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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無緣社會) 수상(허문도)-2011년 9월 강연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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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無緣社會) 수상

- 일본과 한국

 

허문도(前 국토통일원 장관)

 

작년 1월31일.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무연사회(無緣社會)  무연사(無緣死) 3만2천인의 충격>이란 프로를 방영하여 일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무연사회’ 현상을 예사롭게 볼 수 없었던지, 일본을 대표하는 퀄리티 페이퍼 朝日(아사히)신문은 금년 들어, 첫 달부터 ‘고족(孤族)의 나라’라는 기획시리즈를 시작했다.

매스콤의 문제제기에 일본정부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문연재는 1월초에 시작됐는데, 1월24일의 금년도 시정방침 연설에서 간 나오토(菅 直人) 수상은 이 문제를 거론하고 나왔다. “국가는 고립된 사람들의 지원을 추진 할 태세”라고 천명하면서, “고립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싸 안을 ‘사회적 포섭전략’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장 구체적인 대책이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일본사회가 받은 충격에 반응한 것이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종합잡지 文藝春秋(분게이 슌쥬)는, 3월11일의 미증유의 동일본대지진 하루 전에 발간된 4월호에서, 일본 국가사회 전체의 현하의 폐색감을 깔고서, 그 출구를 묻는 질문을, 정계, 문화계 등 각계의 정상급 식자 125人에게 던져 답을 받고 있다. 여러 말들이 있지만 지진이 나기 까지의 일본사회의 키워드는 무연사회라 하고 있다. 이십년 장기 불황의 도달점을 무연사회 속에 압축표현하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대지진이 있고나서는 文藝春秋가 재기의 출구를 위해 중지를 모으고 있는데, 일본 역사상의 제3의 개국(開國) 얘기가 나오고 있다. 명치유신을 제1의 개국으로, 2차 대전 패전 후의 점령개혁을 제2의 개국이라 한다면, 올해의 대지진이 제3의 개국을 불가피하게 한다는 것이다. 무연사회에 덮친 대지진을 제3의 개국의 그라운드 제로(폭심)로 삼겠다는 콘센서스가 은연중에 있어 보인다.

무연사회

무연사회는 NHK의 프로 제작팀이 만든 말인데, 방영과 동시에 전 사회에 즉각 통용권을 얻은 말이다.

취재기자가, 백방으로라도 연락이 닿지 않는 취재대상에 부딪혀, 기댈 사람도 없고, 어디선가 혼자 죽었는지 모르겠다.는데 이르러, 연줄이 없는 사회 상호연결이 없는 사회에 생각이 미쳤고, 말하자면 무연사회(無緣社會)구나…”가 나왔다.(< 無緣社會>, NHK 無緣社會 프로젝트 取材班 편저, 文藝春秋)

NHK취재팀은 처음 무연사(無緣死)를 거쳐 무연사회에 도달했다. 혼자 고독하게 죽고 아무도 인수할 자가 없는 죽음을 무연사라 한다. 취재팀은 무연사가 전국적으로 어느정도 생기고 있는지 알려고 했다. 관청통계에 기대지 않고, NHK는 전일본의 말단 자치단쳬에서 공비로 화장, 매장되는 유체의 수를 조사했다. 동시에 취재팀은 사망현장에 남아있는 빈약한 단서를 근거로,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을 되짚어 가는, 마치 사건을 쫓는 형사 같은 취재에 긴시간의 집중력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때까지 사회성원들이 공기처럼 잠겨 무감각했던 무연사회에 도달했던 것이다. 프로젝트 팀의 창의와 휴머니즘과 직분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경찰도 신원확인을 해들어가다가 포기한 경우니까, 취재는 극난했다. 하나 하나 신원을 알게되면서, 이들이 거의 대부분 사건성이 없는 보통사람들이라는데 취재기자들은 놀랐다 한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신원불명의 자살이나 길에서 쓰러진 경우 아사(餓死) 동사(凍死) 등으로 NHK가 전국의 자치단체에서 집계한 결과는 무연사 연간 3만2천인에 달했다. 모두가, 극히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던 보통사람들이, 한 가지 한 가지 사회와의 연줄을 잃어버리고, 혼자 고독하게 살다가 죽어 간 것을 알게 되었다.

취재팀은 또한 단 혼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취재해 들어갔는데, 누구하고도 ‘연줄이 없다’,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로 다수인 것에 놀랐다고 한다.

가족 대신에 죽고 나서 사후처리 절차를 밟아주는 NGO가 생겨나 있는데, 육칠십 이상의 고령자들 뿐만 아니고, 50대도 몰려든다 한다. 혼자만으로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는 불안은 상상이상으로 번져나 있다는 것이다.

무연사회 방영이 있고나서, 인터넷에 30대, 40대로 비교적 젊은 층에서도 댓글이 많이 떴는데 나도 무연사 할 지 모르겠다. 였다.

일본사회는 큰 전환점인 2차 대전이 끝나고서 회갑이 넘는 66년이 지났다. 경제의 고도성장으로 세계 첨단에 나아가고, 버블시대를 거쳐 장기불황이라 하지만, 지난날의 고도 성장의 기억 때문이지, 실제는 성숙사회에 접어 들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NHK가 이 성숙사회의 바닥에 있는 무연사회를 1억2천만의 안전(眼前)에 들이 댄 것이다.

대지진 부흥구상회의

미증유의 대진재를 당하고 나서 일본 정부는 피재지역의 부흥을 위해 수상의 자문기관으로 동일본대진재 부흥구상회의를 구성했다. 회의에는 현대일본의 제일급의 지혜와 지성으로 여겨지는 16명을 모았고, 그 밑에 19명의 전문가 집단으로 검토부회를 두었다.

구상회의 이오키베 마코토(五百旗頭眞) 의장은 현재는 방위대학 교장이지만, 전후 미국의 일본점령정치 연구에 개척적이고도 획기적인 연구업적을 쌓은 사람이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패전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보인 일본민족의 지혜와 활력을 조명해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日美戰と戰後日本>, 講談社學術文庫)

‘부흥구상회의’는 6월말에 답신보고서를 내고 천하에 공개했다. 전국민의 호응, 그리고 대책의 방향성과 전문성에 대한 자신과 대책의 실행을 향해 법률이상의 압박을, 답신의 공개행위는 느끼게 한다. 제목이 ‘부흥에의 제언 – 비참 한복판의 희망’인 보고서는, ‘부흥회의’가 대진재 대책을 강구함에 있어서, ‘무연사회’에 대한 위기의식을 농후하게 깔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는 ‘무연사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진재 부흥의 동력원으로 결실되는 절묘한 철학을 개진하고 있다. 보고서의 전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누구한텐가에 떠받쳐져서 살아 왔는지를 자각화 함으로써, 이번엔 누구를 떠받칠가를, 진재체험은 묻고 있을 터이다. 그 내면으로부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아마도 그것은, 스스로를 무엇인가에 ‘이어내는’ 행위에 의해 보이게 된다. 사람과 사람을 잇고(つなぐ), 기업과 기업을 잇고, 市町村과 나라와 현(県)을 잇고, 지역의 공동체의 내외를 잇고, 東日本과 西日本을 잇고, 나라와 나라를 잇는다. 크든 작든 ‘이어냄(つなぐ)’으로써 ‘떠받치는’ 것의 실태가 발견되고, 거기에 부흥의 빛이 비치게 될 것이다.”

이를 보고 있으면, 일본이 대진재를 통과하면서 역사를 통해 별로 보여주지 못한 이웃나라와의 연(緣)을 공리(功利)를 넘어 소중하게 여기는 날이 눈앞에 올 것 같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지켜보고 싶다.

가족붕괴

앞에서 본 NHK ‘무연사회’ 취재팀은 ‘동경시내에서 111세의 최고령자가 미이라로 되어 발견되었다.’는 뉴스에 다시 긴장한다. 가족이 있는데도 고령자가 소재불명이 되고 마는 현상에 부딪혀, 취재팀은 ‘무연사회’라는 위기현상의 핵심에 접근해간다. 취재팀이 ‘무연사’한 사람들이나, 외톨이로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취재해 들어가서 알게 된 것은,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족 내의, 가족성원간의 연(緣)이, 연줄이 희박해져 있다는 현상이었다.

파견사원으로 합숙소 생활을 하다가 해고와 동시에 노숙자로 떠도는 한 사나이를 취재팀이 말을 걸었다.

핏줄이 닿는 사람들에게 연락하지 않는 이유로 이 사나이가 든 이유는 ‘자기 일로 누구한테든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였다. 취재팀이 소감으로 적어 놓고 있다.

“원래가, ‘연줄’이나 ‘연(緣)’이라는 것은 서로 폐를 끼쳐 주고 받아, 그것을 피차 허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 의문이 가슴에 박혀 떠날줄 몰랐다.”

‘폐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에 상징되어 있는 희박해져 버린 ‘연줄’로 “일본사회에는 외톨이로 사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고 취재팀은 지적한다.

일본에서 ‘무연사’는 사망현장의 자치단체의 손으로 화장되고, 5년간 유골이 보관된 후, 무연묘지에 합장되고 있다. 인수자가 없는 유체의 처리에 쫓기고 있는, 한 자치단체 직원은 ‘개중에는 원방에 가족이 살고 있어도, 여러 해 소원했다는 이유로 인수를 거부하는 케이스도 있다.’고 일러준다.

무연사회 위기의 핵심사안인 가족 내의 연(緣) 문제 앞에 이제 당도하게 되었다.

혈연 … 기능 정지

3만2천인의 무연사를 샅샅이 짚어온 취재팀은, 그 대부분이 신원이 판명되어 가족이 확인되었는데도, 인수를 거부하는 경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를 나눈 가족이나 친족이 있는데도, 유체가 인수되지 못한 채 ‘무연사’하는 실례들 앞에서 취재팀은 일본사회의 근저에 있는 보다 심각한 문제에 가서 닿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소단위의 장에서 뭔가 이상(異常) 사태가 벌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깨달음 같은 의문이 취재에 더욱 힘을 실어준 것 같다.

‘무연사’를 다루는 현장의 자치단체 직원들로부터 전국 어디서나 많이 들은 얘기는 이와 같다.

‘오늘도 인수거부가 있었는데요…’

‘가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가족의 연줄이 엷어져 가는 걸까요’

가족의 양상에 일어난 변용이 ‘무연사회’를 확대해가는 주인이라고, 자치단체 담당자들은 보고 있다. 그전, 삼대가 같이 사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로부터, 핵가족화의 시대로, 다시 이제 ‘단신화’의 시대로 변해 왔는데, 여기다가 ‘미혼화(未婚化)’ ‘소자화(‘少子化)’가 추가되면서, 죽고 나면 인수를 요청해야 할 혈족이 족하나 질녀 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담당직원의 전화를 받은 조카나 질녀는 대부분이 ‘관혼상제 때 말고는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벌써 20년이나 만난 적이 없는데 …’라며 인수를 거부하는 경우가 이 수삼년 부쩍 늘었다 하고 있다.

‘특수청소업’이라고 혼자서 죽은 삶의 공간을 관청의 의뢰로 뒷처리 하는 일이다. 한 업자는 얘기한다.

“극력 감정을 배제하고,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유체인수를 거부당한 경우를 만나면 배기기 어려운 심정에 빠집니다. 그동안에 있어왔던, 혈연이라는 것이 옅어져 버렸고, 기능안하게 된 것이 최근의 경향이 아닌가고 생각합니다만”

취재팀은 형제간에도 일어난 ‘인수거부’에 부닥치고 있다.

취재팀은 한 대학병원의 해부용 ‘헌체()승락서’에 싸인한 자가 ‘무연사’의 친형인 것을 알아내고는 만나 보았다.

“양친이 돌아가신 후, 형제는 소원해져, 십년이 넘게 연락이 없이 지냈는데…, 한 부모한테서 태어난 것은 틀림없지만, 동생하고는 거의 같이 살지 않았고, 지금 나한테는 처와 자식들도 있어서 … . 생활에 여유도 없고 해서, 병원의 무연묘지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밖에도 취재팀은 백부, 누이, 형, 전처가 인수를 거부하는 현실과 눈으로 부딪힌다.

‘무연사회’를 취재를 한참하고 나서, ‘가족이라는 것이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을 취재팀은 통감하게 되었다 한다.

‘가족까지도, 연줄이 희박해져, 주거니 받거니를 할 수 없게 된 시대. 이 속에서 무연사는 일어나고 있다.’

유교를 버린 사회의 종착점

NHK ‘무연사회 프로젝트’팀의 최대의 발견은 일본사회의 가족 내에 연줄이 희박해져 있다는 것, 가족간의 상호관계에서 ‘가족’이 기능치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추세에 변화가 있기 어렵다면, 일본 사회의 가족은 장기적으로는 붕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일본의 ‘무연사회’화의 진전을 유교와의 관계에서, 그것도 일본근대화의 국민적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福諭吉)의 반(反) 유교주의와 관계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연사회는 일본의 경제입국과 고도성장의 결과물이기 보다는, 일본근대화가 일본의 전통윤리로서 어느 정도로 정착했던 유교를 무익하고, 후진, 정체적이라고 짓밟아 버리고 서양의 공리주의, 파워 폴리틱스(권력정치)를 무조건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근대화, 산업화를 추진해온 결과물이 아닐 것인가.

유교를 핫바지 취급했던 탈아입구(脫亞入)의 후쿠자와(福諭吉) 그리고 서양의 일변도 추종에 급급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근대화 노선의 종착점이 ‘무연사회’일 것이다.”(月刊朝鮮 2011.6)

명치유신 전후해서 서양을 세번이나 다녀온 후쿠자와(福)는 반 유교투쟁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계몽 사상가였다. 유신 후의 개화바람을 타고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문명론의 개략>, 등의 책들이 출판이 성하지 않던 그시절에 선풍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이후에는 신문 등을 만들고, 한국의 개화파 인사들도 배웠던 게이오 기쥬크(慶義塾) 등을 통해, 관.민에 걸쳐 전 일본국가를 향해 근대화 교사 노릇을 했다.

식민지를 거친 한국에는 후쿠자와를 아직도 아시아 근대화의 선각자.지남자로 알고 있는 눈들이 있는 것 같다.

반 유교의 후쿠자와에게 조선 중국은, 그가 역사적 필연이라고 믿는 ‘문명개화의 세계적 침윤에 저항하는 보수반동세력의 최우의 아성’으로 비쳤다.( <福諭吉의 哲學>, 丸山眞男著, 岩波文庫) 그 같은 사상의 귀결로 그가 부르짖은 탈아입구(脫亞入)는 일본사람들의 근대 문명의 국가노선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통해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조선과 아시아를 침략해 들어가는데, 그 사상적 지남역은 후쿠자와(福)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침략세력인 근대 서양 앞에서, 서양이 아닌 아시아인에 의해 아시아인이 침학당하고 고통 받는, 세계사상의 특이한 사례가 등장하게 되는 동인적 사상의 원천에 후쿠자와(福)가 있다는 것은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일본을 따라가는가.

앞에서 본 아사히(朝日)신문은, 무연사회 문제를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산업화, 선진화 과정의 필연의 결과라고 보는지, 산업화 등에서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는 한국과 중국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일본 오늘의 ‘고족(孤族)의 나라’ 현상이 “한국. 중국 등 아시아 나라들의 내일의 모습”일 것이라 한다.

아닐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국도 일본처럼 근대화 과정에서 유교를 버리려 들었다. 망국과 식민지배를 겪으면서, 선단 지식인들 자신이 일본 콤플렉스를 어쩌지 못했고, 탈(脫)유교를 개명으로 여기려 들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보다는 유교를 더 깊이 받아들여 체화하고 있었다. 무슨 교 라기 보다는 생활문화로 한국인의 DNA에 파고들었던 것이 유교윤리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다 버려지지가 않았다. 한 예로 東京서 지하철을 타면, 나이 든 사람한테 자리를 내주는 경우를 절대로 보지 못하지만, 서울서는 아직 얼마든지 있다.

전통사회에서의 유교도 한국. 일본 간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중심덕목인 忠孝를 두고 볼 때에, 한국에서는 忠과 孝의 논리가 충돌할 경우 孝쪽으로 정리되었으나 일본은 반대였다. 한국서는 벼슬 살다가 나라 명령으로 먼 임지로 옮겨야 했을 때, 부모가 병중에 있으면 가지 않았다.

가족 공동체를 가치 중심에 두는 유교는 孝를 중심으로 하여 온 세상을 연(緣)으로 얽는 철학을 근본에 깔고 있다.

퇴계선생이 지은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제2도인 서명이 그 같은 철학을 개진하고 있다고 한번 이해해 보고자 한다.

한국인의 전통문화는 가족 내의 연(緣)을 이중, 삼중, 다중으로 생활과 사회조직과 문화와 의례를 통해 다지는 식으로 짜여 져있다 할 것이다. 구차한 설명을 할 공간이 없지만, 그래서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초현대, 정보화 사회가 된다 해도 일본처럼 무연사회(無緣社會)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