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글
2011년 7월 강연(퇴계학의 바탕으로서 한국말-최봉영 교수)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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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의 바탕으로서 한국말
최봉영(한국항공대, 한국학)
1. 왜 퇴계의 말을 따지는가
한국인은 일찍부터 퇴계 이황을 훌륭한 학자로서 높이 받들어왔다. 퇴계는 살아 있을 때, 이미 많은 선비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율곡 이이 또한 젊은 시절에 안동으로 퇴계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했다. 퇴계는 죽은 뒤에 종묘와 문묘, 그리고 전국의 향교와 곳곳의 서원에 위패가 봉안되어, 임금보다도 널리 기림과 섬김을 받아왔다. 1975년에 퇴계의 초상이 1,000원짜리 종이돈에 찍혀 나온 이후로, 한국인은 일상으로 퇴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돈에서 마주하는 퇴계는 실제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다. 퇴계의 초상이 전해지지 않는 까닭에 어느 누구도 퇴계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퇴계를 만나는 것은 오로지 그가 남긴 갖가지 글을 통해서이다. 퇴계가 남겨 놓은 글을 바탕으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1960년대 이후로 퇴계의 이모저모에 대해 구구할 정도로 많은 논의들이 펼쳐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는 주로 퇴계가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한 학자로서 이룩한 생각과 자취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퇴계를 생각하게 되면, 주로 중국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써 漢文, 孔子, 朱子, 性理學, 理發과 氣發, 四端과 七情과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퇴계가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으로서 살았다는 것에는 생각이 잘 미치지 않는다. 퇴계가 단지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했던 탓으로, 그렇게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비들 가운데는 오로지 성리학에 파묻혀서 책벌레처럼 일생을 마친 이들이 숱했기 때문이다. 퇴계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한 선비들도 많았다고 본다면, 어떤 점에서 퇴계가 그토록 뛰어날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하다. 특히 퇴계와 같은 학자가 되려는 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아직 시원스러운 답을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퇴계가 한국말을 밝게 살펴서 외국말인 한문을 묻고 따지고 풀었기 때문에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 이제껏 어느 누구도 퇴계만큼 한국말을 밝게 살펴서, 외국말을 묻고 따지고 풀어낸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모두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했고, 그랬기 때문에 퇴계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풀어보도록 하자.
2. 퇴계와 주자
퇴계는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기본 교과서에 담겨 있는 주자의 학설을 열심히 배우고 익힌 사람이었다. <小學>, <四書>, <五經>, <近思錄>, <心經>, <性理大全書>, <朱子大全>, <朱子語類>와 같은 교재들은 퇴계를 주자의 학설로 이끌어, 평생 주자학자로서 살아가도록 만든 장본이었다. 퇴계는 주자가 주석해 놓은 <논어>를 본문은 물론이고 주석까지 모두 외웠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퇴계는 주자를 학문의 본보기로 삼아서, 오로지 주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퇴계의 학문과 삶에는 주자의 학문과 삶이 짙게 배어 있어서, 퇴계와 주자를 나누어서 보기가 어렵다. 특히 퇴계가 한문으로 써놓은 글 가운데는 어떤 것이 퇴계의 생각이고, 어떤 것이 주자의 생각인지 나누기 어려운 부분이 매우 많다. 이런 까닭에 퇴계의 겉모습만 흘려보게 되면, 퇴계는 오로지 주자만을 따라 배우다가 일생을 마친 학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퇴계는 오로지 주자만을 본보기로 삼아서, 따라 배운 것은 아니었다. 퇴계는 사람답게 되는 일에서 본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본보기로 삼았다. 퇴계는 중국에 살았던 공자, 안자, 맹자, 정자, 주자와 같은 이들을 그리워하고 따랐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살았던 길재, 최치원과 같은 이들을 그리워하고 따랐다. <퇴계선생문집>에 나오는 첫째 글과 둘째 글은 젊은 퇴계가 이 땅을 누비면서 길재와 최치원의 자취를 마주하고, 기리고 따르는 마음을 읊은 시이다. 퇴계는 무엇보다도 자연을 가장 큰 본보기로 삼았다. 자연 상태에 있는 온갖 것들은 절로 본성을 드러내어 함께 어울릴 뿐이지, 스스로 욕심을 내어 허물을 짓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하는 힘을 갖기 있기 때문에 온갖 것들을 어울리게 함으로써 자연 상태를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이룰 수도 있지만, 욕심에 이끌려 허물을 짓게 되면 함께 어울리는 일을 깨면서 자연보다 못한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퇴계는 사람이 자연을 바탕으로 삼아서, 온갖 것들과 함께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이러한 마음을 <陶山十二曲>에서 ‘늘 푸른 산과 밤낮으로 흐르는 물처럼, 우리도 저와 같이 그치지 말아서 늘 푸르도록 하자’고 말하고 있다. 퇴계가 아무리 주자를 열심히 따르더라도, 퇴계는 퇴계이고 주자는 주자일 수밖에 없는 여러 사정이 있었다. 두 사람은 태어나고 살았던 시대와 장소, 나라와 겨레, 자연과 환경, 말과 풍속이 완전히 달랐을 뿐만 아니라, 이루어야 할 꿈과 풀어야 할 문제 또한 매우 달랐다. 퇴계가 주자를 높이 받들고 따르게 된 것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서 주자가 훌륭한 길잡이로 노릇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계가 언제까지나 길잡이에 이끌려 길을 걸어갔던 것은 아니었다. 때가 이르자 퇴계는 주자라는 길잡이를 넘어서 스스로 새로운 길을 열어갔다. 퇴계가 주자를 넘어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으로서 주자를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퇴계가 한국말로써 주자의 생각들을 풀어내는 과정은 한국인의 슬기와 중국인의 슬기를 아우르는 과정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자연히 주자의 학설에서 새롭게 더하거나 뺄 것들을 찾아내게 되었다. 퇴계는 이를 바탕으로 주자를 넘어서는 주자학자로 커나갈 수 있었다. 만약 퇴계가 중국인처럼 중국말로써 주자학을 공부했다면, 이미 중국말로써 따질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따져 놓은 상태에서 새롭게 더하거나 뺄 것을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주자 이후로 주자를 넘어서는 주자학자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퇴계는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한국말로써 한문을 풀어내는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선조 임금이 경서를 언해하는 일과 연관하여, 신하들에게 경서의 토를 고치는 일에 대해서 묻자, 미암 유희춘은 “우리 동방에서 예부터 경전의 뜻을 곱씹어 맛을 보고, 주자의 글과 말을 파고들어 거듭 따지기로는 이황만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퇴계가 한국말로써 한문에 토를 붙이는 일과 한국말로써 한문을 풀어내는 일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앞섬을 말하였다. 퇴계는 오늘날 한국인이 남의 것을 따라 배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인문학처럼 말에 담겨진 슬기를 곱씹어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퇴계처럼 학문을 할 수 있다면, 남의 것을 따라 배우더라도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컨대 퇴계와 같은 방식으로 칸트를 배운다면 칸트를 넘어서는 칸트학자가 될 수 있고, 프로이트를 배운다면 프로이트를 넘어서는 프로이트학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퇴계처럼 학문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한국의 학자들이 온통 바깥의 학문을 빌려서 따라 배우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점을 생각해볼 때, 퇴계가 어떻게 주자를 따라 배워서 주자를 넘어서는 학자가 되었는지 알아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것을 알게 된다면, 한국의 인문학이 보여주고 있는 초라한 모습을 크게 바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해서 아직 어떠한 것도 밝혀진 바가 없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퇴계를 훌륭한 학자라고 말하면서도, 퇴계가 어떻게 묻고 따지고 풀어서, 뛰어난 학자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퇴계가 아무리 주자를 열심히 따라 배우더라도, 퇴계가 퇴계일 수밖에 없었던 점을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퇴계와 주자는 태어나고 살았던 사대와 나라가 달랐다. 주자는 중국의 강남에서 태어나 남송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다. 주자는 중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였다. 주자는 天子가 다스리는 중원에 태어난 사대부로서, 天下의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로써 구실을 삼았다. 주자는 학문적으로 中華의 정통을 확립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오랑캐에게 빼앗긴 북쪽의 땅을 되찾아, 중국을 온전하게 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반면에 퇴계는 주자보다 371년이나 뒤에 海東에서 태어나 조선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다. 퇴계는 조선에 태어난 사대부로서 조선의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로써 구실을 삼았다. 그런데 퇴계는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지 못하였다. 퇴계는 중화의 학문과 문물을 열심히 배워서 조선을 중화와 같은 나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한 번도 중국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과 중국문화에 대해서 품고 있는 생각들은 대부분 실제보다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둘째, 퇴계와 주자는 배우고 쓴 말이 달랐다. 주자는 제나라 말로써 제나라 문화를 공부한 사람이었다. 주자는 특별히 다른 나라의 말을 힘들게 배우고 쓸 필요가 없었다. 주자는 중국말 가운데서 古文과 白話, 官話와 사투리에서 볼 수 있는 차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중국말과 한국말처럼 계통을 완전히 달리하는 말이 서로 어떻게 같고 다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주자는 특히 바탕이 전혀 다른 말을 쓰게 되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였다. 주자는 중국과 중국말과 중국문화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말과 문화를 넓게 살펴보기 어려웠다. 반면에 퇴계는 한국말로써 중국의 말과 문화를 공부한 사람이었다. 퇴계는 중국인이 중국말로써 적어놓은 한문을 한국말로 풀어서 배우고 익혔다. 퇴계는 바탕이 전혀 다른 두 말, 즉 한국말과 중국말을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했고, 이로써 말과 문화를 더욱 넓게 살펴볼 수 있었다. 퇴계는 한국말과 중국말을 옮겨 다니는 과정에 중국인이 중국말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과 한국인이 한국말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을 아울러 맛보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퇴계는 중국인보다 한문을 더욱 깊이 묻고 따지고 풀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셋째, 퇴계와 주자는 공부하는 방법에서 크게 달랐다. 주자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과 같은 선배들이 논의해 놓은 것들을 묶어서 성리학의 체계를 잡아가는 일을 하였다. 주자는 성리학의 전체적인 틀을 잡아놓고, 낱낱의 개념이나 이론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런데 주자는 온갖 것들을 다 끌어안으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서로 잘 묶이거나 이어질 수 없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거나 대충 얼버무리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따라 주자가 엮어놓은 것들에는 앞뒤가 맞지 않거나 좌우가 뒤틀리는 것들도 많이 섞여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주자는 성리학의 기본 교재를 갖추기 위해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태극도설>, <서명>, <통서>와 같은 책을 풀이하고, <소학>, <근사록>, <가례>와 같은 것을 새롭게 편집하였다. 주자는 성리학이 천하의 학문으로 구실할 수 있는 기틀을 굳건하게 만들어 나갔다. 반면에 퇴계는 주자가 이미 체계를 세워놓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그것의 내용을 하나하나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을 하였다. 퇴계는 명나라가 성리학을 천하의 학문으로 널리 펴기 위해서 간행한 <사서오경대전>, <성리대전서>, <주자대전서>, <주자어류>와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아서 太極, 陰陽, 理, 氣, 心, 性, 情과 같은 개념들을 묻고 따지고 풀었다. 퇴계는 주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이루어진 갖가지 논의들까지 아울러 살펴볼 수 있었기 때문에 주자를 더욱 폭넓게 알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 퇴계는 <사서>와 <삼경>에서 알기 어려운 부분을 한국말로 풀어서 <四書釋義>와 <三經釋義>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퇴계는 성리학의 핵심을 잘 알 수 있도록 <聖學十圖>를, 성리학의 내력을 잘 알 수 있도록 <宋季元明理學通錄>을, 주자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도록 <朱子書節要>를 저술하였다.
3. 선비들이 한국말로써 한문을 배우고 씀
사람은 말로써 세상을 풀어내는 까닭에 말이 달라지면 세상을 풀어내는 일 또한 달라진다. 이 때문에 한국말을 쓰는 사람과 중국말을 쓰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 또한 크게 다르다. 한국말에서 나, 너, 우리, 남, 있음, 없음, 임, 아님, 길, 가운데와 중국말에서 我, 你, 我們, 他, 有, 無, 是, 不, 道, 中은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인이 중국말을 가져다가 한국말에다 담아서 쓴다고 한국인이 온통 중국인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말의 바탕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한국인이 중국인이 되지 못하고, 중국인이 한국인이 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한문으로 글을 읽고 썼지만 엄연히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선비들은 한문을 배우고 쓸 때, 언제나 한국말을 바탕으로 삼았다. 선비들이 겉으로는 한국말을 가볍게 여기면서도, 한문을 배우고 쓸 때는 철저하게 한국말을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문을 한국말로 옮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말을 한문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문을 제대로 살려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한국말을 한문으로 옮기는 능력을 갖지 못하면 조정에서 임금을 모시는 일을 해내기 어려웠다. 예컨대 선비들은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기록하는 史官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겨서, 선비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사관으로서 임금을 모시는 꿈을 꾸게 된다. 그런데 사관이 되려면 한국말로 오고가는 대화를 곧바로 한문으로 옮겨서 적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야 했다. 선비들이 천자문을 배우는 단계부터 한국말을 바탕으로 삼아 ‘하늘-天’, ‘땅-地’와 같은 방식으로 외웠다. 이로써 선비들은 하늘을 생각하면 곧장 天이 뒤따라 나오고, 땅을 생각하면 곧장 地가 뒤따라 나왔기 때문에 따로 天과 地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선비들은 문장을 배울 때, 한국말에 한문을 담아서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와 같은 방식으로 외웠다. 선비들이 한문에 ‘~면’과 ‘~아’를 붙여서 읽는 것은 괜히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한국말과 중국말이 어떻게 묶이는지, 그 까닭을 터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비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말 문장과 한문 문장이 엮이는 까닭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선비들은 한문을 한국말로 옮기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말을 한문으로 옮기는 일 또한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인은 외국말을 배우고 쓸 때, 한국말을 바탕으로 삼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들은 영국말을 배울 때, 영국말을 바탕으로 삼은 상태에서 한국말을 오로지 수단으로만 여긴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영국말에 한국말을 담아서 ‘sky-하늘’, ‘earth-땅’, ‘I love you-나는 너를 사랑한다’, ‘I eat an apple-나는 사과를 먹는다’로 배운다. 선비들이라면 당연히 ‘하늘-sky’, ‘땅-earth’, ‘나는 너를 사랑한다-I love you’, ‘나는 사과를 먹는다-I eat an apple’로 배웠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영국말을 배우게 되면, 영국말을 아무리 열심히 배우더라도 영국말에 담기 어려운 한국말, 즉 ‘님’, ‘분’, ‘우리 마누라’, ‘나와 너는 사랑한다’, ‘우리는 사랑한다’, ‘나는 이가 아프다’, ‘나는 비를 맞았다’와 같은 것을 만나면 그만 입을 닫고 만다. 한국말이 어떻게 영국말로 옮겨지는지 잘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영국말로 옮기기 어려운 한국말을 만나면 이상한 것, 불편한 것, 잘못된 것으로 여겨서 아예 멀리해버린다. 이런 이들은 영국말을 더욱 편리한 것으로 착각하여 한국말을 업신여긴다. 이들은 한국말과 한국문화에 대해 어둡게 될 뿐만 아니라, 말의 맛과 힘을 잃게 되면서 생각이 초라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후로, 선조가 재위하던 시절에 한문 교재를 한국말로써 옮기는 작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선비들은 퇴계가 <語錄解>, <사서석의>, <삼경석의> 등으로 보여주는 본보기를 따라서 <소학>, <사서>, <삼경>과 같은 교재를 언해하기 시작하였다. 한자 학습서인 <千字文>이나 <類合>에 한국말로 뜻을 새기고 소리를 붙여서 간행하고, 성리학의 기본 교과서인 <소학>과 <사서>와 <삼경> 등에 한국말로 토를 달고 뜻을 풀어서 간행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참여한 많은 학자들은 자연히 한국말을 밝게 살피게 되었다. 특별히 율곡과 같은 이는 <사서>를 언해하여 <사서언해>를 만들고, <도덕경>에서 요긴한 구절을 추려서 한국말로 토를 붙여 <순언(淳言)>을 저술하였다. 선조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기에 뛰어난 학자들이 숱하게 나오게 된 것은 이러한 분위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기초 한자를 익히는 <천자문>이나 <유합>, 그리고 儒學을 공부하는 <소학>, <사서>, <오경> 등이 언해되고 간행되어 널리 쓰이게 되자, 선비들은 점차 한국말로써 한자나 한문을 담아내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선비들이 앞선 이들이 해놓은 현토와 언해를 좇아서 한문을 배우고 익히게 되면서, 스스로 묻고 따져서 푸는 일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이러니 선비들은 자연히 한국말에 어두워지게 되었고, 한문을 풀어내는 일 또한 대충 이루어졌다. 한편으로 선비들이 한국말로써 한문을 배우고 쓰면서, 자연히 중국인과 다른 방식으로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이 생겨났다. 예컨대 선비들은 德과 仁을 모두 ‘클-德’과 ‘클-仁’으로 새겼는데, 이는 중국인이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이었다. 중국인이 德과 仁을 같은 뜻으로 새기는 일은 드물었고, 德과 仁을 모두 ‘큼’으로 새기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그런데 선비들이 德과 仁을 모두 ‘큼’으로 새기게 된 것은 한국인이 한국말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즉 나와 남이 함께 ‘우리’로서 어울려 살아가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德과 仁을 ‘클-德’과 ‘클-仁’으로 새기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말과 한국말은 바탕이 전혀 다른 말인 까닭에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예컨대 중국말은 한국말의 ‘우리’나 영국말의 'we'에 해당하는 낱말을 갖고 있지 않다. 중국인은 우리나 we를 ‘나’의 복수형인 ‘나들’, 즉 我們(나들), 我等(나들), 我每(나들), 吾等(나들), 吾輩(나들) 등으로 말해왔다. 我們, 我等, 我每, 吾等, 吾輩에서 們, 等, 每, 輩는 모두 복수를 뜻하는 ‘들’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중국인은 우리나 we에 해당하는 것을 모두 나에 속하는 것으로 말한다. 한국인이 ‘우리 마누라’, ‘우리 동생’, ‘우리 부모’,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나라’로 말하는 것을 중국인은 ‘我妻(내 마누라)’, ‘我弟(내 동생)’, ‘我父母(내 부모)’, ‘我學校(내 학교)’, ‘我公司(내 회사)’, ‘我國(내 나라)’으로 말한다. 중국인은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자리하여 나의 밖에 있는 남을 나에게 담아서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나를 닦아서 힘을 기름으로써, 나의 밖에 있는 남을 나에게 담아서, 나의 것들로 만드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이 나를 닦아서 남을 다스리는 일로서 修己-治人하는 것이고, 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나의 밖에 있는 남을 다스려서,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자, 세상은 온통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니 내가 남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싸움으로 범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비워서 남이 편히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중국인은 끊임없이 無我(내가 없음), 無心(마음이 없음), 無爲(함이 없음), 無慾(욕심이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생각으로는 無我, 無心, 無爲, 無慾을 바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꿈과 같은 일이다. 중국인은 나가 나를 넘고, 남이 남을 넘어서 함께 우리로서 어울리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有我와 無我, 有心과 無心, 有爲와 無爲, 有慾과 無慾을 놓고 시름해 왔다. 한국인은 이쪽에 있는 내가 저쪽에 있는 남과 어울려서 함께 우리를 만들고자 한다. 우리는 나와 남이 함께 하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한국인은 우리를 이루고 있는 남을 ‘우리 부모’, ‘우리 스승’, ‘우리 임금’, ‘우리 님’, ‘우리 집’, ‘우리 나라’, ‘우리 산천’이라고 부른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 마음을 길러서 나의 밖에 있는 남과 어울려 우리를 만드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내가 어진 마음으로 온갖 것들과 어울려 우리를 만드는 일은 나를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다. 퇴계는 이러한 거룩함을 <도산십이곡>에서 안개와 노을로 집을 삼고, 바람과 달로써 벗을 삼아, 사람이 생겨난 어진 본성을 믿어서 순박한 풍속을 이룸으로써, 목숨을 다하도록 허물을 짓지 않는 삶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때 내가 남과 어울려 우리를 이루어나가는 자질이 바로 사람이 생겨난 바탕으로서 어짊이다. 한국인은 善, 賢, 良 등을 모두 어짊으로 보아서 ‘어질-善’, ‘어질-賢’, ‘어질-良’으로 새겼다. 그리고 이러한 어짊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를 이루는 것을 큼으로 보아서 德과 仁을 ‘클-德’, ‘클-仁’으로 새겼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말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꼭 같은 글자나 문장을 놓고서도 뜻을 다르게 푸는 일이 많다. 예컨대 한국인은 中을 ‘가운데-中’으로 새기지만, 中과 가운데는 바탕에서 큰 차이가 있다. 중국인은 中을 나라는 임자가 자리하고 있는 中心으로 보아서 주로 中央의 뜻으로 쓰는 반면에 한국인은 中을 우리를 이루고 있는 임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가운데로 보아서 주로 사이의 뜻으로 쓴다. 퇴계가 <도산십이곡>에서 네 번에 걸쳐 쓰고 있는 中은 임자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사이를 뜻한다. 즉, 퇴계가 ‘이 듕(中)에 바라는 일은’, ‘이 듕(中)에 彼美一人을’, ‘이 듕(中)에 當代風流를’, ‘쉽거나 어렵거나 듕(中)에’라고 할 때, 中은 중앙이나 중심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가운데를 뜻한다. 퇴계는 중국인이 나를 잣대로 中을 말하는 것과 달리, 우리를 잣대로 中을 말하기 때문에 中을 가운데의 뜻으로 쓰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한국인과 중국인은 中和나 中庸을 풀이하는 일에서도 차이를 보이는 일이 많다. 중국인은 주로 나라는 임자가 대상을 다스리는 일로써 중화나 중용을 풀이하는 반면에 한국인은 주로 나와 남이 우리라는 임자를 만들어가는 일로써 중화나 중용을 풀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말과 중국말이 바탕에서 크게 다르다는 것은 한국말로 쓴 문장을 한문으로 옮길 때, 더욱 잘 드러난다. 한국인이 흔히 입에 담을 수 있는 문장인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와 같은 것을 중국말로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은 일찍이 선비들이 퇴계가 지은 <도산십이곡>을 한문으로 옮겨놓은 것에서도 꼭 같이 볼 수 있다. 강필효와 같은 선비는 퇴계의 <도산십이곡>을 한문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그가 한문으로 옮겨 놓은 것을 퇴계의 글과 비교해보면, 한국말과 중국말이 얼마나 다른지 잘 보여준다. 강필효는 퇴계의 시를 한문으로 직역하여,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봐, 고인을 못 봐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든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떨고”를 “古人不見我, 我不見古人, 古人雖不見, 行了路在前, 不行了何”라고 옮겼다. 그런데 그는 퇴계가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든 길 앞에 있거든’이라고 두 구절로 나누어 노래한 것을 하나의 구절로 묶어서 ‘行了路在前’으로 옮겨 놓았다. 그가 굳이 이처럼 불경스러울 수 있는 일을 하게 된 것은 ‘~있네’와 ‘~있거든’에서 볼 수 있는 미묘한 차이를 한문으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남하정의 경우에는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든 길 앞에 있거든’을 아예 다른 뜻으로 새겨서 ‘古道猶在前(옛 길이 앞에 있거든), 此道古人行(이 길은 옛 사람이 다닌 것이네)’으로 옮기고 있다. 한국말은 중국말과 달리 말과 말을 이어주는 토씨가 발달되어 있어서 말의 차림을 매우 정갈하게 하고, 말의 맛을 매우 풍부하게 한다. 예컨대 한국인은 가는 것을 두고서도 간, 갈, 갔, 가니, 가면, 가서, 가고, 가나, 가라, 가지만, 가고서, 가니까, 가거든, 가노라, 갈지언정, 갈망정 등으로 정교하게 말을 차려서 말의 맛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문으로써 이와 같이 말의 맛을 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이 때문에 한국인이 한국말로써 한문을 새기고 풀게 되면 중국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의 맛을 만들거나 풀어낸다. 일찍이 김삿갓으로 일컬어지는 김병연은 이러한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한문의 말맛이 별것이 아님을 풍자하는 시를 여럿 썼다. 예컨대 ‘胡地花草’라는 제목의 시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꼭 같은 구절을 단순히 네 번에 걸쳐 되풀이 해 놓은 것으로서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로 되어 있다. 이 시를 그냥 한문으로 풀어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고, 한국말로 풀어야 대강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말로 풀면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지만(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더라도(胡地無花草),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리오(胡地無花草)’가 된다. 그런데 선비들은 한국말로써 한문을 풀어낼 때, 말의 맛이 달라지는 것과 함께 새로운 맛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였다. 선비들은 한국인이 한국말로써 한문을 풀더라도 중국인과 같거나 비슷하게 말의 맛을 느끼고 아는 것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선비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한문을 열심히 배우고 쓰면, 중국인과 같은 생각으로 중국인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선비들은 이러한 생각에서 조선을 小中華로 바꾸기 위해서 온갖 힘을 쏟았다.
4. 퇴계가 한국말로써 한문을 배우고 씀
퇴계는 여느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한국말로써 한문을 배우고 썼다. 퇴계는 한문의 뜻을 풀어내는 일, 한문으로 글을 짓는 일, 한문을 종이에 붓으로 쓰는 일을 모두 다 잘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널리 이름을 떨쳤다. 퇴계가 남긴 글들은 뒷사람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런데 퇴계는 한문을 배우고 쓰는 일에서 다른 선비들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퇴계는 한문을 배우고 익히는 바탕인 한국말을 밝게 살펴서 한국말과 한문이 서로 잘 사무칠 수 있도록 하였다. 예컨대 퇴계는 한문을 한국말로써 풀어낼 때, 한국말에서 ‘없음이니라’, ‘없게 할지니라’, ‘없게 함이니라’와 같은 것이 어떻게 쓰이는지 꼼꼼하게 따져서, 그것을 바탕으로 한문을 풀어나갔다. 퇴계는 <논어석의>에서 ‘思無邪’라는 구절을 한국말로 풀이하면서 “○思이 邪이 업스미니라. ○思이 邪이 업게 디니라. ‘업게 디니라’는 공부의 뜻이 담겨 있다(此有工夫說). 지금 내가 두 가지 설명, 즉 ‘업스미니라’와 ‘업게 디니라’를 살펴보니 모두 마땅히 살려두어야 하겠지마는, 단지 뒤에 나오는 ‘업게 디니라’는 마땅히 ‘업게 호미니라’라고 말해야 한다(今按兩說皆當存之, 但下說當云‘업게 호미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인이 한문과 같은 외국말을 한국말로써 풀어낼 때, 퇴계처럼 한국말을 밝게 살펴서 하는 경우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퇴계가 토씨의 말맛을 하나하나 살펴서 말을 조리 있게 풀어가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런데 퇴계가 이렇게 한 것은 경전에 담긴 뜻을 더욱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바람이 컸기 때문이었다. 퇴계는 더욱 올바른 앎을 얻기 위해서 한국말과 한문 사이에 생겨나는 말의 틈새를 줄여보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퇴계는 중국인이 중국말로써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갈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새로운 것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 뛰어난 학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퇴계가 한국말로써 한문을 묻고 따지고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말을 밝게 살펴야 했다. 예컨대 사람들이 賢과 良과 善을 ‘어짊’으로, 惡과 暴를 ‘모짊’으로 새기는 상황에서, 어짊과 모짊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면 賢, 良, 善, 惡, 暴를 제대로 알고 쓸 수가 없다. 퇴계가 <도산십이곡>에서 사람이 생겨난 바탕을 두고서 ‘人生이 善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人生이 어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질-善’으로 새기는 어짊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퇴계가 살던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어질다와 모질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머릿속에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뜻도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賢과 良과 善을 어짊으로, 惡과 暴를 모짊으로 새기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한국말에서 어질다는 ‘어’와 ‘질다’가 합쳐진 낱말이고, 모질다는 ‘모’와 ‘질다’가 합쳐진 낱말이다. 어질다에서 ‘어’는 ‘<’처럼 어떤 것이 앞을 향해서 품을 벌리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모질다에서 모는 ‘ >’처럼 어떤 것이 앞을 향해서 모를 세우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어질다와 모질다에서 ‘질다’는 지르다, 지름길, 내지르다 따위에서 알 수 있듯, 어떤 것이 앞으로 곧장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질다는 어떤 것이 품을 벌리고 앞으로 곧장 나아가면서 다른 것들을 받아들여 품어주는 것을 말하고, 모질다는 어떤 것이 모를 세우고 앞으로 곧장 나아가면서 다른 것들을 밀치고 부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賢과 良과 善을 어짊으로, 惡과 暴를 모짊으로 새겼다. 사람들이 한국말보다 한문을 높이 받들게 되면서 어짊과 모짊보다 賢, 良, 善, 惡, 暴를 더욱 좋은 것으로 여겨서 널리 쓰게 되었다. 사람들이 어질다와 모질다를 버려두면서, 점차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개화기 이후로 학교가 늘어나고 교육이 확대되면서 한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이 크게 늘어나자, 한자에서 가져온 낱말들이 더욱 기세를 떨치게 되어, 이런 일이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어짊과 모짊은 물론이고 사랑, 아름다움, 고마움, 반가움, 어른, 스승, 다스림, 배움, 가르침과 같은 말조차 뿌리 없는 말처럼 되어가고 있다. 퇴계가 주자를 열심히 따랐음에도, 주자를 넘어서는 주자학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문을 풀어내는 바탕인 한국말을 깊이 살펴서 말맛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계는 한국말의 맛깔을 바탕으로 중국인이 알기 어려운 것들을 새롭게 드러내었다. 이런 점에서 퇴계는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크게 빚을 졌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퇴계는 한문을 한국말로써 풀어내면서 훈민정음을 가장 적극적으로 살려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줄거리만 들어서 이야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퇴계는 공부에 요긴한 한자 낱말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 한국말로써 한자 낱말을 풀이하여 <語錄解>라는 낱말집을 만들었다. 퇴계가 한문을 배우고 익히던 시절에는 아직 한국말로써 한자를 풀이한 사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국말로써 한자의 음을 적어 놓은 韻書는 있었지만, 그것도 선비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자문>이나 <유합>과 같은 것은 그냥 한자를 엮거나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빌어서 한자에 한국말로써 훈과 음을 붙인 <훈몽자회>를 만들고 간행한 것은 퇴계가 27세가 되던 해였다. 이런 상황에서 퇴계는 한문을 제대로 따지고 풀기 위해서 한자 낱말 가운데 알기 어려운 것을 모아서 <어록해>라는 낱말집을 만들었다. 이름을 <어록해>라고 붙인 것은 唐宋의 어록체 문장에 나오는 낱말 가운데,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퇴계가 뜻을 알기 어려운 한자 낱말에 한국말로써 뜻과 소리를 달아서 <어록해>를 만든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선비들은 언문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고상하게 학문하는 일에 언문을 가져다 쓰는 일을 매우 꺼렸다. 언문은 하찮은 아랫것들이 쓰는 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퇴계는 한문의 뜻을 제대로 묻고 따지고 풀기 위해서 언문을 쓸 수밖에 없다고 보아서, 한자 낱말에 언문으로 뜻과 소리를 붙인 낱말집을 만들었다. 퇴계가 만든 <어록해>는 이후로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치면서, 더욱 잘 다듬어져 몇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둘째, 퇴계는 한문 경전을 제대로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 <사서>와 <삼경>에 나오는 구절 가운데, 알기 어려운 문장들을 추려서 한국말로써 풀어 <사서석의>와 <삼경석의>를 만들었다. 퇴계가 한문을 배우던 시절에는 한문에 토를 붙여서 읽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말로써 뜻을 풀어내는 언해가 차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두시언해>, <삼강행실언해>, <향약집성방언해>와 같은 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언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언해는 한문을 한국말로써 뜻을 풀어놓은 것으로서, 한문을 이모저모로 묻고 따지는 것은 아니었다. 퇴계는 언해에서 더 나아가 한국말로써 한문의 뜻을 이모저모로 묻고 따져서 <사서석의>와 <삼경석의>를 만들었다. 예컨대 퇴계는 <大學釋義>에서 格物致知에 나오는 ‘在格物’을 ‘物을 格함에 있느니라’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서, ‘物에 格함에 있느니라’로 풀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퇴계는 한국말로써 ‘物을 格함’과 ‘物에 格함’으로 나누어 따짐으로써 格物의 뜻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중국인의 경우에는 格物을 ‘物을 格함’과 ‘物에 格함’으로 나누어서 따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퇴계는 갖가지 토씨로써 문장의 갈래를 촘촘하게 나누어 말하는 한국말로써 묻고 따졌기 때문에 이런 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퇴계는 한국말을 밝게 살펴서 한문의 뜻을 이모저모로 묻고 따지고 푸는 과정에 한국말의 맛을 곱씹게 되었다. 예컨대 퇴계는 <孟子釋義>에서 ‘生之謂性’라는 구절을 한국말로써 묻고 따져서 “○生한 것을 일러 性이니라(生 거 닐온 性이니라). 이것은 옳지 않은 풀이다(非也) ○生함을 일러 性이니라(生홈을 닐온 性이니라). 이에서 ‘生함을 일러’는 마땅히 ‘生을 일러’로 말해야 한다.(當云 生을 닐온).”이라고 말하고 있다. 퇴계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말의 맛을 곱씹어서 ‘~한 것을’과 ‘~함을’과 ‘~을’이 어떠한 점에서 같고 다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계가 한국말로써 한문을 묻고 따지고 푸는 본을 보이자, 선비들이 이를 따라서 경전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 갖가지 이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圖說, 釋義, 附註, 箚義 등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성리학은 점점 중국의 성리학과 다른 빛깔과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셋째, 퇴계는 삶에 대한 뜻과 배움에 대한 자세를 언문으로써 <도산십이곡>을 지은 뒤에, 그렇게 한 까닭을 한문으로써 <陶山十二曲跋>을 써서 자세하게 밝혔다. 선비들이 한국말로써 시조나 가사를 짓는 일은 많았지만, 퇴계와 같은 뛰어난 학자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삶과 학문에 대한 생각을 언문으로 된 시에 담아 놓고, 그 까닭을 한문으로써 발문을 써서 밝히는 일은 없었다. 언문을 매우 가볍게 여기던 분위기 속에서 퇴계가 언문으로써 시를 짓고, 한문으로써 발문을 붙이는 일은 언문으로써 한문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로서, 크게 놀랄 일이었다. 퇴계도 이런 점을 걱정하여 “돌아보니 나의 자취가 자못 세속과 어그러짐이 있는데, 또한 이와 같이 한심한 일로 말미암아 혹시라도 시끄럽게 말썽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퇴계는 삶과 학문에 대한 생각의 핵심을 <도산십이곡>에 담아 놓았다. 퇴계는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을 넘어서,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노래로 풀어내고 있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을 빌어서, 거룩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거룩함이 무엇인지 묻고 따지고 푸는 <聖學十圖>보다도, 거룩한 삶을 어울림으로써 노래한 <도산십이곡>이 더욱 값지고 빛난다. 그런데 후학들이 간행한 <퇴계선생문집>에는 퇴계가 언문으로 쓴 <도산십이곡>은 실리지 않고, 한문으로 쓴 <도산십이곡발>만 실려 있다. 그들은 언문으로 쓰인 것을 값지고 빛난 것으로 여기기 어려웠다. 이러니 퇴계가 한국인으로서 한국말을 밝게 살펴서 한문을 깊이 묻고 따지고 풀던 일은 잘 드러날 수도 없었고, 또한 잘 이어질 수도 없었다.
5. 퇴계가 心으로써 마음을 밝힘
퇴계는 사람다움을 깨닫고 이루어,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퇴계는 사람다움을 깨닫고 이루는 일이 ‘어리석은 사람도 알아서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이면서, 聖人도 다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일인 까닭에 자기는 쉽고 어려운 가운데서 늙는 줄조차 모를 정도’라고 노래하였다. 퇴계가 사람다움을 깨닫고 이루기 위해서 힘을 쏟은 일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이었다. 퇴계는 마음에서 어떻게 좋음과 싫음, 기쁨과 슬픔, 어짊과 모짊 등에 대한 느낌과 앎, 생각과 뜻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그 까닭을 밝게 알아야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퇴계는 <心經>이라는 책을 마음을 밝히는 길잡이로 삼아서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기에, 스스로 ‘나는 <심경>을 神明처럼 믿고, 嚴父처럼 받들었다’고 말하였다. 퇴계가 마음을 밝히는 일은 心을 ‘마음-心’으로 새긴 바탕 위에서, 중국의 학자들이 밝혀 놓은 心에 기대어 갖가지 마음을 묻고 따지고 푸는 일로써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퇴계가 말하는 心에는 언제나 ‘마음’이라는 바탕이 깔려 있어서, 중국인이 말하는 心과 차이가 났다. 예컨대 중국인이 말하는 心은 ‘그냥 心으로서 心’인 반면에 퇴계가 말하는 心은 ‘마음에 담겨진 心’이었다. 이 때문에 퇴계가 말하는 心은 언제나 마음이 짖게 배어 있어서, 중국인이 말하는 心과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주자문집>과 <퇴계문집>에 나오는 心이 같은 글자라고 해서, 뜻까지 같다고 여긴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누구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인은 心을 ‘마음-心’으로 새기기 때문에 心과 마음을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心과 마음은 짜임과 쓰임에서 큰 차이가 있다. 퇴계가 말하는 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말에서 마음과 중국말에서 心이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촘촘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중국말에서 心은 心臟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이다. 心이라는 글자는 심장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중국인은 心臟에서 뜻과 생각이 비롯하는 것으로 보아서 心思, 心慮, 心想, 心靈과 같은 낱말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인이 심사, 심려, 심상, 심령과 같은 것이 心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설명하게 되자, 이들과 연관되어 있는 意, 識, 性情, 心靈, 神明, 精神, 魂, 魂靈 또한 心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성리학자들이 이런 일에 앞장을 섰는데, 그 가운데서도 주자가 가장 두드러졌다. 心이 심장, 심사, 심려, 심상, 의, 식, 성정, 심령, 신명, 정신, 혼, 혼령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 되자, 心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개념인 동시에 어느 하나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개념이 되고 말았다. 심장에서 심사가 비롯하는 것으로 풀이하게 됨으로써, 神明과 精神의 뿌리인 神經과 腦髓가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워져 ‘느끼는 나’, ‘생각하는 나’, ‘뜻하는 나’, ‘다스리는 나’, ‘나를 마주하는 나’를 나눌 수 있는 바탕이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심장과 심사를 하나로 묶게 되자, 身과 心의 분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心靈, 魂, 魂靈을 제대로 풀어낼 수 없게 되었다. 주자는 心을 바탕으로 感, 知, 性情, 理氣, 人心과 道心, 天理와 人欲, 四端과 七情을 깊이 묻고 따지는 반면에 意, 識, 神, 精神, 鬼神, 魂, 魂靈 등에 대해서는 대충 묻고 따지는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주자는 이러한 개념을 묻고 따질 때, 언제나 음양의 논리를 빌려서 이것과 저것을 느슨하게 아우르는 논리를 폈다. 주자는 心을 ‘나의 주재(一身之主宰)’라고 말하면서도 ‘주재하는 나’와 ‘주재당하는 나’의 관계를 분명하게 따져서 말하지 않았고, 心을 人心과 道心으로 나누면서도 人心(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人心(사람의 마음)과 道心(도의 마음)으로 나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따져서 말하지 않았고, 人欲과 天理를 나누면서도 人欲(사람의 욕심)이 어떻게 人欲(사람의 욕심)과 天理(하늘의 이치)로 나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따져서 말하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은 물론이고 베트남, 일본 등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주자를 공부했지만, 어느 누구도 주자가 말한 心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하기 어려웠다. 한편 한국말에서 마음은 ‘/’에서 비롯한 낱말로서 ‘다’와 뿌리를 함께 한다. ‘다’는 ‘어떤 것을 갈거나 부시어 작게 나누는 것’을 뜻한다. 이때 마음은 어떤 것을 낱낱의 부분들로 작게 나누어서, 그것을 부분들의 통합체로 보도록 하는 힘을 말한다. 마음은 전체를 낱낱의 부분들로 나누는 동시에 나누어진 낱낱의 부분들을 다시 전체로 묶는 일을 통해서 어떤 것을 느끼고 알게 된다. 마음은 전체를 바탕으로 삼아서 나누고 묶는 일을 하는 힘을 말한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나누는 일과 묶는 일을 모두 ‘다’에 바탕을 둔 ‘매다’로써 말한다. 예컨대 ‘김을 매다’에서 매는 것은 전체로부터 부분을 나누는 것을, ‘끈을 매다’에서 매는 것은 부분을 전체로서 묶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은 마음을 심장을 뜻하는 낱말로도 썼다. 심장은 피를 나누고 모으는 일을 통해서 온몸으로 피가 사무칠 수 있도록 한다. 사람은 심장이 온몸에 피를 사무칠 수 있게 함으로써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 한국인은 심장을 뜻하는 마음을 따로 심장이나 염통으로 부르게 되면서, 마음은 좋음과 싫음, 기쁨과 슬픔, 어짊과 모짊 등에 대한 느낌과 앎, 생각과 뜻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곳만을 뜻하게 되었다. 한국말에서 마음은 뜻과 쓰임에서 중국말의 心과 다른 점이 많다. 중국인이 心의 뜻을 풀어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인은 갖가지 방식으로 마음의 뜻을 풀어낸다. 한국인이 마음의 뜻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말에서 마음은 스스로 일어나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이때 마음은 스스로 일어나는 임자로서 자리한다. 한국인은 이러한 마음을 임자의 자리에 놓고서 ‘마음이 가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가볍다’ 등으로 뜻을 풀어낸다. 이때 마음은 ‘가는 것’, ‘아픈 것’, ‘가벼운 것’으로서 뜻을 지니게 된다. 한국인이 ‘마음이 ~다’와 같은 방식으로 마음의 뜻을 풀어내는 것은 얼추 여든 개가 넘는다. 그런데 중국인은 心을 스스로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쓰는 일이 적다. 중국인은 心을 주로 주어진 것에 반응하는 어떤 것으로 쓴다. 이 때문에 心에서는 마음이 갖고 있는 능동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둘째, 한국말에서 마음은 임자가 부리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이때 마음은 임자에게 부림을 당하는 대상으로서 자리한다. 한국인은 임자로서 마음을 대상의 자리에 놓고서 ‘마음을 쓰다’, ‘마음을 주다’, ‘마음을 알다’ 등으로 뜻을 풀어낸다. 이때 마음은 ‘쓰는 것’, ‘주는 것’, ‘아는 것’으로서 뜻을 지닌다. 한국인이 ‘마음을 ~다’로 마음의 뜻을 풀어내는 것은 얼추 예순 개가 넘는다. 그런데 중국인도 心을 임자가 부리는 어떤 것으로 말하지만, 한국인처럼 여러 가지로 말하지 않는다. 셋째, 한국말에서 마음은 어떤 것이 자리하는 곳집을 말한다. 한국인은 이러한 마음을 곳집으로 차려 놓고서 ‘마음에 있다’, ‘마음에 두다’, ‘마음에 들다’, ‘마음에 좋다’ 등으로 뜻을 풀어낸다. 이때 마음은 ‘~에 있는 것’, ‘~에 두는 것’, ‘~에 드는 것’, ‘~에 좋은 것’으로서 뜻을 지닌다. 한국인이 ‘마음에 ~다’로 마음의 뜻을 풀어내는 것은 얼추 스무 개가 넘는다. 그런데 중국인도 心을 어떤 것이 자리하는 곳집으로 말하지만, 한국인처럼 여러 가지로 말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일찍부터 마음이라는 낱말과 함께 중국에서 빌려온 心이라는 낱말을 아울러 써왔다. 한국인은 마음에 心까지 담아냄으로써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게 마음의 맛깔을 가꾸어 왔다. 한국인은 중국인이 말하는 心의 맛깔을 중국인과 비슷하게 맛보고 쓸 수 있지만, 중국인은 마음의 맛깔을 전혀 맛보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중국인이 心으로서는 맛볼 수 없는 맛까지 아울러 경험한다. 선비들이 마음을 밝히는 일에 크게 끌리게 된 것은 권근이 지은 <入學圖說>에 힘입은 바가 컸다. 권근은 <입학도설>에서 天, 人, 理, 氣, 心, 性, 情에 관한 논의를 <天人心性合一之圖>로 종합해 놓았는데, 뒷날 理氣, 心, 性情에 대한 시비가 일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정지운이 1553년에 권근의 <천인심성합일지도>를 바탕으로 理氣, 心, 性情의 상호 관계를 <天命圖說>로 지은 것을, 퇴계가 얻어 보고서 수정을 가함으로써 기대승이 퇴계에게 이발과 기발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불씨를 만들었다. 그런데 퇴계가 마음을 밝히는 일에 이끌려 이발과 기발, 사단과 칠정을 놓고서 여덟 살이나 어린 정지운과 주장을 겨루고, 스물여섯 살이나 어린 기대승과 시비를 다투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게 되자, 선비들 사이에 나이와 직위를 넘어서 더불어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퇴계는 자신의 생각을 <天命圖>, <天命圖說後敍>, <心統性情圖> 등으로 정리해나갔지만, 죽는 날까지 마음을 밝히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퇴계가 다른 선비들보다 유달리 마음을 밝히는 일에 이끌리게 된 것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퇴계는 한국말을 밝게 살펴서 한문을 묻고 따지고 푸는 과정에 마음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오묘한 맛에 빠져서 마음을 밝히는 일에 이끌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퇴계는 지배층이 권력을 놓고서 훈구와 사림으로 갈려서 살육을 되풀이하는 까닭을 풀어보고자, 마음을 밝히는 일에 이끌렸다고 볼 수 있다. 퇴계는 셋째 형인 이해(李瀣)가 대사헌 등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위해서 힘쓰다가 권신의 시기로 갑산으로 귀양을 가는 길에 갑자기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자신 또한 무오사화를 거치면서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퇴계는 선비들이 밤낮으로 공자와 맹자, 인의와 염치를 공부함에도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되풀이하는 까닭을 풀어야 했다. 퇴계는 욕심의 뿌리인 마음을 밝혀서 새롭게 윤리를 세워보고자 하였다. 퇴계가 理와 四端을 힘주어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가 조선의 사대부로서 풀어야 하는 문제들은 이러한 마음을 갖고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이었다. 퇴계는 중국인이 말하는 心을 알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갖고 있는 마음을 알고자 하였다. 퇴계는 마음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내는 길잡이로써 心을 붙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퇴계는 心으로써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에 心과 마음을 아울러서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고, 이로써 누구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었다. 퇴계가 四端과 七情을 理發과 氣發로 나누어서 ‘四端은 理가 발하고 氣가 따른다’, ‘七情은 氣가 발하고 理가 탄다’로 말한 것은 한국인이 마음을 풀어내는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한국인이 마음을 문장의 주어로 놓고서 ‘마음이 가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가볍다’ 등으로 말하는 것과 깊이 이어져 있다. 한국인은 마음이 스스로 가고, 아프고, 가벼운 임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한국인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 또한 스스로 나고, 아프고, 가벼운 임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겨서 ‘몸이 나다’, ‘몸이 아프다’, ‘몸이 가볍다’로 말한다. 한국인은 마음과 몸만이 아니고, 세상에 널려 있는 모든 것들이 임자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마음에서 四端이 발단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퇴계가 四端을 理가 발한 것으로 말하는 것 또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퇴계는 나중에 <주자어류>에서 주자 또한 이발과 기발을 나누어서 풀이한 구절을 찾아내고서,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퇴계가 心으로써 한국인이 바탕에 깔고서 살아가는 마음이 가진 맛을 풀어놓자, 모든 선비들이 너나없이 마음과 心을 풀이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선비들은 心으로써 마음을 풀어내면서도, 중국인이 말하는 心을 心으로써 풀어내는 것으로 여겼다. 선비들은 心에 빠져서 心性, 心情, 心思, 心慮, 心知 등에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국인의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늧, 느낌, 넋, 녀김, 생각, 앎, 뜻, 맛과 같은 것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이로써 心에 대해서 묻고 따지고 푸는 일과 마음을 밝혀서 갈고 닦는 일이 점점 다른 일이 되고 말았다.
6. 퇴계가 주자를 넘어서 나감
선비들이 주자를 배우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선비들이 주자를 따라 배우면서 주자의 생각에서 더하거나 뺄 것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주자를 따라가는 일에 머무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선비들이 주자를 따라 배우면서 주자의 생각에서 더하거나 뺄 것을 찾음으로써 주자가 하지 못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경우이다. 선비들이 주자가 하지 못한 일이나 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주자를 넘어서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주자를 넘어서 나가기 위해서는 주자학을 전체적으로 묻고 따질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했다. 주자학의 전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주자의 생각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자의 생각에서 더하거나 빼는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자를 넘어서는 일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거의 모두 주자를 따르는 일에 머물렀다. 선비들이 이렇게 된 것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 선비들은 외국말인 한문을 주자만큼 능숙하게 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선비들은 주자의 생각을 제대로 알고 배우는 일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둘째, 선비들은 주자가 갖가지 이론을 모아서 천하의 학문으로 집대성해 놓은 주자학을 전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선비들은 주자가 짜놓은 틀 속에서 관심이 닿는 부분만을 따지고 물었다. 셋째, 선비들은 주자가 학문에 쏟은 열정과 정성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선비들은 주자는 주자이고, 나는 나라는 생각에서 주자처럼 되는 일을 아예 남의 일로 여기는 일이 많았다. 퇴계는 주자를 따라 배웠지만 다른 선비들과 다르게, 주자를 넘어서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었다. 퇴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에서 그 까닭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퇴계는 주자처럼 공자나 맹자와 같은 이들을 좇아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바람은 퇴계가 학문에 온갖 힘을 기울이고 쏟도록 이끌었다. 그런데 퇴계는 주자와 달리 외국말인 한문으로써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한국말로써 한문을 배우고 쓰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퇴계는 한문으로 된 교과서의 뜻을 제대로 풀어내기 위해서 침식을 잊어가며 한문 공부에 열중하면서 몸과 마음에 고질을 얻을 정도였다. 퇴계는 공자나 맹자와 같은 이들이 보여준 본보기를 온전하게 따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퇴계는 옛사람들이 이룬 것에 뒷사람들이 이룬 것을 더하여 묻고 따지고 풀어냄으로써, 나중 사람의 장점을 크게 살릴 수 있었다. 퇴계는 옛사람이 하지 못한 것까지 새롭게 묻고 따지고 풀어냄으로써, 옛사람이 걸어가지 못한 길을 새롭게 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퇴계는 한국말을 밝게 살펴서 한문으로 된 경전을 풀이하는 과정에 중국인이 중국말로써는 하기 어려운 생각들을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새롭게 더하거나 뺄 것을 찾아내게 되었다. 선비들이 주자를 따라 배울 때, 한국말과 중국말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공부의 과정과 결과가 매우 달랐다. 선비들이 주자의 생각을 좇아서 德을 덕으로, 敬을 경으로, 賢을 현으로 푸는 경우에는 德, 敬, 賢에 대해 새롭게 묻고 따질 것이 없게 되어, 더하고 뺄 것 또한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선비들이 주자의 생각과 한국인의 생각을 아울러서 德을 큼으로, 敬을 고마로, 賢을 어짊으로 묻고 따지는 경우에는 德과 큼, 敬과 고마, 賢과 어짊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같음과 다름을 풀어내는 과정에 자연히 주자가 말하는 德, 敬, 賢에 더하고 뺄 것들이 생겨난다. 한국말은 중국말과 달라서 낱말과 낱말을 이어서 구절이나 문장을 만드는 법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한국인은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지만, 중국인은 도저히 이런 문장을 말할 수 없다. 중국말은 ‘~이면 ~이냐, ~이 ~다워야 ~이지’와 같은 맛깔을 담아낼 수 있는 접속 토씨가 없다. 이 때문에 한국인이 한국말로써 한문을 풀어내게 되면, 중국인이 생각하기 어려운 뜻을 새롭게 풀어내는 일이 벌어진다. 퇴계는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들로써 묻고 따지고 풀었기 때문에 중국인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렵거나 생각할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가게 되었고, 이로써 그는 스스로 새로운 길을 열어가게 되었다. 이런 경우에 퇴계는 주자라는 길잡이조차 남겨두고 가야 했다. 셋째, 퇴계는 한국문화에 중국문화를 담아서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한국문화와 중국문화를 함께 아울러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선비들이 주자를 따라 배울 때, 한국문화와 중국문화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길을 매우 달리하였다. 선비들이 주자의 편에 서서 세상을 中國과 邊邦, 中華와 夷狄, 中心과 周邊, 宗子와 衆子로 나누어보는 경우에는 오로지 주자를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더하거나 뺄 것이 생겨나지 않았다. 반대로 선비들이 중국과 한국을 함께 놓고서 중국이 중국인 점과 한국이 한국인 점을 아울러 바라보는 경우에는 주자가 말하는 것에서 더하거나 뺄 것이 생겨난다. 퇴계는 중국에서 가져온 유학에 기대어 다스리는 일을 구실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로서 일생을 살았다. 퇴계는 중국문화의 좋은 점을 한국문화에 담아서 더욱 나은 나라를 만드는 일로서 자신의 구실로 삼았고, 이 때문에 한국문화와 중국문화를 아우르는 일은 운명과도 같았다. 퇴계는 한국문화와 중국문화를 아우르는 일에 충실했기 때문에 두 문화를 아울러 볼 수 있는 높은 안목과 식견을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로 중국인이 가보지 못한 길을 갈 수 있었다. 퇴계는 공자나 안자와 같은 거룩한 사람이 되려는 뜨거운 바람을 바탕으로,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밝게 살펴서 주자의 생각을 깊이 묻고 따지고 풀었기 때문에 자연히 주자가 미처 하지 못한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주자의 생각에 더하고 빼는 일을 하게 되었다. 퇴계는 더하고 빼는 일을 통해서 자연히 주자를 넘어서 가게 되었다. 그런데 퇴계는 그렇게 하는 일을 주자를 넘어서 가는 일로써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자를 더욱 잘 따라 배우는 일로써 생각하였다. 한편 선비들은 한국말로써 중국말을 풀이하게 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다. 선비들은 한국말로써 중국말을 풀이하더라도 뜻에는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국말과 중국말은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옮기는 과정에 많은 차이가 생겨났다. 예컨대 선비들이 長이나 丈을 어른으로 옮기게 되면 뜻에서 큰 차이가 나게 된다. 중국말에서 長과 丈은 모두 나이가 많음에 바탕을 둔 낱말로서 長은 나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丈은 나이와 德이 높은 사람을 뜻한다. 반면에 한국말에서 어른은 자라서 짝을 이룬 사람으로서 이것과 저것을 스스로 어울러서 우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퇴계는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주자의 생각을 묻고 따지고 풀어냄으로써 주자를 넘어서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예컨대 퇴계가 <사사석의>에서 <중용>의 ‘率性之謂道’에 나오는 率性을 ‘性다이 率하는 것’으로 풀이한 것은 한국말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매우 하기 어려운 풀이이다. 퇴계는 率性에 대한 두 가지 풀이, 즉 ‘性率을(性을 率함을 일러 道라 하고)’로 푸는 것과 ‘性다이 率(性답게 率하는 것을 일러 道라 하고)’로 푸는 것을 말한 다음에, “이제 살피건대 두 설은 모두 옳다. 註에 朱子가 ‘率性은 사람이 率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또한 ‘이 率은 힘을 써서 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또한 ‘道를 행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니, 性다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비록 교묘한 것 같으나 실로 옳다.”라고 말하였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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