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돌아가신 뒤

  • 등록일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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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뒤


 

퇴계 선생이 직접 자기 묘지에 써놓고 싶었던 글은 다음과 같다.

현재 도산의 묘지에 있는 비석 뒤에 새겨져 있고 기대승의 비문이 이어져 있다.

 

  

「자명(自銘)」

 

어리석게 태어나

‘나 자신’을 모르고 커가면서 병

통도 많았구나.

중년에는 어이해 학예(學藝)를 즐겼으며

만년에는 어이해 벼슬을 받았던고?

도학은 캐볼수록 더욱 멀어 알 수 없고 벼

슬은 마다할수록 더욱 많이 주더구나.

나아가 일 함에는 어려움에 부닥치고

물러나 수양하니 심신이 편안했다.

나라 은혜에 보답 못해 깊이 부끄럽고

성인의 말씀에는 참으로 두려움이 앞선다.

진리의 세계는 한 없이 깊고 높으며

학문의 물줄기는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

처음처럼 자연으로 돌아오니

세상의 온갖 시비 훌훌 벗어버렸다.

 

내 마음이 막혀 자신을 모르는데

누가 나의 진면목을 알 수 있을까 만은

나 스스로 옛 사람을 생각해보니

실로 나와 같은 분을 찾을 수도 있구나.

 

오는 세상을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지금의 눈앞 일도 모르는 것을……

근심 속에서도 즐거움의 싹이 트고

즐거움 가운데도 근심이 있더라.

조화를 타고 이제 근본으로 돌아가니

미련 없이 이 세상을 편안히 뜨노라.

 

율곡의 「제문」

 

판단의 기준을 잃고, 부모를 잃고, 주인을 잃고, 희망을 잃은 세상이었습니다.

임금이 허둥지둥 하신들 그를 보필할 사람 없고, 어린 아이가 울어댄들 그를 구해줄 이 없으며, 온갖 이상 현상이 다 생겨도 이를 막아줄 현인이 없고 아득한 긴긴 밤이라서 따스한 볕을 쬐어줄 길이 없었습니다.

아! 선생님 탄생하심은 참으로 잃어버린 기운이 모인 것이었습니다.

옥처럼 따뜻하신 모습이 참으로 순수하셨습니다.

뜻은 빛나는 태양을 관철하고 행실은 가을 물보다도 맑았습니다.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여 나와 남의 틈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책을 보시고, 신묘한 경지를 사색하시면서 정밀하게 연구하여 실처럼 쪼개고 터럭처럼 나누어서, 그 깊고 아득한 도학의 경지를 휑하니 보고 얻으셨습니다.

도학은 원래 뭇 학설이 서로 어긋나고 드넓고 섬세하였지만, 이를 절충하여 하나로 모아 통해 놓으셨으니 자양(紫陽 주자) 선생이 그 스승이었습니다.

정계의 급한 물살에서 용감히 물러나와 무리를 이탈하여 사람들을 벗어나서, 깊이 산 속에 들어가 도를 지키셨으니 부귀는 한낱 뜬구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 안의 일이야 반드시 소문이 나는지라 아름다운 소문이 임금에게 알려졌습니다.

명종께서 간절히 기다리며 부르다가는, 그윽이 사시는 곳을 그림으로 그려 대궐에 높이 걸어놓고 보았고 선조께서 다시 이를 물려받아서 자리를 비워놓고 목마르게 기다렸더니, 상서로운 봉황처럼 모습을 나타내시어 임금을 가르치시는 자리가 빛이 났습니다.

열 개의 그림으로 임금을 가르쳐 깨우치시니 남들이 모르는 도의 경지를 탐구해서 펴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러러봄이 날로 높아갔으나 그럴수록 더욱 낮추시어 사직을 청하여 대궐을 하직하고는 호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나오시느냐 물러가시느냐에 따라 나라의 안위가 달라졌었습니다.

적막한 퇴계의 물기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심에, 사람들이 잘 모르던 말을 분명하게 밝히시니 지혜의 빛이 이어지고 새로워졌습니다.

조정에 나와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지는 않았으나 물러가서 뒷사람들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어린 제가 학문의 길을 찾지 못하여 이리저리 헤매며 사나운 말처럼 마구 내달릴 때에 가시밭길이 사뭇 험하기만 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방향을 바꾼 것은 실로 선생님의 깨우쳐주심을 입은 덕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초심을 관철하기는 원래 어려운 일인지라, 저의 지리멸렬함이 서글프기만 하여 책을 짊어지고 다시 찾아가 학업을 마치리라 생각했었는데,

하늘이 그만 남겨두지 않아서 철인께서 서둘러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장례

 

장례 절차는 제1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거행되었으나, 산소에는 남기신 분부대로 크지 않은 자연석에 ‘늘그막에 도산으로 물러난 은자 진성 이공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