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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국왕, 영조의 리더십(신병주)-2011년 11월 강연
- 등록일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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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수 국왕, 영조의 리더십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1. 영조의 즉위와 탕평책(蕩平策).
1) 영조의 출생.
영조는 우리나라 역대 국왕 중에서 최장수 집권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균역법, 탕평책 등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치세 52년간은 조선후기 정치․문화의 부흥기였다. 영조는 1694년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 숙빈 최씨 사이에서 숙종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무수리’란 원래 몽고의 궁중어인 ‘궁중에서 일하는 소녀’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궁중에서 허드렛일에 종사하던 어린 계집종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국어로는 수사(水賜) 또는 수사이(水賜伊)라 하고 그녀들이 거주하는 곳을 수사간(水賜間)이라 하였는데, 우리나라에는 몽고와 교유하던 고려후기에 전래되어 조선시대에는 완전히 궁중의 청소일을 맡은 어린 여자종을 뜻하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무수리는 처음에는 당번의 형식으로 교대로 궁중에 출입하였으나, 태종 때부터 궁중의 소식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궁내에 상주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영조의 생모는 7세에 궁중에 들어가 허드렛일 맡은 무수리에서 궁중생활을 출발할 만큼 신분이 미천한 인물이었으나, 우연히 국왕인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의 위치에 오름으로써 일약 신데렐라로 떠오른 여인이었다. 무엇보다 최씨가 숙종의 눈에 띈 것은 그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가 20세로 요절한 후, 생전의 중전을 기려 때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최나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되어 정이 끌렸던 숙종은 그녀를 후궁으로 맞아 1694년 마침내 왕자인 연잉군(후의 영조)를 낳기에 이르렀다. 영조는 이처럼 숙종과 최나인의 드라마틱한 결합으로 탄생하였지만, 출생의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나 52년간 왕위를 지키면서 조선시대 최장수 국왕으로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영조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싶은 마음에서 육상궁(毓祥宮)을 지었다. 육상궁은 칠궁(七宮)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숙빈 최씨의 경우와 같이 정비(正妃)가 아니면서도 임금을 낳아 궁호(宮號)를 받은 6개의 궁묘를 모두 이곳으로 합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 가운데는 최숙빈을 박해했던 장희빈의 신위가 최씨와 나란히 모셔져 있는 것도 흥미롭다(자료사진:서울 지도 중 육상궁 위치). 또한 영조는 1753년 죽은 어머니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무덤을 원(園)으로 승격시켰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소령원(昭寧園)은 바로 숙빈 최씨의 무덤으로(자료 사진), 영조는 무덤의 묘지를 직접 쓰면서 어머니를 추숭했다.
2) 뼈저린 당쟁의 경험과 탕평책
영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간에 벌어진 당쟁의 대립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경험이 있는 등 누구보다도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인식한 국왕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입지와 함께 어머니가 신분이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점은 영조의 정책 추진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영조가 신분이나 당색 보다는 능력을 우선한 ‘탕평책’을 적극 추진한 것에는 자신이 안고 있었던 ‘신분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도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숙종 사후 왕위계승의 폭풍에 휘말렸다. 영조는 1721년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왕세제로 책봉되었으나, 1721년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이 소론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국왕으로 즉위한 후 영조를 지지했던 노론 인사들이 대거 처형되면서 그의 위치 또한 불안정해졌다. 특히 영조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노론 4대신’으로 불렸던 김창집, 이이명, 조태구, 조태채의 죽음은 이후의 정국에 파란을 몰고 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노론의 지원을 얻은 영조가 1724년 경종의 뒤를 이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노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영조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처럼 영조는 즉위 과정에서 붕당의 폐해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으로 제거될 뻔한 위기를 수없이 겪었기에 즉위 이후 무엇보다 붕당간의 탕평을 강조했다. 탕평은 원래 유교 경전인 서경의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무편무당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서 그 연원은 무척 오래된 것이다. 탕평책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먼저 영조는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였다. 노론측의 강경파인 준로(峻老)와 소론측의 강경파인(峻少)를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론(緩老)과 완소(緩少)를 중용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호흡을 맞추어 일할 소위 탕평파 대신들을 정국의 일선에 포진시켰다. 송인명, 조문명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 대신들로서, 소위 영조와 코드가 맞는 인물들이었다. 탕평책을 바탕으로 영조는 초당적 정치운용으로 왕권의 강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영조는 당쟁의 여파로 국왕에 올랐지만 누구보다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국정의 기본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는 탕평정치로 잡았던 것이다. 사실 탕평에 대한 논의는 숙종대 후반 박세채 등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경종 연간에도 조문명이 지도한 소론 온건파는 왕세제인 영조를 보좌하면서 탕평정치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특히 영조를 가르친 박세채의 제자 이진망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영조에게 각 당파 안에 온건파인 완론을 키우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인사탕평책을 우선적으로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영조는 자신의 당쟁에 대한 경험과 함께 탕평파 대신들의 보좌를 받았기에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1727년 탕평교서를 반포하고, 1742년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한 것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현재 성균관 대학교 구내에 남아있는 탕평비에는 ‘주이불비 군자지공심(周而不比 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소인지사의(比而不周 小人之私意)’이라 하여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지음은 소인의 사심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탕평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조의 이러한 탕평책은 1728년 소론과 남인 급진파가 일으킨 1728년의 무신란으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영조의 탕평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영조연간에 각 정파 중 완론 중심의 탕평당이 정국을 주도해 나간 것도 영조의 정치적 의지와 무관하지가 않다.
탕평책의 추진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한 영조는 각종 문화, 학술사업과 경제개혁에도 온 힘을 쏟았다. 1750년에는 백성들의 여론을 직접 수렴하여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에게 최고의 부담으로 다가왔던 군역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지리지인 여지도서와 지도인 해동지도, 수도방위체제를 정리한 수성윤음을 비롯하여, 속오례의, 속대전, 속병장도설 등 속편 시리즈가 쏙쏙 편찬, 간행되어 조선후기 학술, 문화운동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외에도 영조는 당쟁의 온상이 되고 있는 서원의 정리 사업과, 신문고 제도의 부활, 고문과 남형(濫刑)을 금지하는 형벌제도 개선을 추진하였다. 영조대의 이러한 정치, 경제, 문화 사업의 성과의 바탕에는 탕평책이라는 정치적 안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2. 서민군주 영조와 균역법의 실시(1750년)
1) 무명옷을 입은 국왕, 영조
영조는 조선시대 어느 왕보다도 서민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18세에서 28세까지는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생활한 경험도 한 몫을 했다.영조는 추운 겨울에도 비단이 아닌 무명옷을 즐겨 입었고, 초식 위주의 초라한 수랏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영조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건강한 것은 무명옷에 초식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실제 영조는 83세까지 살아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고로 장수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8세 정도임을 감안할 때 영조의 장수는 파격적인 것이다. 영조의 서민 군주의 면모는 정책으로도 연결되었다. 1749년 국혼정례를 정해 혼인에서의 사치를 막고, 1752년 탁지정례를 제정하여 국가 재정의 절약을 꾀하였다. 이외에 가체(가체) 금지령을 내려 여인들의 가체에 머리 장식을 하는 풍조를 엄금하여 사치와 낭비를 방지하는데 주력하였다. 영조는 자신이 66세 되던 해 계비인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를 맞이한 혼례식에서 거듭 사치의 방지를 강조하였다. 영조와 정순왕후 혼례식의 전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는 결혼식에서의 사치를 방지하려는 영조의 의지가 곳곳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왕실에서 먼저 모범을 보여 민간에도 전파시키려는 의도가 컸다. 서민군주임을 자처한 영조는 백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들을 추진해 나갔다. 당쟁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고 태종대에 설치되었다고 별로 실효를 보지 못했던 신문고를 부활한 것도 백성을 위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성을 위한 영조의 의지는 군역에 대한 부담을 시정한 균역법의 실시에서 가장 큰 빛을 발하게 된다.
2) 균역법 실시의 배경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은 크게 전세와 공납, 군포였다. 공납의 문제는 17세기 대동법의 실시로 어느 정도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해결이 되었느나, 군역의 의무를 복무하는 대신에 백성들이 세금으로 납부하는 군포의 부담은 17세기 이후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영조는 군역의 부담으로 납부하는 군포의 경감이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해결해주는 것임을 인식하였다. 영조가 탕평책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룬 이후 군역의 문제에 눈을 돌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것은 서민군주임을 자처하고 백성들의 편에 서려고 했던 자신의 입지와도 크게 관련이 되는 문제였다
임진왜란을 경험한 조선사회는 유명무실한 오위제(五衛制) 대신에 훈련도감 등 오군영(五軍營) 체제로 군제를 개편하였다. 훈련도감은 국가가 직업 군인을 양성하고 그 재정을 양인의 군포로 충당하는 군영이었다. 훈련도감 이외에 어영청, 수어청, 금위영과 같은 군영의 군포 부담도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몸으로 군역을 부담하는 대신 1년에 군포 2필을 부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군역은 공평하게 부과되지 않았다. 양반은 군역을 부담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양인들은 관직을 사거나 족보와 호적의 위조로 군역의 법망에서 벗어났고,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공명첩을 받아 양반의 신분을 획득한 자와 아예 군역을 피하기 위해 노비로 자청하는 양인들도 증가하였다. 이처럼 군역을 피하려는 방법으로 양반과 노비의 숫자가 증가하자 그 모자란 부분만큼 힘없는 백성들의 군역 부담은 늘어났다. 당시 군역이 50만 호에 해당한다고 추정되는데 실질적으로 군역의 부담을 지는 숫자는 10만 호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부족분은 나머지 양인들에게 고스란히 떨어지게 되었다. 즉 죽은 사람(백골징포)이나 군역의 의무가 없는 어린 아이(황구첨정)에게 까지 군역이 부과되고, 군역의 부담을 이기지 못해 도망간 경우에는 이웃(인징)이나 친척(족징)에게 군역을 부담시켰다. 전란을 겪은 이후 이러한 사회 현상이 만연하면서 17~18세기에 들어와 군역은 일반 백성들을 가장 괴롭히는 의무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간파한 영조는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군역의 근본적인 개혁책을 마련해가기 시작했다.
3)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실시된 균역법
1750년(영조 26) 5월 영조는 직접 창경궁의 홍화문 앞에 나갔다. 군역의 부담에 대한 백성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었다. 이후에도 영조는 양인들의 군역에 관한 절목(節目) 등을 검토하고, 7월에는 양역(良役)에 관해 유생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등 적극적인 여론 조사와 양역의 개선 방향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한 끝에 이해 7월 11일 균역청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의 주요 내용은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2개월에 1필로 납부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한 집에 장정이 3~4명이 있을 경우 군포의 값을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0냥 정도가 되었는데, 당시 1냥의 가치는 현재로 환산하면 2~3만원 정도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더구나 16세에서 60세의 장정이 아닌 경우나 이웃이나 친척의 군역도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것을 반으로 줄이는 조치를 취해 주었으니 일반 백성들은 크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균역법의 실시로 국가의 재정 부담이 커지게 되자 영조는 부족한 재원 마련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일정한 직업이 없이 놀고 있는 재력가들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명목으로 군포를 내게 하였다. 이들은 양반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호적에 유학(幼學)이라고 칭하던 자들로서 종래에는 군역을 부담하지 않던 계층이었다. 조선후기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이러한 층들이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에게 선무군관이라는 명칭을 주는 대신에 군포를 징수하도록 한 것이다. 이외에 결작(結作)이라는 새로운 세금을 신설하여 지주들에게 1결당 쌀 2말이나 5전의 돈을 부담하는 토지세를 만들어 땅이 많은 양반 지주들의 부담을 크게 하였고, 왕실의 재원으로 활용하였던 어세, 염세, 선세(船稅)를 군사재정으로 충당하여 균역법의 실시에 따른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였다. 이처럼 균역법의 실시로 백성들의 부담은 줄어드는 대신에 양반층, 특히 땅이 많은 지주들의 부담이 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양반들이 가진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가 군역의 부담을 지지 않는 것이었다. 원래 영조는 양반들에게도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 가호(家戶)마다 군포를 납부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양반층의 강력한 반발로 호포법의 실시까지는 가지 못하고 균역법의 단계에서 개혁을 마무리 지울 수 밖에 없었다. 양반들에게도 모두 군포를 내게 하는 호포법은 균역법 실시된 지 100여 년 후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강력한 개혁정치를 실시하면서,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3. 1760년 청계천 준천(濬川) 사업
1) 영조대 준천 사업의 배경
최근 청계천 복원 공사를 둘러싸고 여러 차례의 논쟁이 거듭되다가 2003년부터 본격적인 청계천 복원 사업이 착수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하천인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논란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홍수에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가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이 넘치는 경우가 많아 도성 안의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전기인 태종, 세종대에도 청계천의 준천 사업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고, 조선후기인 영조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청계천에 쌓인 토사의 준설, 즉 준천 사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이 당시에는 상업의 발달에 따른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면서 청계천 주변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고 이들이 버린 오물이나 하수로 청계천은 심한 몸살을 앓았다. 또한 인구의 증가로 도성 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홍수시에는 토사가 밀려와 청계천을 매워 홍수에 대한 피해 우려는 한층 심각해졌다.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한 영조는 청계천의 준천을 명했다. 준천 사업을 통하여 당시 도시로 유입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청계천을 정비해 홍수에 대비하고 보다 쾌적한 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실업자 대책과 함께 도시 환경 정비라는 두 마리를 토끼를 함께 잡으려 한 정책이라고나 할까?
2) 준천 사업의 경과와 완성
1760년(영조 36) 4월 영조는 청계천의 준천(濬川) 사업을 완성하고 공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네 글자의 표석을 세웠다. 더 이상 도성이 홍수의 피해로 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이전인 3월 16일에는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완성되기 전부터 영조는 준천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752년에는 친히 광통교(廣通橋)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고, 2년 전인 1758년 5월 2일에는 준천의 가부 여부를 신하들에게 물으면서 구체적인 방안들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고, 마침내 1760년 준천 공사에 들어갔다. 준천 사업에 뜻을 둔 지 8년 여만의 결실이었다. 1758년 5월 2일 영조는 숭문당에서 승지 등을 불러 들인 자리에서 청계천 다리 중 광충교(廣衝橋)가 작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음을 우려하였다. 어영대장 홍봉한은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의 인가는 반드시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면서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함을 건의하였다. 일부 사관들은 도랑을 준설하는 것이 급한 일이나, 만약 백성을 동원하려 한다면 초기에는 민원(民怨)이 많을 것임을 우려하였고 영조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장기적인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다.
마침내 1759년 10월 6일 준천의 시역(始役)이 결정되었다.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濬川所)가 설치되었고 홍봉한, 홍계희 등이 준천소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한성부좌윤 구선복은 직접 현장에 가서 준천도(濬川圖)를 그려 오는 등 구체적인 사업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준천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에 21만 5천 여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등,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천 여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 5천 냥의 돈과 쌀 2천 3백여 석(石)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영조의 청계천 준설 사업에 대한 의지는 1760년 2월 23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 사업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대 역점 사업을 청계천 공사에 두고 있음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이에 이제 호조판서가 된 홍봉한이 ‘현재 역사(役事) 금위영, 어영청 소속 군사들이 동원되어 공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보고하였고, 영조는 가장 어려운 공사인 오칸수문(五間水門) 공사가 6일 만에 끝낸 사실에 매우 흡족해 하였다. 홍봉한은 당시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하였고 영조는 모든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매우 흡족해 하였다. 이처럼 영조대의 준천 사업은 국가적 사업으로 모든 백성들이 적극 협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1760년 3월 16일 공사가 완성되고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준천사실이 편찬되었다. 준천사실이라는 책의 제목은 영조가 직접 정하였다. 영조는 공사의 책임자인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년을 갈 것입니다’고 하여 공사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였다. 이어 구선행 등이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標石)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고, 영조는 표석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게 했다. 1760년에 공사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함과 함께 항상 이 네 글자가 보일 수 있게 하여 더 이상 청계천에 토사(土砂)가 쌓이지 않도록 하고, 만약 한 글자라도 파묻히면 후대의 왕들이 계속 준천할 것을 당부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3) 조선시대판 뉴디일정책
공사기간 동안 영조는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친히 동대문에서 공사를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공사 완성을 기념하여 모화관(慕華館)에서 시재(試才)를 베풀어 국가의 경사를 자축하였다. 또한 일을 감독한 사람들을 인솔하여 연융대(鍊戎臺)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당시 영조가 친히 공사 참여자들을 격려한 모습은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어 당시 공사 현장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이 그림에는 당시 공사에 동원된 소와 수레, 쟁기 등을 비롯하여 영조가 동대문에서 관리들과 함께 친히 공사 현장을 목격한 모습 등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영조는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일컬어 균역법과 함께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평가할 만큼 자부심을 보였다. 청계천 준천 사업을 추진하여 영조는 도성 내의 백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홍수의 위협을 해소시키고 일부 도시 실업자를 구제하는 면모를 보였다. 영조는 자신의 국정 방향에서 최우선으로 삼은 민본 사상을 청계천 준천 사업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이 사업은 1930년대 실업 문제 해결을 대토목공사로 연결한 미국 대통령 루우스벨트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기에 루우스벨트가 추진한 뉴디일 정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식을 갖고 있지만 영조대에 대규모 청계천 공사가 이루어졌던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뉴디일 정책이 추진 보다 무려 170년 전에 조선의 한 국왕에 의해 실업자 구제와 도시환경 정비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청계천의 준천 사업이 실시되고 완성된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공사 현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준천사실과 같은 기록은 현재의 청계천 공사 복원에도 적극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