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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왜 퇴계 心學인가(한형조)-2011년 10월 강연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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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왜 퇴계 心學인가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 漢學 & 철학)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Meditations󰡕)

 

 

<차례>

1. (환기) 왜 인문학인가

2. (에피소드) 산사의 경험

3. (學問의 목표) “삶의 기술ars vitae”을 위하여

4. (강좌1, 유교의 의미) 20세기, 유교를 보는 ‘시각’의 4 단계

5. (강좌2, 유교의 마음 훈련) 퇴계가 남긴 매뉴얼, 󰡔성학십도(聖學十圖)󰡕

6. (마무리) 위기지학(爲己之學), “나 자신을 위한, 성숙의 연습”

 

 

1. (환기) 왜 인문학인가

 

고대 작가들에 대한 연구를 인문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우선 다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대학이란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장소만이 아니라, 삶의 신비와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포럼forum이고, 이런 탐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문학적 철학적 상상력을 지닌 위대한 저작들을 주의 깊게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가능하다."

(앤서니 크론먼, 󰡔교육의 종말 Education's End󰡕)

 

"하지만 배움과 앎의 쾌락은 비록 강렬하지는 않아도 여러 쾌락들 중, 가장 오래 지속된다. 또한 외적인 상황, 우연, 시간에 따른 마멸에 영향을 가장 덜 받는다. 그러므로 신중한 사람은 노후에 대비해 돈을 저축하듯, 삶의 종말에 대비해 지성의 양식도 쌓아두어야 한다. "한때는 쾌락이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고통으로 변해버리는 것들이 많다"는 소포클레스의 말처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상대적 가치는 변하기 마련이다. 강자(强者)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거나 욕망이 약해지게 되는 날, 그들은 "내 마음이야말로 내게 왕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A.E. 하우스만, 1892)

 

 

2. (에피소드) 산사의 경험

 

- 대학 초년의 경험. 갓 입학한 내게 학교는 너무 무기력해 보였다. 고인 연못 물같은 세월. 휴학계를 던지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흡사 길이 대학의 <바깥에> 있는 것 같았다. 배낭을 메고 산하를 헤메다가 들른 山寺에서 동양학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암자의 옆 방에는 주역과 점술을 공부하는 처사가 한 분 있었다. 내 방을 기웃거려 본 모양이다. "큰일났다, 학생이 사악한 기운에 씌었다." 놀란 주지가 달려왔고, 얘기를 듣고 나는 실소했다. 내 방에는 󰡔파우스트󰡕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악마와 영혼을 거래 운운" 하는 소리에 아마도 혼비백산한 것같다. ㅋㅋ.

 

- 그가 내 사주를 보아준 적이 있다. 금전운, 애정운, 권력운.. 등등을 읊어 내려가고 있는 사설을 중도에 끊고 내가 물었다. “어째 이야기가 그런 것뿐이오. 다른 ‘범주’는 없소?” 내 반문에 그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아니, 그것 말고 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오.”

 

- 나는 ‘삶’에 대해서 알고 싶었고, 거기 이르는 길을 찾고 있었다. 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를 묻는 이 질문은 희미하나, 사람을 붙들고 있는 가장 질긴 끈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묻는다. 보통은 잊고 산다. 대학은 이 관심에 응답하기를 접고, 교회에 전적으로 맡겨 놓았다. 대학은 학술연구에 올인하고 있고, 인문학 교수들조차 더 이상 ‘가치’를 문제삼지 않는다.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은 다양성과 다문화주의를 외치면서 가치를 언급하기를 꺼린다. ‘가치’는 권력의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 그리이스 로마의 현자들과 더불어, 동양의 지혜는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하고, 거기 ‘응답’한다. 그리하여 철학philosophy'라는 이름에 걸맞게, ‘삶의 기술ars vitae’를 위한 노하우를 가르친다.

이 기술을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Humanities’이고, 그 매뉴얼을 ‘고전Classics’이라 부른다.

 

 

3. (學問의 목표) “삶의 기술ars vitae”을 위하여

 

20세기 외부 지식의 폭발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늘지 않고, 오히려 축소되었다면 지나칠까. 동양학의 근본 주제는 이 지식을 향해 있다. 그래서 心學이라 부른다.

평소에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이 “知識”에 대해 들려드리고자 한다. 無用之用, 그것은 기실 “가장 중요한 지식”이다. 왜냐? “인간이 되기 위한 지식”이고,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르되,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랴?”

 

그동안 탐구한 이 ‘기술’의 핵심 팁을 들려드리고자 한다.

 

동양의 소스는 유교와 노장, 그리고 불교이다. 그것들은 전혀 낡지 않았다. 어느 현자는 말한다. “진리는 오래된 것이다. 다만 오류만이 새롭다!”

 

* ‘인간의 전문가’들의 권위. 몸에 병이 나면 의사를 찾고, 자동차는 정비소로 간다. 만일 ‘사람’이 병들었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그 중에서도 유교 心學의 기술, 혹은 지식을 짚어드리고자 한다. 현대 기술의 반성 시대, 그리고 포스트 모던 시대에 떠오른 기술은 노장의 환경-생태와, 불교의 ‘마음’이었다. 유교는 이 ‘대안’의 선택에서 제외되었는데, 이 대접은 매우 부당하다.

 

이유는 대체로 유교를 그 외면적 <형식>과 <정치적 권위주의>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작 문제는 우리가 “유교”를 모른다는데 있다. 유교는 잊혀졌다. 심지어, 유림과 학자들로부터도...

 

유교의 근본은 心學이다. 즉 핵심은 1) 유교적 가치와 2) 삶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3) 내면적 훈련이 그것이다. 이 ‘유교적 자원’이 조직을 경영하고 사회를 운영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4. (강좌1, 유교의 의미) 20세기, 유교를 보는 ‘시각’의 4 단계

 

그동안 ‘유교’는 객관적 사태에 속한 것이기 보다, 그것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그 ‘눈’을 한번 추적해 보자. 20세기 유교를 보는 시각에 네 단계를 거쳐 왔다.

 

 

*1단계, 부정: 망국의 회한 (한말-1930년, 식민시대 초기)

 

- 20세기 한국은 유교를 버렸고, 지워나갔다. 이 삭제는 전면적이고 철저했다. 왜? 제국열강의 각축기, 유교가 자주와 독립을 지키는데 ‘실패’했고, 그리고 이은 근대화에도 ‘장애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의 절망>

 

“書憤,” 즉 “내 분함을 여기 적는다”는 제목의 시.

 

浮虛之自六經開 자다 깬 허황한 소리, 六經에서 시작했지

快付秦家一炬灰 진시황이 시원하게 불을 잘도 싸질렀다

却恨當時燒未盡 아깝다, 그때 몽땅 다 태우지 못하고

漢庭猶有伏生來 漢 나라에 복생이란 자가 왜 또 나타나느냐 말이다.

 

그는 망국의 죄를 2000년 전의 애꿎은 진시황에게까지 돌려 원망하고 있다. 유교에 절망한 그는 상고사에서 위안을 찾다가, 결국 아나키즘으로 망명했다.

 

述懷2

 

鷄狗於人本無罪 닭이나 개가 무슨 죄를 지었겠나

只爲口腹日殺之 다만 사람들의 고픈 배를 위해 날마다 죽어나가는게지

惟有强權而已矣 여기는 다만 힘과 권력이 말하는 세상

空言仁義欲何爲 공허히 仁義를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席門談道眞适士 거적대기 깔아놓고 道를 논하는 저 우활한 선비 보소

手劒斬人是快兒 칼을 휘둘러 사람을 벨 줄 알아야, 진정 사내이지

云云聖哲果何者 聖王과 哲人을 운운해서 뭘 어떡하자는 건가

高標二字謾相欺 두 글자 높이 걸고 서로 속이면서 사는 사람들...

 

단재의 이 시각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난 이후에도 한 세기를 풍미했다. 그것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유교를 보는 <주류의> 시선이다.

 

 

*2단계, 변명: '實學'에 위안을 찾다. (1930-1980)

 

망국과 식민지, 터졌던 울분이 가시고 나자, 이윽고 성찰의 시간이 도래했다.

 

<조선학의 발흥>

 

- 1930년대에 근대적 한국학의 시작이라고 할 ‘朝鮮學’의 발흥: 계기는 여럿이다. 무엇보다 1) 이른바 內鮮一體의 억압에, 2) 점차 ‘모던modern’해지는 근대 문명에 조선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3) 자주와 독립의 의지가 물 건너가겠구나라는 우려가 절박했다.

 

鄭寅普(1893-?), 安在鴻이 주도하여 '실학'을 천양하고, ‘조선 후기' 개혁적 지식인 들'과 그들의 '사상'을 발굴해 나갔다.

 

<실학의 창도 = 근대화의 자생적 노력 특필>

 

- 실학은 단재 류의 ‘부정’ 일변도에 동의하지 않고, 조선 후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상적 제도적 개혁을 특필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自主의 희망을 전파하고자 했다.

 

요약하면, “조선은 암흑의 시대가 아니다. 조선 후기 일단의 지식인 관료들이 新我舊邦, 즉 고식과 비효율, 경직된 조선의 유교문화를 혁신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 노력이 우호적 여건을 만났다면 자주적 개화와 근대화가 가능했다.”

 

해방이 된 후에도, 실학은 조선시대 연구의 중심 화두!였다. 조선 후기 개혁적 성향의 인물들이 속속 발굴되고, 그들이 제안한 여러 제도적 구상들, 그리고 사상적 전환들이 발굴되고 소개되었다.

 

*3단계, 전환: 유교적 근대화론Confucian modernism (1980-1997)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약진에 놀라다. 서구의 학자들은 그 동인을 유교에서 찾았다. "유교를 통해서도 근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화는 한 길 만 있는 것이 아니다(multiple modernities).

이리하여 유교는 망국의 주범에서 졸지에 ‘아시아의 네 용’을 떠받치는 문화적 사상적 토대로 승격했다.

 

근대화에 끼친 유교의 공적을 말할 때 ‘교육의 열정’과 ‘지식의 개방성’, 그리고 ‘공동체적 심성’을 든다.

 

이때 유교는 최초로, ‘자체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한 세기의 설움을 조금 씼었다고 할까. 이때까지 實學은 역사의 빅브라더로서 행세해 왔는데, 그것은 언제나 ‘유교를 넘어서는 곳에서’ 아이덴티티를 확보해 왔다. 다산에게서 전형적인 대로 실학은 늘 ‘반 주자학적’ 경향, 서구의 과학과 지식의 도입을 동반하고 다니지 않았던가.

 

유교적 근대화론은 이어 닥친 IMF의 경제위기, 그리고 내부적으로 강고한 유교문화의 폐해로 하여 “국내에서는 시민적 설득력을 얻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근대화의 성공”과, 이은 “민주화의 자신감”은 유교를 보는 태도에 드러나지 않은, 그러나 중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근대화의 컴플렉스가 사라짐으로써, ‘좌절’과 ‘위로’의 트라우마가 사라졌다면 지나칠까. 하여 유교를 “있는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바라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4단계, 컨텐츠: 百花하는 전통의 자원들 (1990-현재)

 

전통에 대한 ‘정보’와 컨텐츠에 대한 수요가 팽창. -> 그동안 실학의 빛에 눌려 그늘져 있던 분야의 연구와 정보들이 폭발적 플래쉬 세례를 받고 있다.

 

 

*문화컨텐츠

 

가령, ‘생활’에 대한 풍부한 정보들. 복식과 음식, 수사와 형벌, 놀이와 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는 ‘실학’ 시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歡言自酒家 이 화상, 지금 술 한잔뿐이 안 마셨다고 둘러대고 있지만

儂言自娼家 틀림없어, 룸살롱에 갔다 온거야

如何汗衫上 아니라면 어째서, 내 루즈 자국이

儂脂染作花 당신 와이셔츠 흰 칼라 위에 빨갛게 번져 있지

 

*바람난 남편을 둔 어느 주부의 애환을 표현. 작자 文無子 李鈺(1760-1813)인은 어엿한 남자, 사대부이다. 그는 답답한 예교의 형식주의, 상투주의로는 삶의 구체적 실감과 정서를 드러내고자 애썼다. (그러다가 정조로부터 과거시험 자격박탈의 벌을 받았다.)

 

또,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일어난 한류 붐을 보자. 그 안에 담긴 전통적 컨텐츠와 유교적 사고의 코드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국이 문화를 수출하게 된 것, 그것은 5000년래의 일대 사건이다.)

 

*대만대 역사학과 우짠량(吳展良) 교수와의 대화. “기이한 인간들이 기이하게 행동하는 것에 질려 TV를 보지 않은지 오래다. 그런데 한국이 왔다. 감정과 정서가 살아있고 관계를 중시한다. 그리고 건전한 정의로운 결말을 갖고 있고, 요컨대 ‘인간성(humanity)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류의 중심에 바로 ’유교가 있다.‘ 정작 너희 한국인들은 그 점을 모르고 있는 것같다.”

 

*상품 개발과 디자인

 

기업은 글로벌 경쟁에서 정체성 있는 상품개발과 디자인을 요구하고 있다. 전통의 문양과 색감, 복고적 재질과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산업 응용이 연구를 자극하고 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仁寺洞의 골동이나, 차, 그리고 옷과 노리개를 찾고, 전통의 음식을 찾아 즐기면서 한국을 느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인의 사고방식

 

보이는 유교는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유교는 아직도 있다.

 

의회제도와 정당정치, 그리고 법률의 운용: 100년 너머의 근대적 제도의 수입정착에도 불구하고 거기 ‘한국적’ 성격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기형’, 혹은 ‘불합리’로 보이게 한다. -> ‘의식과 사고의 관성을 고려해서 '한국적' 정치와 법률 장치의 개발이 필요하지 않을까?

 

기업환경과 기업문화: 포드 식의 분업과 잭 웰치 류의 능률주의가 ‘합리적’이긴 하지만,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矯角殺牛의 우려, 혹은 買櫝還珠의 어리석음으로 귀착될 수도 있다. 기업인들, Ceo들의 인문학 강좌에 열성이고, 또 유교 강좌도 늘고 있다.

 

지금 출범하려는 <유교와 경영>도 이 ‘실용적 유학(有用之學)’을 향한 발굴과 모색, 가치화의 작업이다.

 

*의미와 가치

 

위와 연관하여, 한국인들은 100년의 서구적 가치, 이를테면 과학적 사고에 입각한 능률과 효율 등의 구호에 마지못해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내심 매우 불편해 온 것도 사실이다. “과연 이제 무엇이 아시아인의 ‘심금(心琴)’을 울릴 것인가.” 이즈음, 근대적 가치와 개발에 대한 폐해가 커지고, 생태와 환경 등이 새롭게 화두로 떠올랐다.

 

- 포스트-모던Post-Modernism의 등장: 포스트-모던 시대는 '실학'의 변명이나 위로가 아니라, "유교 바로 그것"에, 구체적으로 주자학적 기획의 가치에 대해 100년 이래 정면에서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이다.

이제, 미래다. “전통을 ‘도구’로 이용하고, ‘다양하게’ 접근하자”

 

21세기, 역사에서 ‘구원’을 생각하는 시절이 가고, 이제는 ‘유희’로서, ‘도구’로서 전통과 유교를 인식하고 이용할 수 있는 시절이 도래했다.

 

지금 서점가에는 바로 그런 책들이 장안의 지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조선의 뒷골목의 건달들, 소외받은 기생들, 자기고집으로 똘똘뭉친 아웃사이더들, 경전 한 권을 수억번이나 읽었다는 반쯤 미친 사람들, 저 구석의 시시한 일상 간찰들, 왕실의 의궤와 독특한 혼례 절차들, 음풍농월이라 하여 비난받던 한가한 자연시들, 독특한 사물 인식과 분류, 그리고 미신과 災異들, 그리고 국왕의 리더십과 관료들의 정치과정과 노하우, 그리고 士林들의 사회정치적 의사소통 방식까지...

 

 

 

5. (강좌2, 유교의 마음 훈련) 퇴계가 남긴 매뉴얼, 󰡔성학십도(聖學十圖)󰡕

 

 

- 68세의 퇴계는 한사코 물러나면서 聖學의 간절한 기대를 담아 선조에게 󰡔聖學十圖󰡕를 올렸다.

- 󰡔성학십도󰡕는 퇴계의 저작 아닌 저작이다. 주자학 속의 수많은 언설과 주변적 논변을 다 떨어내고 핵심만을 남겨놓은, 주자학의 문법이자 설계도이다.

 

유교 공부법, 마음의 훈련은 “자신의 좁은 감옥을 벗어나는 연습”이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희생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공동체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길이다. 그래서 유교는 스스로를 “자신을 위한 학문- 爲己之學”이라 부른다.

 

이 훈련을 꿰고 있는 중심이 ‘敬’이다. 이것은 안으로는 1)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자, 밖으로는 2) “사물과 사람에 대한 공경”을 포괄하고 있는 말이다.

 

퇴계 평생 학문의 온축은 그의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열 폭의 그림으로 압축되어 있다. 유교의 기획 혹은 설계도라고 할 만하다. 읽기는 쉽지 않다. 그 암호 가운데 마지막 그림 2장을 소개한다.

 

 

*(노트) 천진암의 講學, 유교냐 카톨릭이냐

 

다산 정약용은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서 1779년 천진암 走魚寺 강학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옛적 기해(1779)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講學했는데, 눈 속에 이벽이 밤에 도착하여, 촛불을 돋우어가며 경전을 담론했다.”

 

이 기록만으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주제로 어떤 토론을 했는지가 분명치 않다. 다산은 이때의 일에 대해서 「先仲氏 墓誌銘」에서 구체적인 얘기를 해 주고 있다.

 

“형님은 녹암의 문하에 집지하여 가르침을 구했다. 일찍이 겨울, 走魚寺에서 寓居하며 講學한 적이 있는데, 모인 사람이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여럿이었다. 녹암 자신이 규정과 일과를 정해, 새벽에 일어나면 찬물을 떠 양치 세수하고, 1) 夙夜箴을 읊었으며, 해가 뜨면 2) 敬齋箴을, 정오에는 3) 四勿箴을, 그리고 해가 지면 4) 西銘을 읊었다. 엄격하고 진지하게 법도를 지켰다. 이 당시 이승훈도 스스로 면려하는 때라, 西郊로 나가 심수를 賓으로 삼고 鄕射禮를 행하자, 모인 사람 백여명이 모두 왈, ‘三代의 문화가 다시 찬란하게 빛난다’라고 했다.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많았다.”

 

자료는 이것뿐이다. 문면 그대로 보아서는 모임의 성격이 어디까지나 '주자학적 講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측에서는 위에 등장하는 이벽과 이승훈의 이름에 기대, 위의 강학회가 카톨릭의 일과에 따른 수련과 미사 등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講學은 늘 하는 일과이자 공부였다. 講學은 함께 모여, 혹은 스승의 지도하에 특정한 전적을 암송하고, 그것을 토론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기에, 형식적으로는 카톨릭의 일과와 유사성이 있다.

 

과연 이 강학회는 주자학적이었을까, 카톨릭적이었을까. 둘은 소문처럼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일까. 다르다면 정말 어디가 다른 것일까.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둘은 혹 겹치는 것은 아닐까. 유교와 카톨릭의 같고 다름, 만나고 헤어지는 자리는 '정말' 어디인가.

 

새벽에 읽었다는 「숙야잠」은 퇴계 󰡔성학십도󰡕의 10장이고, 해뜨면 읽었다는 「경재잠」은 제9장이고, 해 지면 읽은 「서명」은 제 2장이다. 정오에 읽었다는 「사물잠」도 퇴계 평생의 반려인 󰡔心經󰡕 속에 들어있는 경계요 다짐으로, 지금 도산서원의 典敎堂에 걸려 있다.

 

 

유교 心學의 매뉴얼이 왜 카톨릭의 수련으로 치환된 것일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 9 경재잠과 10 숙흥야매잠을 소개해 드리기로 한다.

 

 

*제 9 敬齋箴圖 - 마음의 자각과 주시에 대하여

 

心學의 알파요 오메가는 敬이다. 이 말은 원래 敬天 敬人 등에서처럼 ‘대상’을 갖고 있었지만, 주자학이 목적어를 지움으로써, ‘자기 마음의 존중’을 의미하게 되었다. 존중의 핵심은 ‘자각’과 ‘성찰’에 있다.

 

이 그림은 敬, 즉 “마음의 자각과 지속적 성찰”의 훈련에 대해서 적고 있다. 이 훈련이 마음의 평정에서, 일을 처리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양성해 줄 것이다.

 

 

「경재잠도」

 

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足容必重, 手容必恭, 擇地而蹈, 折旋蟻封. 出門如賓, 承事如祭, 戰戰兢兢, 岡敢或易. 守口如甁, 防意如城, 洞洞屬屬, 岡敢或輕. 不東以西, 不南以北, 當事而存, 靡他其適. 弗貳以二, 弗參以三, 惟心惟一, 萬變是監. 從事於斯, 是曰持敬, 動靜弗違, 表裏交正. 須臾有間, 私欲萬端, 不火而熱, 不氷而寒. 毫釐有差, 天壤易處, 三綱旣淪, 九法亦斁. 於乎小子, 念哉敬哉, 墨卿司戒, 敢告靈臺.

 

(*번역)

내 衣冠을 바르게 하고, 내 시선은 경건하게 둔다. 마음은 흐트러짐 없이, 흡사 上帝와 대면하듯 한다. 발걸음은 진중하게 내딛고, 손은 다소곳하게 잡는다. 디딜 곳을 골라서 밟고, 처신할 때는 개미집 사이를 헤쳐나가듯 하리라. 집을 나서면 사람들을 손님처럼 대하고, 일을 받들 때는 제사를 모시듯이 정성을 쏟는다. 戰戰兢兢(조심스럽고 두렵게),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내 뚫린 입은 병마개로 틀어막고, 내 충동의 발호는 성벽처럼 견고하게 지킨다. 洞洞屬屬(진실하고 경건하게), 어느 것 하나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쪽으로 갈 때는 서쪽을 돌아보지 않고, 북쪽으로 갈 때는 남쪽은 덮어둔다. 지금 내 앞의 일에 집중할 뿐, 다른 생각에 흔들리지 않는다. 두 갈래 마음에 분열되지 않고, 세 갈래 상념에 어지럽지 않는다. 내 마음 오직 <하나>이기에, 수많은 변화를 장악해 나간다. 이 원리에 투철한 것, 그것을 <敬의 유지(持敬)>라 한다. 움직일 때나 멈출 때나 敬을 벗어나지 않으면, 내 안과 밖이 서로를 도와 완전해 지리라. 그러나, <한 순간이라도> 敬을 놓치면, 私欲이 萬端으로 일어나, 불이 없어도 (내 마음이) 뜨겁고, 얼음이 없어도 (내 몸이) 얼어붙는다. 또 <작은 일이라도> 敬이 어긋나면,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고 만다. 그때 三綱은 무너지고, 九法 또한 쓸려나갈 것이니, 아흐, 아이야, 이를 잊지 말고 깊이 새겨야 하느니...내, 이를 검은 글자로 새겨, 내 <마음>에 고해 두나이다.

 

 

*제 10 夙興夜寐箴 - 선비들의 공부, 그 일과표

 

제 9 「경재잠」이 경을 수련해야 할 다양한 <필드>를 보여주고 있다면, 지금 이 夙興夜寐箴은 선비의 <일과>에서 지켜야 할 敬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즉 선비가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夙興夜寐)” 지녀야할 태도를 시간대별로 적은 것.

 

夙興夜寐箴」

 

鷄鳴而寤思慮漸馳, 盍於其間澹以整之, 或省舊愆或紬新得, 次第條理瞭然黙識, 本旣立矣昧爽乃興, 盥櫛衣冠端坐斂形, 提掇此心皦如出日, 嚴肅整齊虛明靜一, 乃啓方冊對越聖賢, 夫子在坐顔曾後先, 聖師所言親切敬廳, 弟子問辨反覆參訂, 事至斯應則驗于爲, 明命赫然常目在之, 事應旣巳我則如故, 方寸湛然凝神息慮, 動靜循環惟心是監, 靜存動察勿貳勿參, 讀書之餘間以游詠, 發舒精神休養情性, 日暮人倦昏氣易乘, 齋莊整齊振拔靜明, 夜久斯寢齊手斂足, 不作思惟心神歸宿, 養以夜氣貞則復元, 念玆在玆日夕乾乾.

 

(*번역)

닭이 울고 잠에서 깨어나면, 상념이 점점 치달린다. 어찌 그 사이에 마음을 차분히 정돈하지 않으랴. 때로는 지난 허물을 반성하고, 때로는 새로 깨달은 것을 음미한다. 순서에 따라, 조리에 따라 마음 속에 새겨 본다.

이렇게 근본이 선 다음에, 동틀 무렵 일어난다.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자세를 곧추세운다. 이 마음을 다잡으니 환하기가 떠오르는 해같다. 엄숙하고, 단정하게, 그리고 밝고도 고요하게...

이에 서책을 열어 聖賢과 대면한다. 공자께서 앉아계신 듯, 제자들이 둘러선 듯. 聖師의 말씀을 절실하게 경청하고, 제자들의 질의를 되풀이 참고한다.

일이 닥치면 일에 응하여, 배운 것을 증거한다. 天命의 환한 뜻이 언제나 눈앞에 닥쳐 있다. 일을 마치고 나면, 나는 다시 옛 적 그대로라. 마음은 연못처럼 투명하고 고요하다.

나아갔다 돌아오는 끝없는 순환에도, 이 마음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음이야. 고요할 때에는 본바탕을 지키고, 움직일 때에는 혹시 싶어 살펴보아, 네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찢어지게 하지 마라.

讀書하는 나머지에 간간이 游詠하고, 精神을 릴랙스하고, 情性을 休養하라. 하루해가 넘어갈 쯤이면, 피곤이 밀려오고 昏氣가 타기 쉽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정신의 빛을 다시 떨치라.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 때는 손발을 가지런히, 생각은 그만 그쳐, 정신에 휴식을 준다. 한밤 중 신선한 기운이 너를 다시 채울지니, “다하고 나면, 다시 새로와진다”하지 않더냐.

이를 늘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 날마다 달마다 꿋꿋하게 나아가라.

 

 

 

6. (마무리) “나 자신을 위해 살자”

 

 

*삶에 의미가 있는가

 

- 모든 사람의 욕망을 무한충족시켜주겠다는 근대의 ‘위대한 기획 혹은 약속The Great Promise’은 실현될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그 ‘세계’가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왜냐? 모든 욕망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현자들은 인간이 특정한 목적과 본성을 갖고 있으며, 이 본성에 따라 그의 에너지를 유도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심신의 건강과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리주의나 쾌락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더불어 동의하고 있는 인간의 충동과 그 실현에 대한 무제한의 허용과 약속과는 전혀 다른 이념적 지형이다.

 

- 유교의 표준구locus classicus: “인간의 내적 본성은 미리 규정되어 있다. 그 본성을 구현하는 길을 道라 한다. 훈련과 교육은 이 道를 닦기 위한 것이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나를 위한 학문,” 爲己之學

 

- 덕성 자체가 至福이다. 군자는 “인(仁)이 바로 자신의 존재이며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구현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실현은 오로지 전적으로 ‘나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타인과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그가 추구하는 것이 재산이나 명예, 부 등의 경쟁적 가치라면 원망과 불평이 없을 수 없지만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불평할 대상이 없다.

 

이것은 ‘영웅적 기획’이다. 삶을 둘러싼 외면적 영향력을 궁극적으로 무화시키고 내면성의 자발성에 전적인 힘과 책임을 부여한 철저한 개인주의의 기획이다.

 

『중용』은 말한다.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을 사양할 수도 있고, 흰 칼날을 맨발로 밟기는 쉬워도 중용을 지키기는 정말 어렵다.”

 

 

*忠恕,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진정 남을 위할 줄 안다

 

‘자신을 위해 살자.’ 모든 문제는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자신을 위해 살 때 세상이 달라 보이고, 관계의 문법이 전면적 변화를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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