작의 한 수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을사사화의 연장선 위에서 자기들 세력을 굳히려는 이기, 윤원형 일파의 책략에 휩쓸리는 모양이 되었던 것이다.

봉성군을 제거하려는 모의는 처음에 그를 귀양 보낼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지만 표면에 드러내 놓고 조정의 공론을 형성하게 된 것은 양재역벽서사건이 터짐으로 말미암는다. 양재역벽서사건은 정미사화라 불릴 정도로 사림이 많이 희생된 사건이었다. 바로 퇴계의 상관인 부제학 정언각이 딸을 전송할 일이 있어서 양재역(말죽거리)에 나갔다가 “위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력을 농락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는데도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글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즉시 조정에 보고하니 이기 등이 이는 을사년에 미처 제거하지 못한 반역의 뿌리가 남아 있는 증거라고 몰아붙여서 결국 봉성군을 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공론을 만들기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관원들이 임금 앞에 나아가 봉성군을 벌하여야 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게 되었다. 그 때에 퇴계는 홀로 빠져서 홍문관에 남아 있다가 궁궐을 나와 버렸다. 이 일에 대하여 뒤에 이항복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는 설명을 하고 있다.

 

“실오리 같은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이렇듯 일의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는 것은 쇠를 끊는 듯한 용기일 뿐 아니라 정신없이 내달리는 수많은 말 가운데에서 고삐를 잡아 다녀 말을 멈추게 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렇듯 남들과 합세하지 않기가 그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던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는데, 퇴계는 능히 그렇게 해내었다.”

 

이렇게 전개되어 간 양재역벽서사건으로 말미암아 결국 봉성군은 물론이고 송인수, 이약빙 등이 죽고 이언적, 권벌, 노수신 등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던 선배 큰 선비 20여 명이 귀양을 갔다. 티끌 세상에 싫증이 나서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것이 하늘의 보살핌이었던가, 또 한 번 사림의 큰 피해가 서울로 갓 올라온 퇴계의 바로 앞 선에서 끊어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화를 면한 퇴계는 이때 마음 다스리는 방법이 포함된 양생(養生)에 관한 책을 읽는다.

“길고 짧은 생각이 정신을 허물어 내린다. 오직 마음이 맑고 비어야만 정신이 길러진다. …… 마음이 조용하여 물결이 일지 않으면 그에 티끌 또한 붙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인지 몸이 쇠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던 퇴계는 이 책을 읽고 상당히 큰 자극을 받은 나머지 앞으로 몸과 마음을 잘 길러 나갈 것을 다짐한다.

조정에서는 주로 경연에 나가서 임금에게 󰡔논어󰡕 등 경전을 강의하고 옛 성인들이 훌륭하게 정치하던 시대의 교훈을 일깨워 준다. 임금은 인재를 길러 키울 책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라에서는 농업을 국가 산업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농사를 소홀히 하고 장사에 힘을 쓰게 될 뿐만 아니라 도적이 많이 일어나게 하는 등 폐단이 많다는 이유로 지방의 시장(市場)을 금하고 있었다. 퇴계는 ‘심한 흉년으로 현재 농사가 이미 망쳐져서 백성들이 살기가 어려운데, 백성들이 있는 물건과 없는 물건을 서로 바꾸어서 살아가지도 못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올렸다.

시절이 나빠서 흉년과 역병 등으로 백성들 살림이 어려움을 알고는 백성들 사이에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금하지 말아야 될 것 같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비록 국가 정책에 어긋날지라도 백성의 생활에 필요하다면 시장을 개방하여야 한다는 정책 제안이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몸이 아파 휴가를 얻고는 독서당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온 겨울을 지났다. 조정에서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거칠거나 간사한 사람들이 세력을 쥐고 물밑에서 음험한 각본을 짜고는 겉으로 대의명분을 갖추어 어진 사람을 꺾어버리는 일들이 봉성군 사건에서 보듯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지혜로운 눈으로 세태를 간파하고는 개인은 물론 나라의 정치도 근본이 바르게 서지 못하고 있음을 근심한다.

이 해를 못 넘기고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한다.

한편 고향에서 어머니 3년 상례를 마친 지 얼마 안 된 두 아들 준과 채에게 “내가 없다고 학업을 게을리 하지 말라. ……어영부영 나날을 보내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곧 뒤로 물러나는 것과 같고 끝내는 할 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어 깨우치는 일을 잊지 않았다.

 

48세(1548년 戊申)

 

사직하겠다는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가 다음 해 정월에 충청도 단양 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이 무렵 충청도는 청홍도라고 불리고 있었다. 충주에서 조정 정책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있어서 충주가 반역의 도시로 낙인찍혔기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에 독서당에서 사귄 친구들이 그를 떠나보내는 모임을 갖고 시를 읊으며 술잔을 나누었다.

단양에 부임하자 그 좋아하던 책읽기도 그치고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 수 있을까 군민들의 일을 생각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하루는 굶주리는 군민들에게 창고의 곡식을 나누어주고 해 저물어 돌아오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한 번 물러나 군수로 나오니

성글고 개으름이 부끄러운데

군민은 가난하고

봄은 닥쳐 와

마음은 절로 근심에 차네.

동녘 붉은 벼랑에 남은 눈을

지려 밟고 나갔다가

저녁노을 경치 산 속에 어지러울 때

신음하며 돌아오네.

봄바람에 잡풀 자라니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부러워하고

하늘에 풀려 난 새들 한가로워도

나는 함께 할 수가 없는데

여남은 집 작은 마을은

견디다 못하여

별 빛 안고

통발 들어 물고기를 잡누나.

이 양반들 거문고 가락 소리

어찌해야

저 민간의 노래 소리를

명랑케 할 수 있을까!

(저녁에 돌아오는 말 위에서[暮歸馬上])

 

그런 가운데 외가 동네인 의령에 가서 살던 둘째 아들 채가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찢어질 듯한 가슴을 도학으로 깨달은 힘을 빌려 어루만지는 동안, 퇴계는 녹음이 짙어지는 초여름을 맞는다.

단양은 원래 산과 물이 잘 어우러져 경치 좋은 곳이 많았다. 퇴계는 공무로 군민들을 돌아보거나 때로는 한가한 틈이 있을 적에 이들 빼어난 경치를 찾았다. 그 아름다움을 시로 읊거나 글로 써 두었다가 모아서 책으로 엮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명승지로 유명한 단양팔경을 찾아내고 하나 하나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겨울로 접어들 무렵, 넷째 형 해도 조정에서의 승진을 사양하고 지방으로 내 보내 줄 것을 희망한 나머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같은 도에서 형은 관찰사이고 동생은 그 관할에 속하는 단양의 군수로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피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퇴계를 소백산 죽령을 넘어 경상도 풍기의 군수로 발령하였다.

단양을 떠날 때에 그가 가진 것은 다만 묘하게 생긴 돌 두 개 뿐이었다. 그가 죽령에 이르렀을 때에 단양의 관졸이 베를 짤 수 있는 삼(麻)을 묶어지고 쫓아 와서는 말했다.

“이것은 군청 소유의 밭에서 수확한 것입니다. 사또께서 떠날 때에는 이것을 드리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퇴계는 “내가 시키지 않았는데, 어찌 너희들이 함부로 지고 올 수 있느냐? 도로 가져다 두었다가 뒷날 고을 일을 위하여 쓰도록 하여라” 말하고는 물리쳐 보냈다.

퇴계가 떠난 뒤에 단양 군청에서는 아전들이 새로 올 사또를 맞이하기 위하여 군수가 쓰는 방을 수리하려고 들어가 보았다. 창과 벽에 바른 벽지가 얼룩이나 흠집 하나 생기지 않고 새 방처럼 깨끗한지라 다시 도배할 필요가 없어 기뻐하였다.

 

49세(1549년 己酉)

 

마흔 아홉 살을 소백산 아래 풍기에서 맞이하자 정월부터 백운동서원에 나가서 시도 읊고 제사 지내는 예절에 대하여도 살펴본다.

백운동서원은 퇴계보다 앞서 이 곳 군수로 있다가 조정으로 올라가 승정원 도승지로 있는 주세붕(周世鵬)이 순흥 백운동 마을의 죽계(竹溪)라는 시내 가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지방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면서 이곳 출신 고려 때의 대학자 안유(安裕)를 제사지냄으로써 이 지방의 인재를 기르고 아름다운 풍속을 이룩하려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서원 규칙상 군수가 주인이 되도록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학문에 주된 관심이 있은 퇴계인지라 자연 이 서원에 자주 나가게 되고 시도 여러 번 읊게 되었다.

서원 교육의 목적을 암시하며 학생들에게 보여준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소백산 남녘 들 옛 순흥 땅에

흰 구름 겹쳐진 속을

차가운 죽계 흐르는데,

인재 길러서 도 높이니

그 공이 얼마나 원대하고

사당 세워 현인 높이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네.

우러름 받아서

빼어난 인재들 절로 모여들어

숨어 수양하는 것은

출세를 그리워 함 아니니

옛 사람 볼 수 없으나

그 마음은 더욱 뚜렷한데

달은 모난 연못을 비추어

얼음인 양 싸늘하구나.

(백운동서원 여러 학생에게 보임[白雲洞書院 示諸生])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가까이 있는 부석사 주지의 길 안내를 받아 며칠 동안 소백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등산하면서 아름답고 뜻 깊은 이름들을 지어 붙였다.

돌아와서 기억을 정리한 뒤에 유람 기행문(「유소백산록 遊小白山錄」)을 써서 기록으로 남겼다. 그 유람기록은 문장이 물 흐르듯 시원할 뿐 아니라 그 속에 풀려 있는 정서는 자연을 읊는 시인의 그것처럼 매우 문학적이고 그 내용은 또한 아주 사실적으로 자세하고 친절하게 되어 있는 훌륭한 기행문이다.

이 무렵 퇴계의 선비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조그만 일이 하나 있었다.

군청 북쪽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용천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왜구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전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이 그림이 잘 모셔져 있었으나 뒤에 불이 났을 때부터 조그만 나무 상자 속에 넣어 갈무리하고 있었다. 승려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잠 잘 때에 나무베개로 쓰고 있었다. 어느 날 퇴계가 올라가서 보고는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주지에게 말하여 방 한 칸을 장만해서 잘 모셔 두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방이 만들어지기 전에 군수 자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뒤에 이 일을 가지고 퇴계가 고려 태조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려 하였다고 의심하면서 대관(臺官)들이 들고일어났다. 다행히도 힘써 말리는 사람이 있어서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갈 수가 있었다.

늦가을에는 병 때문에 공무를 처리하기 힘들어 사직하기로 마음먹고는 경상 감사에게 사직서를 올렸다. 그리고는 휴가를 얻어 마침 제사 지내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는 넷째 형 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현보 선생도 만났다. 한 달쯤 뒤에 형과 함께 풍기로 돌아와서 하룻밤을 쉬고는 죽령 허리에 있는 촉령대까지 따라가서 서로 시를 읊으며 충청감영으로 돌아가는 형님을 배웅하였다.

한 해가 저물어가자 퇴계는 우리나라에 서원이 없던 중에 백운동서원이 최초로 세워졌으므로 나라 차원에서 지도하고 지원하지 않으면, 마침내 없어져 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참으로 바람직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옛날 중국 송나라에서 하던 예를 본받아 나라에서 책과 이름을 내려서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아울러 재정적으로 논과 밭을 지원함으로써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뜻을 적어 경상 감사에게 올리고는 임금에게 청해 달라고 하였다. 이때의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퇴계의 이 뜻을 조정에 전하자 임금은 정승과 예조에서 검토하게 하였다. 영의정이던 이기가 검토 결과 지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이름을 지어 그 이름과 함께 사서 오경과 성리대전 같은 책들을 내려 보내고 논과 밭을 주어서 재정을 지원하였다.

이로부터 온 조선에 서원이 차츰 세워지게 되어 뒷날 부패하기 전까지는 참다운 선비를 많이 길러내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해가 넘어가기 전에 퇴계는 세 번 거듭 감사에게 사직서를 올린다. 그러나 회답이 오지 않자 해임한다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책 몇 상자만 싸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