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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 李滉의 生涯와 思想(李 成 茂)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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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 李滉의 生涯와 思想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李 成 茂

 

1. 家系

퇴계 이황의 初字는 季浩, 後字는 景浩, 陶叟, 退陶, 本貫은 眞寶(靑松)이다.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에 경상도 예안현 溫溪里(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동)에서 아버지 진사 李埴과 어머니 춘천박씨(別侍衛 緇의 딸) 사이에서 넷째(漪․瀣․澄․滉)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식은 먼저 의성김씨(禮曹正郞 漢哲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3남(潛․河․瑞麟) 1녀(辛聃에게 시집 감)를 낳았는데 서린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고, 의성김씨도 29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춘천박씨를 재취로 얻어 퇴계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만에 아버지 마저 돌아갔다.(1502년 6월) 아버지가 6남 1녀를 남기고 죽자 생계는 어머니 박씨의 차지였다. 이 때 퇴계의 형인 潛만 장가를 갔을 뿐 나머지는 혼인 전이어서 박씨의 책임은 더욱 무거웠다. 이에 부인은 스스로 농사도 짖고, 누예를 쳐 생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자식을 교육시키는데도 열정을 쏟았다. 부인은 늘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부의 자식은 교육이 없다고 비웃는데 너희들이 글공부를 백 배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조소를 면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비록 배우지는 못했으나 식견이 넓고 총명해서 자식교육을 잘 시켰다. 뒤에 두 아들(瀣․滉)이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자 문예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縣監 이상은 하지말고, 교만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런 어머니의 고매한 인격 때문에 퇴계가 대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시조 李碩(6대조)은 眞寶의 향리로 司馬試에 합격해 생원이 되어 양반으로 진출할 발판을 만들었고, 그 아들 李子脩(5대조)는 고려 말에 明書業에 합격해 통훈대부 判典儀使에 올랐으며, 鄭世雲을 따라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松安君에 봉해졌다. 드디어 진성이씨가 上京從仕하게 된 것이다. 이자수는 본관지를 떠나 보다 넓은 안동 磨羅村(풍산읍 하리)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들 李云侯(고조)는 그곳의 토착세력인 안동권씨 希正의 딸과 혼인해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었다. 이운후의 처남은 좌의정을 지낸 權軫이다. 그리고 안동김씨(金得雨)․흥해배씨(裵尙志) 등 유력가문과도 통혼해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이운후는 蔭職으로 군기시정을 지냈으며, 豊山을 떠나 다시 周村으로 이주했다.

이운후의 아들은 李禎이다. 그는 훈구파로서 1465년(세조 12)에 좌익원종공신 3등으로 록훈되어 不遷位로 모셔졌다. 그리하여 1600년(선조 33)에 나온 『진성이씨족보』 초간본은 이정의 후손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부터 진성이씨가 안동 지역사회에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이정은 遇陽․興陽․繼陽 세 아들을 두었다. 우양 계열은 周村에 그대로 살고 있었고, 응양 계열은 豊山 輞川으로, 계양 계열은 禮安 溫惠로 이주했다. 이 중 계양이 퇴계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1453년(단종 1)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온혜에 정착해 문호를 열었다.

이계양은 埴․堣 두 아들을 두었는데 식이 퇴계의 아버지이다. 이식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일찍이 돌아갔기 때문에 크게 성취하지 못했다. 이우는 1492년(성종 23)에 생원시를, 1498년(연산군 4)에 문과에 합격해 경상도관찰사까지 지냈다. 1506년(중종 1)에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靖國功臣 3등에 록훈되고 靑海君에 피봉되었다. 그리고 퇴계의 둘째 형인 李瀣는 1525년(중종 20)에 진사시, 1528년(중종 23)에 문과에 합격해 충청도관찰사까지 지냈다.

이우․이해․이황의 정계진출로 퇴계가문은 명문이 되었다. 그리고 溫惠로 이주한 퇴계가문은 지속적인 재산증식으로 종가보다 많은 재산을 모았다. 퇴계는 父邊, 母邊, 前․後妻邊으로부터 일정한 재산을 분급받았다. 특히 퇴계의 첫째부인 許氏는 친정으로부터 막대한 전민을 분금받았다. 퇴계의 손자녀 5남매분과 奉祀位를 합쳐 노비 367구, 전 1,895두락, 답 1,199두락, 家舍 5坐나 분금받았던 것을 보면 퇴계가 부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산이 늘어난 것은 상속․개간․기증․매득을 통해서였다.

퇴계는 1521년(중종 16)에 허씨부인(許瓆의 딸)과 혼인해 雋과 寀를 낳고 1527년(중종 22) 11월에 죽어 1530년(중종 25)에 안동권씨(奉事 權礩의 딸)에게 다시 장가갔다. 그리고 다음해 6월에는 側室에서 아들 寂이 태어났다.

퇴계는 양반이었으나 가문이 그리 번창하지 않은 지방사림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대부터 자기를 포함해 삼촌 李堣․형 李瀣와 함께 문과에 급제해 현달하게 되었다. 재산도 많이 모았고, 관직도 일품인 우찬성, 대제학까지 지냈으며, 당파를 초월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면서도 사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도산서원과 같은 경치 좋은 곳에 서당을 짖고 귀양 한 번 가지 않은 完人이었다.

그는 죽을 때 유언으로 비석에 벼슬을 쓰지 말고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라고 했다. 그리고 후인들이 자기의 공적을 장황하게 늘어 놓을까봐 自撰墓誌銘을 지어 놓고 죽었다. 그가 죽자 국가에서는 영의정을 추숭하고, 文純公이라는 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1574년(선조 7)에는 陶山書堂 뒤쪽에 陶山書院을 세워 위판을 모셨다. 1600년(선조 33) 5월에는 趙穆 등이 주종이 되어 『退溪集』 內集 49 卷, 別集 1 卷, 外集 1 卷을 간행했다.(庚子本)

2. 敎育과 科擧

퇴계는 6살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아침이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그 노인 집으로 가서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두어 번 외운 다음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그리고 12살 때 형 李瀣와 함께 숙부 李堣에게 『논어』를 배웠다. 그리고는 특별히 배운 데가 없이 스스로 공부했다. 퇴계는 뒤에 이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비록 공부하는데 뜻을 두었으나 啓發해 줄 師友가 없 어서 갈팡질팡 10 여 년 동안 사람으로서 머리를 두고 공부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心 思를 잘못 소비하고 탐색해도 되지 않아 혹 밤새도록 가만히 앉아 잠을 자지 않다가 이 에 마음의 병을 얻어 공부를 폐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만약 과연 師友를 얻어 방황하 는 길을 바로잡아 주었다면 어찌 마음과 힘을 쓸데없이 써서 늙어서도 얻는 게 없었겠는 가?

 

퇴계는 글읽기를 좋아해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도 벽을 보고 앉아서 골돌히 생각을 했다고 한다. 글을 읽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래도 모르겠으면 옆에 제켜 두었다가 다시 생각해 알아내고야 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특히 陶淵明의 인품과 시를 좋아했다. 퇴계는 시인으로 출발했다. 도연명의 생활태도와 자연사랑을 모본으로 처음부터 시인으로 발신한 것이다.

17살 때 퇴계는 형 李瀣와 함께 경상도관찰사로서 溫溪에 온 慕齋 金安國을 만났다. 김안국은 퇴계 형제를 만나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책과 식량을 주어 淸凉山에서 독서하게 했다고 한다.

18세(1518)에 안동향교에서 공부했고, 19살(1519) 4월 17일에 賢良科 전시에 응시했을 때 먼발치에서 趙光祖를 보았다. 이 해에 『性理大全』권 1 太極圖說과 권 70 詩 등 2책을 얻어서 읽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즐겁고 눈이 열려 오래 읽을수록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고 마치 그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한다. 이것이 퇴계로 하여금 道學에 눈을 뜨게 한 첫 번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부터 퇴계는 학생들에게 맨 먼저 太極圖說을 가르쳤다.

20살 되던 1520년(중종15)에 『주역』을 침식을 잃고 독실히 공부하다가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嬴悴之疾)에 걸려 평생을 고생했다. 23살 되던 1523년(중종 18)에는 처음으로 성균관 下齋에 유학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난 끝이라 士習이 浮薄해서 2달 머무르다가 돌아왔다. 성균관에서 河西 金麟厚를 만날 수 있었으며, 黃上舍에게서 종이를 주고 『心經附註』 한 질을 사서 이를 반복 숙독해서 義理之學을 터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이야 말로 4서나 『近思錄』보다도 퇴계가 心學을 깨우치는데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퇴계가 도학자가 되게 한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27살 되던 1527년(중종 22) 가을에는 경상좌도 향시에 진사 장원, 생원 2등에 합격하고, 이듬해 봄에 진사 회시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 때 남명은 경상우도 향시에 2등으로 합격했다. 진사시에 합격한 후에 퇴계는 과거시험을 볼 뜻이 없었으나 형이 어머니를 부추겨 시험을 보라고 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 해에 있었던 문과 별시 초시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했다.

33살에 다시 성균관에 유학했다. 가을에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權橃과 함께 여주 梨湖村에서 慕齋 金安國을 찾아뵈었다. 퇴계는 만년에 이 때 처음으로 正人君子를 만났다고 술회했다. 이 해(1533) 경상도 문과 향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그 이듬해(1534) 3월 9일에 회시에 급제해 4월에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고 곧 예문관 검열겸춘추관기사관에 추천되었다.

3. 仕宦

퇴계는 1534년(중종 29) 3월 9일에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고, 18일에 예문관 검열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당로자였던 金安老의 사주로 체직되었다. 퇴계는 자기 뿐 아니라 아들 李雋과 조카 李宓 등에게 집안을 위해 과거시험을 보라고 여러 차례 권했다. 퇴계의 승진은 빨랐다. 역임한 직종도 주로 홍문관․예문관․성균관 등 文翰職이나, 兩司․六曹․承政院․議政府 등 淸要職이었다. 그리고 經筵․知制誥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글을 잘했기 때문이다. 賜暇讀書도 여러 번 받았다.(1541, 1543)

퇴계는 정국이 아직 혼미하다고 생각했다. 언제 권신들에 의해 사림들이 魚肉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퇴계도 몇 차례 화를 당할 뻔했다. 첫 번째는 과거에 급제한 직후인 1521년(중종 29)에 金安老에 의해 史官職을 체직당한 일이 있다. 김안노는 퇴계의 첫째부인 김해허씨의 고향인 榮州에 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퇴계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앙심을 품고 저지른 일이었다. 두 번째는 권력자 陳復昌이 퇴계가 자기의 호의를 무시하고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었으나 그가 伏誅되어 무사했다. 세 번째는 을사사화 때 李芑에 의해 화를 당하게 된 것을 이기의 조카 李元祿이 신명을 걸고 구해 주어 무사했다. 이 때문에 퇴계는 되도록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1548년(명종 3) 靑松府使를 자원했지만 丹陽郡守에 제수되었다가, 형 李瀣가 충청감사로 부임해 오는 바람에 相避로 豊基郡守로 옮겨갔다. 핑계는 身病과 覲親이었다.

퇴계는 조광조가 도학을 일으키려는 뜻은 좋았으나 학문이 깊지 못한데다가 조급하게 개혁을 서두르다가 사림이 어육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학문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사림을 재훈련시켜 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鄕約을 일으키고, 書院을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다.

퇴계는 처음부터 도학에 심취한 것은 아니었다. 시인으로서 부형의 요구로 과거시험을 치루어 4 번 째 급제해 37 년 간 다른 학자관료들과 마찬가지로 벼슬을 했다. 그러나 퇴계에게는 도학에 경도할 세 차례의 계기가 있었다. 첫째 번 계기는 18세 되던 1519년(중종 14)에 『性理大全』권 1과 권 70을 구해서 읽은 것이요, 두 번 째 계기는 1523년(중종 18) 성균관 下齋에 유학했을 때 黃上舍에게서 종이를 주고 『心經附註』 한 질을 사서 반복해서 읽은 것이며, 세 번 째 계기는 퇴계가 43세 되던 1543년(중종 38)에 왕명으로『朱子大全』을 인간하라고 하자 스스로 그 교열을 전담한 때였다.

퇴계는 43세 되던 1543년(중종 38)부터 관직에 뜻이 없고, 물러가 도학을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기가 해야할 더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평생을 허송세월 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때부터 계속 관직에서 사퇴하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반면에 국왕으로서는 사림정치를 표방한 만치 퇴계와 같은 학식과 도덕을 겸비한 유덕자를 옆에 부뜰어 두고자 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선조 조 이후에는 사림이 정치주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정부 요소 요소에 포진되어 있어서 퇴계와 같은 사림의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했다. 그래서 입만 열면 퇴계 등을 불러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퇴계는 물러나서 여생을 보낼 보금자리를 찾았다. 1531년(중종 26)에는 예안 근처 靈芝山 북쪽 暘谷에 靈芝蝸舍를 짖고 靈芝山人이라 自號했다 그러나 1542년(중종 37) 가을에 李賢輔가 고향으로 돌아와 이 산에 靈芝精舍를 짖자 이를 그에게 양도했다. 그리고 1545년(인종 1)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퇴계는 그 해 3월에 月瀾菴․龍壽寺에 은거했다. 그리고 1546년(명종 1) 11월에 兎溪의 東巖에 養眞菴을 지었다. 그리고 이 지역 이름 ‘兎溪’를 ‘退溪’로 고치고 스스로 호로 삼았다.

그 후 1547년(명종 2) 정월에 紫霞山 霞明洞(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下溪마을)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낙동강에 국가에서 금하는 은어잡이 魚梁이 있어서 자손들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 해 竹洞(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일명 대골)으로 옮겼다. 세 번 집터를 옮긴 셈이다. 1550년(명종 5) 2월에는 竹洞 溪上 서쪽에 寒棲菴(지금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종택 왼쪽)을 짖고 제자를 양성했다.

그리고 1551년(명종 6)에는 寒棲菴을 철거하고 溪上 동북쪽에 溪上書堂을 지었다. 1557년(명종 120 정월에 東家를 짖고, 3월에는 溫溪 老松亭 뒤에 樹谷菴을 지었으며, 陶山 南洞에 陶山書堂을 지었다. 그리하여 이곳이 퇴계학파의 온상이 되었다.

퇴계는 이후에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해 달라는 사직소를 자주 올렸다. 그럴수록 왕은 관직을 높여주거나 閒職으로 바꾸어 주면서까지 부뜰어 두려 했다. 사림의 성화 때문이었다. 東皐 李浚慶도 퇴계가 山禽獸鳥처럼 툭 하면 물러간다고 비아냥거렸다. 퇴계는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집으로 가 2 자급을 강등당하기도 했다. 실제로 퇴계는 병이 많았고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70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보이지 않고 몸을 스스로 잘 조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568년(선조 1) 정월에 선조가 즉위하자 퇴계를 右贊成으로 불러 올렸다. 선조가 즉위해 마음먹고 사림정치를 펴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퇴계가 서울(덕수궁 옆)에 올라오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3일 뒤에야 영의정 이준경을 찾아갔다. 이준경은 “공이 서울에 온지 오래 되었는데 왜 빨리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힐문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늦었노라고 하자 “옛날 기묘사화 때에도 士習이 이와 같았다”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사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金鎧 등 尹元衡․李樑 등의 여당이 퇴계 등을 ‘小己卯’로 몰아 해치려 했다. 이 때 이준경은 이를 막아주었다.

 

4. 出處觀

퇴계의 출처관을 보려면 남명의 출처관과 비교해 보는 것이 확실하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해(1501) 낳아서 한 해 차이(퇴계는 1571년, 남명는 1572년)로 70평생을 같은 경상도(퇴계는 좌도, 남명은 우도)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계는 과거관료로서 37 년 간 학자관료를 지낸 사람인데 비해 남명은 13 차례나 징소되었으면서도 한 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퇴계는 어머니나 형의 권유에 의해서이기는 했다지만 어렵사리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했다. 남명도 역시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몇 번 응시하기는 했으나 체질에 맞지 않아 평생 도학을 실천하면서 처사로 살기로 결심했다. 거기에는 삼촌이 사화에 연루되어 죽고 친구들 역시 정쟁에 말려 죽음을 당한 것이 林泉에 은거하기로 한 다른 이유였다.

퇴계는 淸凉山 밑에 살아 품성이 온화하고 치밀한데 비해 남명은 智異山 밑에 살아 기질이 드높고 강인했다. 그러기에 星湖 李瀷은 “남명선생은 우도에, 퇴계선생은 좌도에 日月과 같이 있었으며,....좌도는 仁을 숭상하고, 우도는 義를 숭상했다”고 했고, 領事 尹承勳은 “上道는 李滉이 있어 학문을 숭상하고, 下道는 曺植이 있어 節義를 숭상한다”고 했다. 그리고 開岩 金宇宏도 “남명선생은 우도에, (퇴계)선생은 좌도에 日月과 같아서 다 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길 뿐이다”라고 했다. 선조가 퇴계와 남명에게 다 수학한 寒岡 鄭逑에게 두 스승의 학문 경향을 묻자 “퇴계는 실천이 독실하고 공부가 순수하고 숙련되었으며, 남명은 超然히 自得해 特立獨行한다”(滉踐履篤實 工夫純熟 植超然自得 特立獨行)고 했다. 성격도 많이 달랐다. 남명은 외가의 기질을 닮아 고답적이고 객기가 있었다. 이에 퇴계도 그를 ‘亭亭物表‘ ’皎皎霞外‘의 품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제자들이 ’壁立千仞‘의 기질이 있다고 했고, 宋時烈은 ’秋霜烈日‘의 품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반면에 퇴계는 성격이 부드럽고, 남의 인물평이나 時事의 得失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異端을 배척하는데는 단호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出處觀도 달랐다. 澤堂 李植도

 

“조남명과 (이)퇴계는 같은 때에 살았는데 남명은 세상에서 숨으려 하는 뜻이 일찍부터 현저해서 진실로 퇴계를 내려다보았다. 퇴계는 겸손하고 스스로 지키는 바가 있어서 절대 로 인물의 장단이나 時事의 得失을 말하지 않았으나, 오직 異端을 배척할 때는 일찍이 물 러서거나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 名儒의 말이 혹 과한 곳이 있어서 이단으로 흐 르면 반드시 힘써 분석하고 절충했으니 徐花潭․朴松堂의 학문에 대해 감히 의논하지 못 했으나 퇴계가 변박해서 용납하지 않았고, 晦齋에 이르러서는 비록 일대의 명신이나 세상 이 그 학문의 깊이를 알지 못했는데 퇴계가 들어내서, 寒暄堂․一蠹․靜菴과 함께 천거해 서 4賢으로 삼았다. 이에 당시 학자들이 퇴계에게 심복해 감히 다른 말을 하지 않아 국론 이 정해졌다. 남명에 있어서도 퇴계가 그 의론과 氣習이 後弊가 없지 않을 것 같아 부득 이 대략 용납하면 점점 바뀐다는 말과 이른바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다른 것을 좋아해서 道에 맞기 어렵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이니 대개 도를 행하지 않아서 賢者가 잘못을 저지를 것을 두려워해서 이다.

 

라 해 남명의 不仕하려는 강열한 의지와 퇴계의 闢異端의 공을 대비시켜 논평하고 있다.

남명은 명문으로 서울에 살면서 李浚慶․宋麟壽 등 名士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비해 퇴계는 가문이 대단치 않아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科擧官僚가 되어 자의건 타의건 일생동안 벼슬을 했다. 남명은 사화에 삼촌 曺彦卿을 잃었고, 친구들이 차례로 被禍되어 벼슬을 할 뜻이 없었다. 반면에 퇴계는 형 李瀣가 권력자에게 희생당했고, 본인도 두 세 차례 위험한 지경에 봉착했지만 요행이 모면해 귀양 한 번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벼슬이 1품에 이르렀고, 사림의 존경을 온 몸에 받았다. 주자를 존모해 비록 依樣之味(율곡 李珥)가 있다는 평을 들었지만 이단을 배척하고 性理學(朱子學)으로 나라의 학문을 통일해 道統을 확립했으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남명도 과거시험을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나 성향이 과거관료로서 적당치 않은 것을 발견하고 과감히 과거나 벼슬길을 포기하고 도학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남명이 전혀 벼슬살이를 할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가면 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出則有爲 處則有守) 그러나 명종 때까지는 나가서 일할만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金安老․尹元衡․李樑과 같은 외척이 발호해 툭하면 사화가 일어나 사림이 魚肉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조 초에 사림정치가 실시되어 나가지 않을 명분이 없어지자 나이가 들어 힘이 없고 낮은 직위로 징소하니 뜻을 펼 수 없어 나가지 않고 제자들에게는 나가라고 했다. 실상 선조 조의 吳健․金孝元․金宇顒․鄭仁弘 등 많은 남명 제자들이 정계에 진출해 있었으며, 그 세가 퇴계 제자만 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징소되어 왔을 때는 국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무능과 비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566년(명종 21) 8월 남명을 尙瑞院 判官으로 불렀을 때 일이다. 남명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李浚慶과 어렸을 때 아는 사이었는데 서울에 불려왔다가 돌아가려는데 이준경이 찾아 오지 않았다. 영의정으로서 체신 때문이었다. 남명이 찾아가니 얼마 있다가 大套靴를 끌고 맞이하러 나와서 안부 이외에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尙瑞判官은 또한 좋은 자리다. 어찌 관직을 받지 않는가? 필경 持平․掌令을 주어야 하겠는가?“라고 했다. 남명이 크게 좋아하지 않고 돌아왔다. 東皐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曺某의 국량이 좁도다!“라고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준경이 그 국량을 시험해 추천하려 한 것이라 했다. 남명은 전하는 말에 ”자네 자리를 주면 모르겠네“라고 했다고 한다.

퇴계는 과거관료로서 벼슬을 해 왔지만 1543년(중종 38)에 『性理大全』을 통독하고 나서는 병도 있고 해서 물러가 도학을 전적으로 연구할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가 남명에게 쓴 편지에 그의 이와 같은 심정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만 옛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집이 가난하고 親老․ 親舊들이 강권해서 과거에 급제해 利祿을 취해 왔습니다. 저는 당시에 실로 견식이 없어 서 문득 (강권에) 움직인 바 되어 우연히 천거를 받아 먼지와 티끌 같은 일에 골몰해 날 로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었으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후 병이 더욱 깊어 지고, 또 스스로 세상을 위해 꾀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비로소 이에 머리를 돌 려 조용히 앉아 더욱 옛 성현의 책을 취해 읽었습니다. 이에 척연히 각오를 하고 길을 바꾸어 노년에 할 일을 거두고자 해 관직을 그만두고 墳典(古經典)을 끌어안고 산중에 들어와 장차 그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더 구하고자 했습니다. 거의 하늘의 精靈에 힘 입어 만약 조금이라도 얻는 것이 있어서 이것을 모아 이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10년 이래의 원하는 것이었는데 왕이 헛된 이름을 들어 벼슬을 하라고 해서 계묘년(1543)부터 임자년(1552)까지 무릇 세 번 관직을 사퇴하고, 세 번을 소환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노병으로 관직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이러고서도 그 이루는 것이 있기를 바라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남명에게 물러가 학문에 정진하려해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심정을 털어놓은 것이다. 왜 하필 남명에게 하소연했나? 남명의 출처가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553년(명종 8) 2월에 퇴계는 남명에게 편지를 보내 이번에는 남명으로 하여금 조정의 징소해 응하도록 권했다.

 

“근자에 銓曹가 遺逸之士를 추천해 쓰려고 하는 것은 임금이 어진 인재를 얻어 쓰고자함 에서입니다. 특명으로 6 품관에 超敍하는 것은 실로 우리 동방에 전에 드물게 있던 盛擧 입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벼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로움이 없는 것이니 大倫을 어찌 가히 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선비가 혹 나가서 쓰이기를 어려워하는 것은 다만 과거로서 사람을 혼탁하게 하고 잡되게 나아가는 길은 또 매양 낮게 보니 그 몸을 깨끗 이 하고자 하는 선비들이 부득불 숨어서 나오기를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山林을 천거하 는 것은 과거의 혼탁한 것도 아니요, 6 품직을 초수하는 것은 잡되게 진출하는 더러움도 아닙니다. 같은 때 천거된 이로 이미 兎山에 부임한 成守琛이나 高寧에 부임한 李希顔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옛날에 관직을 거절하고 높이 드러누어 장차 몸 을 마치려 한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일어나지 않다가 지금 일어난 것이 어찌 그 뜻이 변 해서이겠습니까? 반드시 지금 나의 나아감이 위로는 가히 聖朝의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 고, 아래로는 가히 자기의 온축을 펼 수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중약) 선생이 마 침내 나오지 않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 편지에서는 먼저 번과는 퇴계가 남명에게 왜 관직에 나오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것이었다. 이를 보면 퇴계는 당시의 정국이 한 번 나가서 일해 볼만하다고 생각한데 비해 남명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퇴계의 편지에 대해서 남명은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전약) 다만 생각건대, 공은 犀角을 태우는 듯한 명철함이 있지만, 植은 동이를 이고 있 는 듯한 탄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 곳(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군요. 게다가 눈병까지 있어 앞이 흐릿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지가 여 러 해 되었습니다. 明公께서 撥雲散으로 눈을 밝게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삼가 혜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반은 비꼬는 어투이기는 하지만 남명은 퇴계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퇴계는 다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지난 여름에 보내 주신 편지에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편지에 출처의 도가 본래 가 슴속에 정해져 있어서 능히 밖의 일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하니 말씀이 음미할 만 합니 다. 한 번 불러 이르지 않는 것도 오히려 드문데 하물며 두 번 불러도 더욱 확연한 데 있어서이겟습니까? 그러나 세속은 이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항상 적고, 노하고 비웃는 사람은 항상 많으니 선비된 자가 그 뜻을 지키는 것이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론의 아래 가난에 쪼들리고 이익에 흘러 동서로 쫓기는 사람은 진실로 뜻을 지키는 선 비는 아니고, 공사로 인해 비루한 사람들의 수립하는 것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입 니다. 보내주신 편지에 撥雲散을 찾는다는 것은 감히 힘쓰고자 하지 않습니다. 단 제가 스스로 찾아보고 마땅히 돌아가 얻을 수 없으면 어찌 능히 공을 위해 발운산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퇴계도 남명이 나오지 않으려 한 뜻을 꺾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는 퇴계도 벼슬에서 물러나려는 뜻이 역역했다. 관직에 임명되면 그 때마다 병을 핑계로 사직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그래도 뜻을 꺾지 못하면 閒職으로 잠깐 돌려주기는 하나 벼슬을 떼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으로서도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명종의 불평을 들어보면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올린 소장을 살펴보니 그간 물러가려던 일을 갖추어 기록하고, 다섯 가지 마땅히 벼슬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한사코 오려고 하지 않으니, 비록 사람을 얻어서 다스림을 극진하게 하고자 해도 어떻게 그 뜻을 뺏을 수 있겠는가? 내가 실로 덕이 없고, 사리에 어두워서 더불어 일을 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도의를 지키며 결코 도와줄 뜻이 없으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1558년(명종 13) 10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을 때였다. 이 때 퇴계는 명종의 이러한 불평을 듣고 할 수 없이 취임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남명은 25살 되던 1525년(중종 20)에 산사에서 『성리대전』을 읽다가 “뜻은 伊尹의 뜻을 가지고, 배움은 顔子의 배움을 배운다. 나가면 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한 대목에 이르러 깨달은 바가 있어 학문과 실천에 정진하고 벼슬길에 일체 나가지 않았다.

 

5. 道學硏究

도학은 송대 이후에는 인간의 심성을 온전하게 발현해 인격적으로 완성함으로써 성인을 이루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른바 濂洛關閩의 學(性理學)이다. 퇴계는 이러한 性理學(朱子學)을 대체로 그의 도학의 모본으로 삼았다. 율곡이 퇴계의 도학을 依樣之味가 있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퇴계의 도학은 철저히 修養論으로부터 출발한다. 부정부패․부조리를 일삼는 훈구파들을 제어하고, 도학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원시유학에서처럼 말로 실천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았다. “왜 그래야 하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에 心性論은 宇宙論과 연계시킨 것이다. 동양에서는 하늘을 ‘좋은 것’ ‘착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 착한 天理, 天性, 天倫을 인간의 심성에 끌어들여 이를 보존하고 惡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存天理’, ‘遏人欲’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천리, 알인욕하려면 ‘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敬’이란 마음이 한 군데로 專一해 이리 저리 헤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자는 이것을 ‘主一無迪’이라 했다. 인간은 天理와 人欲이 마음(方寸) 속에서 싸우는 존재이고,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도덕적 완성을 기하려면 인욕을 제거하고, 본성 속에 있는 천리를 순조롭게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書經』의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大學』의 ’格致‘ ’誠正’, 『中庸』의 ‘明善’ ‘誠信’ ‘眞知’ ‘實踐‘ 등도 그러한 목적으로 강조된 것이다.

퇴계의 主理論, 理動論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며, 그 바탕에는 性善說이 자리잡고 있었다. 퇴계는 선학들의 구구한 이론들을 일일이 검증해 보고, 되도록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되, 이치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배격했다. 퇴계는 철저히 周敦頤․張載․程顥․程頤․朱憙 등 송나라 유학자들의 이론을 조술하되,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을 경우에 한해 독자적인 견해를 내놓았지 처음부터 뽀족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博學․審問․愼思․明辯․篤行의 학문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그가 주자학설을 수호하고, 불교나 陽明學․老莊 등을 異端으로 철저히 배격한 것도 그러한 결과였다.

퇴계는 본래 가문이 두드러진 사람도 아니며, 처음부터 도학만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처음에는 한적한 시골에서 자연을 벗삼아 풍월을 즐기던 시인이요, 문학도였다. 陶淵明을 존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그가 도학에 경도하게 된 것은 19세가 되던 1519년(중종 18)부터였다. 그는 이 때 『性理大全』의 首(「太極圖說」)․尾(「詩」) 2권을 처음으로 얻어 읽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즐겁고 눈이 열려 오래 읽을수록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고, 마치 그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1523년 (중종 18) 퇴계가 성균관 下齋에 유학했을 때 黃上舍에게서 『心經附註』 한 질을 종이를 주고 사서 반복 숙독해 의리의 학을 터득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퇴계가 43세 되던 1543년(중종 38) 8월에 중종이 교서관에 명해 『朱子大全』을 인간하라고 명했다. 이에 퇴계는 이를 玉堂에서 철저히 교열한 다음에 출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일을 전담했다. 퇴계는 더운 여름에도 문을 닫아걸고 종일토록 교정을 보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러다가 병이 나면 어쩌려느냐고 걱정하자 “이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이 시원해져서 스스로 더운 것을 알지 못하는데 병은 무슨 병이냐?”고 했다고 한다. 즉 『성리대전』․『심경부주』․『주자대전』 세 책을 정독하고 도학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별로 훌륭한 스승이나 친구도 없이 공부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도학서를 접하고 심취해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그의 도학 이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宇宙論

퇴계는 주돈이의 「無極而太極」(무극이면서 태극이다)을 백세 도술의 연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聖學十圖」에도 제 1도로 「太極圖」와 「태극도설」을 실었고, 문생들에게도 늘 도학공부의 근거로 이를 강조했다. 또한 퇴계는 주자의 주장을 따라 태극은 理이고, 陰陽은 氣이며, 리인 태극이 기인 음양을 생한다고 했다. 그러니 리와 기는 一物이 아닌 서로 다른 것(二元)이라 했다.

한편 퇴계는 理를 所以然과 所當然으로 나누고, 리는 形而上者로서 聲臭도, 方體도, 內外도, 情意도, 計度도, 造作도, 作爲도 없으나, 氣는 形而下者로서, 輕重․淸濁․粹駁․聚散․屈伸․至歸가 있다고 했다. 理는 無爲인데 氣는 有爲․有欲이며, 生滅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퇴계는 사물현상이 理와 氣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둘 중에서 사물의 현상적 존재의 측면을 가리키는 것은 氣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는 결국 氣의 總和라고 할 수 있다. 氣가 生滅하는 것이라면 氣는 그 보다 앞선 氣에 의해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一元之氣’, 또는 ‘開闢之氣‘라고 한다.퇴계는 이 ’일원지기‘가 태극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기는 不相離, 不相雜이라고 한다. 그런데 리는 치우치지 않는데 비해 기는 치우치기 쉽고, 리가 기의 작용을 주재한다는 점에서 理優位說, 理貴氣賤說을 부르짖었다. 리는 기가 있기 전에 있을 수 있지만 리가 없이 기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퇴계는 리가 動하면 기가 따라서 동한다고 했다. 그러나 리는 無爲라 했는데 리가 어떻게 동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해 퇴계는 리의 體用설을 제기한다. 리가 무위라고 하는 것은 리의 體를 말한 것 뿐이요, 그 用으로 말하면 리도 動靜, 能發, 能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의 理有動靜說을 근거로 理動을 주장했다. 그러나 理無爲라 했는데도 불구하고 理動을 주장하는 근거는 충분치 못하다. 그런데도 理動을 무리하게 주장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의 修養論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2.) 理氣心性論

리기론은 修養論의 바탕인 心性論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연구되었다. 천지의 리가 만물에 품부된 것이 性이라 한다. 따라서 천지의 리가 하나이므로 사람과 사물의 性은 다 같다. 그러나 기의 偏正에 따라 만물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正氣를 타고난 데 비해 사물은 偏氣를 타고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마음(心)은 合理氣요, 統性情이라 했다. “고요하여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것이 性이나, 이 性을 담고 있는 것은 심이요, 활동해 만사를 대응하는 것은 情이나, 이 정을 베풀어 쓰는 것은 역시 심이다” 이 心統性情說은 張橫渠에게서 유래한다. 그리고 마음에 體用이 있으니 虛靈은 體요, 知覺은 用이라 한다. 聖人은 리를 따르며 性을 실현하고 靜으로서 動을 제어하는데 비해 衆人은 리가 기에 의해 지배당하고 動에 빠져 靜을 무너트린다는 것이다. 이는 周濂溪의 主靜說을 따른 것이다. 마음에는 未發의 性이 갖추어져 있고, 已發의 情이 나타날 때 意가 善․惡이 갈리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四七論이다. 퇴계는 奇高峯과 이 문제를 가지고 8 년 간 논쟁했다. 퇴계는 1553년(명종 8)에 秋巒 鄭之雲의「天命圖說」 중 천명도를 교정하면서 추만이 “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 한 것을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쳤다. 이에 고봉은 사단과 칠정이 다같이 情에 속하는 것인데, 四․七을 理․氣에 상대시켜 보는 것은 理氣不相離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라 공격했다. 퇴계는 제 1서에서 『朱子語類』에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이라고 한 말을 들어 자기의 말이 맞을 뿐 아니라 정지운의 말도 틀린 것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고봉의 이론은 整菴 羅欽順의 理氣一元論에 빠진 것이고, 氣를 性으로 보는 폐단이 있다고 비판했다. 理氣互發說과 理氣一元論의 대결이다.

그러나 퇴계는 제 2서에서 고봉의 의견을 참작해 “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라고 고쳤다. 고봉은 四․七을 “실지는 같으나 명칭만 다르다”고 했고, 퇴계는 차이가 없는데 명칭만 다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고봉이 주자의 말까지 무시한데 대해 “성현의 글을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기의 고집을 버리도록 충고했다.

고봉은 제 3서에서 주자의 말은 좌우를 상대시켜 말하는 對說이 아니라, 사단을 칠정 속에 서 발라내어 상․하로 말하는 因說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서는 사․칠을 “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이에 대해 퇴계는 고봉이 기를 리로 보는 병통이 있다고 비판하고 더 이상 논전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지나친 논쟁이 도학의 실천에 보탬이 되지 않고, 더 이상 주장하거나 양보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퇴계가 반론이 분분했음에도 불구하고 主理說을 고집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4대 사화로 혼탁해진 사회에서 훈구파를 제압하고 사림들이 정치를 주도해 갈 수 있는 도학정치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천리가 인간에게 품부된 人性을 사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양론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우주론과 심성론의 결합을 통해 하늘의 권위를 인간세계에 연결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君․師․父의 권위를 확립해주는 강력한 통치논리가 되기도 했다. 16세기 유학이 理氣心性論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3) 義理의 行

四端은 仁義禮智를 미루어 알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는 본능적인 食色의 性과 구별되는 ‘善한 本性’이다. 性善이 그것이다. 퇴계가 德性 중 ‘仁’만이 義理의 行을 실현한다고 한 것은 ‘仁’이 대표적인 元德이기 때문이다.일찍이 董仲舒는 仁義禮智에 ‘信’을 보태 ‘五常’으로 하고, 주자가 ‘오상’을 ‘五倫’의 道理로 삼았다. 퇴계는 ‘五倫’을 ‘五常’의 本性(德性)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本性(自然性)은 義理行의 道理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윤리행위를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이다. 다시 말하면 所以然之理와 所當然之則을 동일시하는 견해요, 인간의 도덕적 수양을 純善인 하늘(天道)로부터 연원하는 것으로 설정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本性=義理行의 道理라는 사고는 이미 伊川 程頤의 ‘性卽理’에서 정식화된 것이었다. 퇴계는 바로 이 伊川의 주장을 계승해 理의 의미를 所當然과 所以然이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本然之性은 하늘에서부터 품부받은 것으로 본래부터 善하다. 그러나 氣質之性은 氣質에 의한 본능적 욕구에 가려 ‘의리의 행‘과 반대되는 惡으로 떨어질 수 있다. 퇴계는 氣質 자체를 악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氣의 ’有爲‘․’有欲’ 때문에 선․악으로 갈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存天理’ ‘遏仁欲’이 心學의 기본목표라는 것이다.

4) 居敬窮理

그러면 어떻게 해야 ‘存天理’ ‘遏人欲’ 할 수 있는가? ‘敬’(居敬․持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敬’은 周敦頤의 ‘主靜’과 程頤의 ‘主敬’에서 연원한다. 퇴계는 또한 ‘精一’을 하면 ‘존천리’ ‘알인욕’ 할 수 있다고 했다. ‘精一’(主一․集一)이란 정신집중을 뜻한다. ‘敬’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경’은 一心의 主宰라는 것이다. ‘정일’을 하면 ‘誠’의 사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誠實하고 反省할 때 理의 능력이 들어나서 ‘존천리’ ‘알인욕’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書經』의 ‘惟精惟一 允執厥中’, 『中庸』의 ‘中’에서 비롯되었다. ‘중’은 心性의 未發(=本然之性)을 의미한다. 이것은 천하의 大本이다. ‘본연지성’은 太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존천리’란 단순히 인간의 감성적, 합례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질서와 맞물려 있는 當爲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理로서 하늘과 인간을 합일하는 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의리의 행‘으로서의 인륜을 실행하면 그 결과는 사회질서만 바로잡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질서와도 합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戊辰六條疏에서 修身과 省察을 강조했다. 인간을 공경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災害를 내려 견책한다는 것이다. 董仲舒의 天人感應說이 그것이다.

敬은 動時와 靜時에 따라 실천방법이 다르다. ‘戒懼’는 마음이 아직 발동하기 전의 공부요, ‘體察’은 마음이 활동할 때의 공부이다. 敬은 양자를 관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고요함이 지나쳐 禪(불교)이나 虛無(도교)에 빠지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퇴계는 수양방법으로서 ‘求放心’ ‘養德性’을 중시했다. 이는 내적인 마음의 수양이요, ‘三省’ ‘三貴’ ‘四勿‘ ’九容’ ‘九思‘는 외적인 마음의 수양이다. 이러한 ’경‘의 태도는 ’整齋嚴肅‘의 절도이며, ’主一無適‘의 자세요, ’其心收斂‘ ’常惺惺‘ ’求放心‘의 방법이다.

窮理는 사물이나 일에 있는 理를 인식하는 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지각능력으로 사물에 내재해 있는 법칙․원리로서의 理를 깨닫는 것이다. 마음은 虛靈과 知覺으로 나눌 수 있는데 ‘虛’는 理요, ‘靈’은 理氣의 결합이라 한다. 마음의 허령한 본체가 사물에 기뜰여 있는 理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格物致知’가 그것이다. 이 때 마음의 지각작용을 ‘能覺’이라 하고, 지각대상이 되는 사물의 리를 ‘所覺’이라 한다. 퇴계는 처음에 마음의 지각활동이 사물의 리를 궁구하는 것이요, 대상의 리는 수동적으로 마음의 지각을 기다리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뒤에 奇大升이 ‘理自到說’을 제기하자 ‘格物’은 내가 궁구해서 사물의 極處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만, ‘物格’은 物理의 극처가 나의 궁구하는 바에 따라 인식되는 것이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인식론은 퇴계가 理의 主觀性, 能動性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철저한 객관적 관념론이다. 그런데 이 때의 사물의 리는 자연법칙적, 객관적 리라기 보다 是非․善惡을 밝히는 가치론적인 리, 곧 道德理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 퇴계의 인식론은 수양론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체론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5) 陽明學批判

퇴계의 철학은 주자학을 모본으로 했다. 따라서 주자학에 저촉되는 다른 사상은 철저히 배격했다. 巫俗․불교․도교는 말할 것 없고, 같은 유학 중에서도 陸象山․王陽明의 心學과 羅整菴․徐花潭의 氣學도 배격했다. 무속은 고려 말에 安珦 등에 의해 배격되었고, 불교는 국초에 鄭道傳 등에 의해 배척되었으며, 도교는 중종 조에 趙光祖 등의 昭格署 혁파로 배제되었다. 여기에 퇴계는 명나라에 유행하고 있는 양명학까지 배격한 것이다.

퇴계는 육상산의 학문을 “頓悟의 학문”이라 매도하고, 육상산이 窮理는 정신을 피로하게 한다고 하고 問學의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니 “不立文字” “見性成佛”을 내세우는 禪學과 같은 異端이라고 했다. 퇴계는 白沙 陳獻章에 대해서도 그가 성현의 훈계를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나 끝내 禪學의 방법으로 전락했다고 부분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비해 양명학은 크게 잘못 되었다고 비판했다. 퇴계는 양명에 대해 “그 마음은 강하고 사나우며, 스스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니, 말이 장황하고 휘황찬란해 사람으로 하여금 현혹되어 지키는 바를 잃게 하니, 仁義를 해치고 천하를 현란시킬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 아니라 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6. 道統의 확립

도통이란 道學의 학통을 말한다. 도학이란 좁은 의미로 周敦頤-張載-程顥-程頤-朱憙로 이어지는 송대의 성리학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韓愈의 「原道」에서 거론된 堯-舜-禹-湯-文王-武王-周公-孔子-孟子까지를 포함하고 그 이후에 도통이 끊어졌다가 주돈이에 의해 다시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전자를 도학적 도통론이라 하고, 후자를 전통적 도통론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도통론은 전자를 의미한다.

고려시대에는 崔致遠․薛聰․安珦 등 세 사람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리고 1409년(태종 9)에는 성균관에서 李齊賢․李穡․權近의 문묘종사가 논의되었다. 여기까지는 도학과 무관하다.

도학자의 문묘종사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趙光祖 등 士林派가 정권을 잡았던 중종 초부터였다. 즉, 1510년(중종 5) 10월에 正言 李膂가 鄭夢周의 문묘종사를, 1517년(중종 12) 8월에 성균생원 권전이 金宏弼의 문묘종사를 요구한 것이 그것이다.

이 이후로 사림파들은 관학파를 제치고 鄭夢周- 吉齋-金叔滋-金宗直-金宏必-趙光祖를 朝鮮圖學系譜로 부각시켰다. 정몽주와 길재는 節義로서, 김굉필과 조광조는 도학으로 거론되었다. 金宗直은 詞章에 치우치고 ‘弔義帝文’을 지어 훈구파들의 배격을 받아 종사 대상에서 빠졌다. 김숙자는 길재와 김종직을 연결시키기 위해 일시 들어갔고, 김굉필은 조광조의 스승이라 들어갔으며, 鄭汝昌은 뒤에 김굉필의 친구로서 비슷한 공적이 있다고 해 들어갔다. 그러나 국왕과 훈구파들이 이들의 문묘종사에 소극적이어서 1517년(중종 12) 9월 17일에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 후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에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의 세상이 돌아오자 奇大升은 김굉필 이외에 조광조와 李彦迪을 표창․추존하자고 했고, 11월에 퇴계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 이른바 4賢을 현창할 것을 제안했다. 정여창은 훈구파와의 협상카드로 들어간 것 같다. 퇴계는 김굉필 조차도 道問學 공부에 미진하다고 했고, 조광조도 학문이 충실치 못한데 개혁을 조급하게 서둘다가 사림파를 낭패하게 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뜻이 좋다고 해 스스로 행장을 지어 그 업적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 委官을 했다는 등 사림의 비난을 받는 사람인데도 역시 행장을 자진해 지어 도학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주자가 周敦頤의 「태극도설」을 그의 主理論의 출발로 삼은 것처럼 퇴계는 이언적의 無極太極說을 그의 주리론의 출발로 삼았다.

그러다가 1570년(선조 3)에 퇴계가 죽자 4현종사는 5현종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東西分黨이 된데다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610년(광해군 2) 7월에 드디어 5현종사가 실현되었다. 광해군은 정통성이 약한 군주였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림의 지지까지 받지 못하면 왕통을 지키기 어렵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鄭仁弘의 晦退辨斥이 있었기는 했지만 5賢이 문묘에 종사되었고, 이로써 퇴계가 의도했던대로 도통이 확립되었다. 그 결과 金安國, 盧守愼 등 당대의 名儒들은 도통에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6. 맺음말

퇴계가 살던 16세기 조선사회는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권이 바뀌는 과도기였다. 퇴계는 趙光祖가 주창하던 도학정치가 기묘사화로 좌절되자 사림세력을 결집하고 재훈련시키기 위해 도학 이론을 정립하고, 도통을 확립하며, 鄕約을 실시하고 서원을 설립했다. 물론 이러한 일은 퇴계 혼자 한 것은 아니다. 金宏弼․鄭汝昌․趙光祖․曺植 등은 도학 실천에, 李彦迪․李滉․李珥․奇大升 등은 도학 이론을 정립하는데 공헌했다. 그리하여 사림정치의 이론적 틀이 정립된 것이다.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사림들의 청신한 선비문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理氣心性論의 정립이 필요해서였다. 착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에 품부된 善心을 敬을 통해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는 스스로 天道를 실천에 옮기는 修己를 우선해야겠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론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일찍부터 도학 연구에 앞장 선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시골에 있는 한미한 가문에 태어난 문학도로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시험을 보아 벼슬살이를 한 科擧官僚였다. 그러나 벼슬을 하기 위해 서울을 드나드는 길에 『性理大全』․『心經附註』․『朱子大全』 등의 도학서를 구해보고 도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43세 되던 1543년(중종 38)부터 벼슬을 버리고 도학 연구에 몰두하려 했으나, 사림정치를 구현하려는 국왕과 儒臣들에 의해 儒宗으로서 계속 관직에 부뜰려 있었다. 그리하여 정 1품 벼슬까지 지내면서, 사직과 출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뜻은 이미 고향에 물러나 도학 연구와 제자양성, 저작활동에 몰두하는데 있었다. 퇴계는 37년 간 관직세계에 있으면서 부단히 사직소를 올렸다. 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학 탐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70 평생 많은 책을 썼고, 많은 제자를 길렀다. 陶山書堂은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퇴계는 관직의 極品을 받았고, 두 세 번 위기는 있었으나 귀양 한 번 간 적이 없으며, 당쟁이 있기 전이라 전국의 인재를 제자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 도산서당과 같은 경치 좋은 곳에 교육장을 마련해 제자들과 함께 淸凉山을 오르내리며 陶山12曲을 부를 수 있었다. 이만하면 퇴계는 完人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도학은 收養論으로부터 출발한다. 문치주의, 사림정치의 근본은 心性을 깨끗이 하는 것이었다. 본래 마음은 天理를 품부받아 착하다고 본다. 性善說이다. 이 착한 마음이 하늘에서 온 까닭에 主理論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心性論을 宇宙論에 연결시킨 것이다.

퇴계의 도학은 周敦頤-張載-程顥-程頤-朱憙를 잇는 송대 도학자들의 이론을 이어받았다.(도학적도통론) 그 중에서도 특히 주희의 이론을 祖述했다. 자기의 이론과 다르지 않는 한 그러했다. 율곡이 퇴계의 유학을 衣樣之美가 있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적 성리학을 확립하는데 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자기 이론을 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