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고향에 다시 돌아오다

  •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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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향에 다시 돌아오다

 

본래 출세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정도로 순수하고 반듯한 성격을 타고났던 퇴계이다. 명리와 권세를 잡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몇 번의 사화까지 일으키며 만들어 놓은 살얼음판이 당시의 벼슬 세계였다. 퇴계는 오직 도덕과 학문의 힘에 의지하여 이제까지 큰 화를 당하지 않고 지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마흔 아홉 살이 끝날 무렵에 무모할 정도로 용기를 내어 풍기 군수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쉰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어릴 때에 그려보던 높고 원대한 학문과 인격완성의 꿈을 아름다운 산과 물과 다정한 가족들 사이에서 다시 꾸면서 한 발 한 발 실천하여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50세(1550년 庚戌)

 

정월이 되자 조정에서는 명령 없이 맡은 자리를 떠났다는 책임을 물어 벼슬을 2등급 깎아서 파직 처분을 내렸다. 이때 파직 처분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퇴계는 아들에게 “이제야 마음이 후련하다”고 말하였다.

우선 옛 양진암 자리에서 낙동강이 흐르는 쪽으로 조금 내려 간 곳 자하봉이라는 나지막한 산 기슭에 좋은 집터를 잡아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으면서 알고 보니 그 곳에서 멀지 않은 낙동강에 임금에게 은어를 바치기 위하여 설치해 놓은 고기잡이 시설이 있었다. 그 시설에는 은어들이 많이 몰려 있게 마련이므로 자연 아이들이 그 곳에 가서 고기를 잡을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퇴계는 다시 온계 쪽으로 5리쯤 산속으로 쑥 들어가서 대골이라는 곳에 초가집을 급히 지어 살 속으로 스며드는 이른 봄추위를 견디었다.

하지만 대골은 골짜기 공간이 너무 좁았다. 주위 환경이 좀 넓고 시내물도 흐르는 곳을 찾은 결과, 골짜기에서 나와 다시 온계 쪽으로 1킬로미터쯤 올라간 곳에 터를 잡아 세 번째로 초가집을 짓고는 한서암(寒棲庵)이라 불렀다.

이 한서암에 살면서부터 차차로 여러 곳의 선비들과 주고받는 편지가 많아지고 그 내용도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문제를 다루게 된다.

어느 봄날 풍기에 살고 있는 참다운 선비 황준량이 한서암으로 찾아왔다. 막걸리를 마시며 시를 읊고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이현보 선생과도 여러 번 만나서 주거니 받거니 시를 지어 읊으며 자연 속으로 한 발 더욱 들어가기도 하였다. 때로는 1,100여 년 전의 중국 시인이었던 도연명의 시에 맞추어서 스스로의 한서암 생활을 노래하며 비교적 가슴속이 후련한 여름을 지내었다. 도연명은 퇴계가 어릴 적부터 좋아하였다.

추석을 한 달 앞 둔 늦여름에 퇴계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을 시샘이나 하듯, 항상 의지하고 존경하던 넷째 형이 억울한 죄를 쓰게 된다. 넷째 형 이해(李瀣)는 충청도 감사로 있을 때에 충주 출신 을사사화 역적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충주를 유신현이라 낮추어 부르며 충청도를 청홍도라고 고쳐 부르는 처분을 집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몇 가지 물건을 역적으로 몰린 주인들에게 되돌려 준 일이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속 내막은 대사헌 시절에 “이기가 정승감은 못된다”고 말한 것에 대한 이기의 앙갚음이었다. 사간원 사헌부를 앞세워 그에게 죄를 얽어 씌운 사람들은 이기와 그를 따르는 무리로서 그에게 사사로운 앙심을 품고 있었다. 모두들 한 때의 권세를 잡고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똘똘 뭉쳐서 조정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때 넷째 형은 지금의 서울시 부시장에 비유할 수 있는 한성부 우윤(右尹)이었다. 모진 형벌을 당한 뒤에 평안도 갑산으로 귀양길을 떠나다가 매 맞은 후유증으로 양주 땅에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퇴계는 추석을 지나고 바위재라는 곳에 나가 형님의 시신을 맞이하여 가슴 아프게 울었다. 제비실이라는 곳에 묻어 드렸으나, 죄인의 몸이라 정식 장례의 예절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이로부터 18년 뒤에 선조가 임금 자리에 올라 억울함을 풀어주고서야 비로소 그 아들들이 정식 예절을 갖추어 장례를 지내고 만 2년 동안 묘 옆에서 혼백을 위로하였다.

 

이 무렵 시내의 북쪽에 작은 서당을 지었는데, 보통 계상서당(溪上書堂)이라 부른다. 퇴계의 시를 통하여 미루어보면 큰바람이 불면 넘어질까 걱정되는 정도의 조그맣고 허술한 집이었다. 그러나 퇴계의 학문과 제자 교육이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51세(1551년 辛亥)

 

다시 새해를 맞아 몸도 마음도 차츰 초야에 묻힌 학자로서의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자 퇴계는 자기가 닦고 있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할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끼게 되어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오늘날 어느 누가 제일이어서

굳센 쇠들보 되어 천 년을 지고 있는가?

맛은 적을수록 여러 맛이 남을

알아야 한다는 듯

근심은 없다 말하면

오히려 생기네.

사상채(謝上蔡)는 이익이란 문을 뚫고 나와

정(程) 선생의 학문을 받들었고

호적계(胡籍溪)는 물질의 어지러움 밝혀 보고서

주(朱) 선생의 가르침 따랐거늘

애달프다.

내 나이 반백에도

찾아가 의지하고 우러를 곳 없어서

예나 이제나

사람들 사이를 쓸쓸히 걷누나.

(어떤 탄식[有嘆])

 

그런 나머지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의 시를 읽고는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

구름 문을 두드려

도를 묻고

남모르는 경지 얻고 싶어서

신선 되는 약조차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생명의 알맹이 있는 곳에서

귀한 약초를 먹고자 하네.

천년토록 즐거움이 남으리니

한 낱 티끌이야

어찌 그리며 슬퍼하랴.

(세상 숨어 산 두보 선생을 화답함[和老杜幽人])

 

그러다가 문득 300여 년 전 중국 송나라 때의 주자가 자기의 입장과 비슷한 곳이 많다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하루는 계상서당에서 조목 등 몇 사람의 제자들과 함께 우주의 진리와 사람의 양심 본성을 밝히고 익히는 이 학문(도학道學이라 부른다)의 바른 계통은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전해져 왔는지를 따져 본다. 조선 도학에 있어서의 큰 스승이 되는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었다.

참된 학문은 입과 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인격 전체를 가지고 우주의 진리와 사람의 양심 본성을 밝히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그를 몸에 익히는 쪽이 그를 이론적으로 밝히는 쪽보다 주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참된 학문하는 선비를 높이 알아준 나라는 중국 송나라가 제일이었고, 그 학문을 이룬 학자로는 역시 송나라 때의 주자가 가장 흠 없이 원만한데, 송나라 조정은 주자를 오히려 멀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쁘다고 하였으니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뜻도 말해 주었다.

나아가서 주자의 가르침이 가장 원만하여 도학의 뿌리와 바탕과 끝가지가 함께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그것을 바로 배우면 가장 폐단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말해주었다. 끝가지에 해당하는 것만을 잡고서 따지기만 하면 결국 입과 귀로만 학문을 하게 될 염려가 있다는 점도 말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고려 때의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권근(權近)과 조선에 들어와서의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등이 적든 크든 그 학문을 이어받은 학자들이었다고 평하였다.

이 날 나눈 이야기에는 조선 건국의 이념이 유학이라는 점과 유학에 있어서는 도학이 정통이라는 점, 그리고 그 정통을 잇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 누구라는 점이 담겨 있어서 조선 도학의 큰 맥을 정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 모였던 스승과 제자들이 서로 시를 지어 속마음을 주고받았다. 퇴계는 각 제자들의 시에 맞추어 학문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들을 읊어주었다.

 

흰머리에 정력은 비록 강하지 못하여도

여러 책을 찾아봄은

남모르게 바라는 것 있음일세.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난 일

같은 학자들의 비웃음 살만하나

일생토록 얻고 싶은 것은

돌아갈 곳 몰라 하지 않음이었네.

 

고요함 속에서

만물 함께 봄 맞음을 기뻐하건만

옛 성현의 즐거움과 어짊을 이룬 사람

그 누구인가?

서로 갈고 닦아 줄 스승과 벗 없음이 한스러우니

예로부터

무리를 벗어나 혼자 공부하면

쉽게 막히는 사람 된다 하였네.

 

사물을 연구하고 양심을 간직하니

진리 절로 녹아들어

눈앞에 빛살 쏟아지지 않는 땅 없구나.

이제야

실천이 참으로 어려움을 알아

어려운 곳에서 어렵지 않으니

차차로 통하겠구나.

 

학문은 마땅히

마음공부부터 먼저 하여야 하고

글공부는 하다가 틈나면

시도 또한 익히네.

아홉 길 높이 쌓음

어려운 일 아닌 줄 알려면

평지에서 한 삼태기부터 시작하여야 하리라.

 

명예와 이욕은 큰 파도처럼 넘실대고

세상살이도 그와 같으니

그 옆 언저리에 붙어 있고서야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이 그 누구인가?

이 관문을 뚫고 나면

그제야 잠시 마음이 놓이니

사나이라면 모름지기

땅 위에 사는 선인(仙人) 되어야 하리.

 

발을 다치고

불효였음 깊이 걱정한 이는

옛 성현의 제자, 악정자였고

연못의 살얼음 조심하라는 지극한 타이름은

예나 이제나 새롭기만 하건만

일찍이 어버이 받들어 모심 잘 하는 것이

벼슬살이에 있지 않음 알았더라면

무엇하러 그 해에

힘들여 일을 꼬이게 만들었을까……..

 

어릴 적

집에서 󰡔논어󰡕「학이편」을 배우고

늙어지자 참된 맛 가슴을 적시려 하니

어느 누가 아침저녁

나의 잘못 공격하여도

한 일(一)자 잊지 않고

그 인격 역사에 빛나는 분 섬기네.

 

안개 속 표범은 깊이 숨어

스스로 얼룩무늬 기르고

악와강에 사는 용의 품성은

하늘나라 살기에 어울리듯

선비의 보배로움은

자리 깔고 앉아 있음에 있으니

어찌 가벼이 일어나 써버리랴.

마음의 거울 천 번 갈아서

가슴 비치어 시원하네.

 

예로부터 이제까지 수천 년

이 땅 동쪽 끝 해 뜨는 변두리에

공ㆍ맹ㆍ정ㆍ주의 책 모두 있었으나

그 연원 정통으로 이어지기에는

인연 없었던 듯 보이네.

 

자연의 변화 속에는

열흘 붉은 꽃이 없고

꽃이 흐드러지면

열매가 많지 않은데

오늘날 사람들은

앞 다투어 글 꽃의 아름다움만 높이니

뿌리와 원줄기 다 없고서야

어디에 쓸 곳이 있으랴.

 

문장은 진리와 속 뜻 내버려두고

새롭기만을 다투며

경전 풀이는 말꼬리나 이으며

비뚤어지고 곰팡내 나니

눈은 공중에 뜬 꽃에 어지럽고

마음은 속에 낀 안개에 어두우니

가슴 아프구나

과거(科擧) 과목이 오늘 사람들 그르침이……

 

나는

연극 무대 위의 놀음에

오래도록 머리를 묻었다가

몸 돌려 돌아왔으나

도는 예보다 아득하여

먼지 쌓인 책 다시 잡고

늘그막에나 찾으려 하지만

병들고 생각도 힘도 없어

느느니 근심뿐이네.

 

아침에는 수레 매어 일 소를 몰고

저녁에는 옛 책이라.

옛 사람들 밭 갈고 책 읽으며

높은 멋 받들었건만

생활 꾸리느라 학업 뺏길 두려움

오늘날 더욱 심해지니

가슴 아프게 하는 것

이욕과 명예만이 아니네.

 

잔일에 매이던 그 시절

속 시원히 여행 한 번 못하더니

책 짓는 이제도

가난과 근심의 눈치만 살피지만

마음 속 깨달음 있어

기쁘고 즐거운 곳 있을 때만은

맛 좋은 포도주로 원님 자리 바꾸던

그 심정만 하구나.

 

사람들은 알맹이 없이 무릅쓰기만 하고 있으니

손가락질 받아도 마땅하구나.

알맹이를 얻는 일은

차라리 새가 날기를 익힘 같은데

답답하구나!

이 말을 누가 알아들으랴.

 

앉아서

하늘 위에

흰 구름 떠 돌아가는 것만 바라보네.

(서로 운을 주거니 받거니 노래함[相唱酬韻])

 

이현보 선생과 자주 만나서 자연과 학문을 노래하는 가운데 계상서당에 네모난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는다. 이미 있던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랑 함께 다섯 벗을 만들었다. 퇴계 자신까지 포함하여 여섯 벗의 모임을 이루고는 가슴이 뿌듯하여 다시 시를 읊는다.

 

……

베개 배고 신선 세상 노닐다가

돌아와

󰡔주역󰡕의 창 열어 읽노라.

천 근 종(鐘)이야 맨손으로 칠 수 없지만

여섯 벗이야 부르기만 하면 따르네.

……

(문득 흥이 나니 절구 열 수라[偶興十絶])

 

겨울이 되어 한 해가 저물어 갈 때에 김부륜이 시를 한 수 지어 가지고 계상서당으로 찾아 왔다. 옛날 퇴계가 영지산에 달팽이집을 지어 놓고 읊었던 시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옛날을 되살리자, 26년 전 그 때에 세웠던 동해보다 더 큰 포부가 절로 새로워지면서 그 동안의 나고 죽고 슬프고 즐거웠던 일들이 눈앞을 스쳤다.

아직도 별로 진전된 것이 없음을 한숨짓는다.

 

52세(1552년 壬子)

 

차츰 마음이 갈아 앉으며 다시 새해를 맞이하니 창 밖에는 곧 봄이 올 것이라 알리는 매화가 피어 있다.

선생은 죽은 듯 앙상한 가지에 잎도 피지 않은 채 문득 꽃이 피어 생명의 신비를 깨우쳐 주는 매화 속에 숨은 우주의 이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길을 돌려 누런 책표지를 넘기면 성현들의 가르침이 날마다 새로운 내용을 말해주곤 하였다. 특히 󰡔주역󰡕을 읽을 때는 어느 때 보다도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잡생각을 떨쳐 버린 뒤에 바르고 치우침 없는 사고방식으로 깊이 숨어 있는 이치들을 탐구하여 들어갔다. 뒷날 퇴계는 우주의 이치가 역학(易學)에 다 들어 있어서 역학을 깊이 공부하면 우주 자연의 근본바탕인 큰 진리를 터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현보 선생을 찾아뵙기도 하고 이현보 선생이 아들들을 데리고 계상서당으로 찾아오기도 하며 아름다운 산천과 정자들을 찾아 대자연과 사람의 진리를 읊으며 지내는 동안에 뒷날 선생의 큰 제자로 될 선비들이 차츰 찾아오기 시작한다.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을 지난 얼마 뒤에 조정으로부터 정5품 벼슬인 홍문관 교리 등 지난 날 맡았던 자리를 다시 맡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풍기 군수를 지날 때보다 2계급이 깎인 벼슬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서 홍문관, 춘추관, 승문원의 일을 보면서 임금을 모시고 경전을 읽거나 성현의 가르침을 설명하여 올린다.

5월 어느 날 경연에서 임금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닦고 기르게 할 수 있는 정치를 펴 달라는 말을 올렸다.

 

무릇 사람이 나쁜 일을 할 때에는 스스로 ‘이만 일쯤이야 무슨 해로움이 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그 나쁨이 자꾸 쌓이면 마침내는 큰 화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착함을 쫓는 것은 산위로 오르는 것 같고, 악함을 쫓는 것은 지은 것을 무너뜨리는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위로는 임금님으로부터 아래로는 보통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안으로는 사람으로서의 양심 본성을 보존하고 기르는 방법을 익히며 밖으로는 무슨 일에나 정성이 한결같고 사고방식에 치우침이 없도록 하여 이를 한결같이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일마다 개인의 이기적인 마음이 뒤섞이지 않게 될 것이니, 삿된 마음도 절로 싹트지 못하게 되고 그 하는 일이 한결같이 공정하게 되어 공과 사가 가려지고 이해타산보다는 올바른 도리가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님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잊지 마시옵소서.

 

이러한 강의를 듣고 임금이 퇴계 선생을 존중하였음인지, 다시 종3품 벼슬인 사헌부 집의 자리로 껑충 뛰어 올려 임명하였다. 선생이 사임을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늦여름에는 정3품 당상관 벼슬인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시켰다. 대사성 자리가 비게 되자 당하관 가운데서 제일 글 잘하고 재주 있는 실천가라는 사유로 선생을 뽑아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겨울로 접어들면서 선생은 대사성 자리를 사직하고 싶으니 면하여 달라는 소장을 올려놓고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뜻을 굳힌다.

아들 준에게 편지를 써서 계상서당의 꽃과 대나무를 잘 보호하고 그 앞에 심겨 있는 버드나무도 함부로 베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면서 고향으로 내려 갈 때에 타고 갈 말을 살 수 있도록 내년 정월 대보름까지 무명을 사서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자형(姊兄)의 장례에 아들 준을 보내고, 일찍 세상 떠난 허씨 부인의 제사를 경상도 지방 시험에 응시하러 간 준을 대신하여 손자 안도(安道)로 하여금 지내게 하고, 넷째 형님의 묘를 모시고 있는 조카들을 위로하는 등 여러 가지 집안일도 편지로 처리한다.

또한 다른 선비들의 글을 읽고 그 내용과 관련되는 일들을 밝혀주는 서문, 발문들을 지어 주기도 한다.

여름 어느 날 박희정(朴希正)이라는 사람에게서 주자와 그의 스승 이동(李侗)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놓은 󰡔연평답문록(延平答問錄)󰡕이라는 책을 빌려 보고는 “소경이 눈을 뜬 듯, 목마를 때 물을 마신 듯하다”고 기뻐하며 책을 베껴 썼다.

이 시절 퇴계 선생은 스스로의 잦은 병 탓인지 한약을 조제하는 처방문도 상당한 수준까지 알고 있었다. 특히 위장병을 치료하고 명치 쪽에 체한 기를 푸는 효능을 가진 사향소합원이라는 환약을 조제하여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는데, 그 효력이 좋았음이 선생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 속에 나타나 있다.

 

53세(1553년 癸丑)

 

초여름에 명종 임금이 당시 학교 교육의 황폐하고 해이함을 알고서 성균관 대사성인 선생으로 하여금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교육을 권장하라는 명을 내렸다.

선생은 스스로 자질이 없음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네 곳에 있는 국립 학교에 공문을 내려 보내어 학생과 스승 모두를 일깨우고자 하는 나라의 뜻을 알렸다.

당시 나라에서는 고려 때의 5부학당 제도를 본받아서 한양의 동ㆍ서ㆍ남 세 곳과 중앙 모두 네 곳에 󰡔소학󰡕을 가르치는 학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