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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전인적 인간상(윤사순) - 2015년 10월 강연
- 등록일 2015-10-12
- 조회수 9
퇴계의 전인적 인간상
尹絲淳(고려대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1, 그의 생애
(1)가정환경과 학문이수
퇴계의 성은 이(李)씨,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혹은 도유(陶臾) · 퇴도(退陶) ·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고, 관향은 진보(진寶, 靑松)이다. 그는 연산군 7년(1501) 음 11월 25일에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진사 이치(李値)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이 진사였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도 신분상으로는 자기 능력에 따라 장래가 보장되는 양반가문의 출신이었다. 실제 가계로도 그의 5대조(玄祖)는 통헌대부(通憲大夫) ·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있다가, 공민왕 11년에 비장(裨將)으로 정세운(鄭世雲)을 따라 홍적의 난을 토벌하여 안사공신(安社功臣) 호를 받아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진 이자수(李子修)이고, 고조가 중훈대부(中訓大夫)로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낸 이운후(李云侯)이며, 증조 또한 중직대부(中直大夫)로 선산(善山) 부사를 지낸 이정(李禎)이다. 그리고 진사이던 조부 이계양(李繼陽)과 부친을 두었다.
그렇다고 퇴계의 가정환경이 유복했던 편은 아니었다. 태어난 지 불과 7개월 되던 때 그는 당시 40세의 장년이던 부친을 여의었다. 그로 말미암아 부친의 훈도를 받지 못함은 물론이고 빈궁한 상태에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을 여의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했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 가야했다.
곤궁한 중에도 그의 모친은 늘 자식들에게 “문예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과 행실을 더욱 삼가도록” 훈계했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것이 없다고 조소하니, 너희들은 남보다 백 배 더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조소거리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 경계했다고 한다. 그 스스로 모친을 묘사하여 “두 아들(瀣와 滉)이 대과 급제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어도 부인께서는 그 영진(榮進)을 기뻐하지 않고, 항상 세상의 시끄러움을 걱정했으며,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그 의리(義理)를 가르쳐 주고 사정을 밝히는 식견과 사려는 사군자(士君子)와 같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퇴계의 학문과 인격 형성에 모친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하게 된다.
6세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한 퇴계는 12세부터 숙부 송재공(松齎公) 우(堣)에게 『논어』를 비롯한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4세에는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해 조용히 생각(모모)하고 있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아갔고, 20세 무렵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 가며 독서와 사색(潛玩)”에 잠겼다. 이때 『주역』 등 경전에 대한 과도한 공부가 마침내 소화불량으로 ‘몸이 야위는 병증(嬴悴之疾)’의 원인이 되어 평생 허약하게 지낸다.
21세 때 허씨 부인과 결혼한 그는 23세에 서울로 올라와 태학(太學), 즉 성균관에 유학한다. 호남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만난 것도 성균관 유학시절이다. 27세 되던 가을부터 향시를 비롯하여 진사 회시(28세), 문과 별시(32세), 경상도 향시(33세) 등을 거친 다음, 34세 때 대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벼슬길에 나섰다.
(2)환로의 귀거래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34세)로 출발한 퇴계는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생활을 보낸다. 34세 때 한 해만도 그는 승문원 정자(正字, 정 9품), 저작(著作, 정 8품)을 거쳐 무공랑박사(務功郞博士, 정 7품)에 올랐다. 다음해에는 호송관에 차출되어 왜노(倭奴)를 동래까지 운송하고, 해가 바뀜에 따라 성균관전적 겸 중학교수(成均館典籍 兼 中學敎授) 및 호조좌랑(戶曺佐郞, 36세)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40세) ·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41세)이 되었다가,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 충청도어사(忠淸道御史) · 사인(舍人) ·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41세)을 지내고,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43세)에 이른다.
종 3품인 성균관 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해부터 52세까지 사이에 그는 세 차례(43세 때, 46세 때, 50 세 때)나 퇴귀(退歸)했다가 소환당하면서, 관료생활을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지낸다.
이 시기에 일어난 다음 몇 가지는 주목되는 사건들이다. 두 번째로 퇴귀한 46세 때 그는 고향인 퇴계(退溪)의 동암(東巖)에 장차 자신의 학문 처소로 사용할 조그만 암자 양진암(養眞庵)을 짓는다. 서울을 떠나려는 의도로 그는 스스로 외직(外職)을 구해 잠시 단양군수(9개월간), 풍기군수(1년 2개월)를 지낸다(48, 49세 때). 그는 군수 자리마저 벗어나기로 결심한 나머지 신병을 이유로 감사에게 세 차례나 사직원을 제출한 다음, 회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짐을 꾸려 퇴계로 돌아와 버렸다. 이 일로 그는 자의로 임소를 이탈(擅棄任所)했다는 죄목으로 직첩(職牒, 告身)을 박탈당한다(50세 때).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사건들이 속출했다. 일찍이 27세 때 부인 허씨를 잃고, 30세 때 부인 권씨와 재혼 했는데, 43세의 퇴계는 그 권씨마저 잃었다. 더구나 단양 군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까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에는 친형인 좌윤공(左尹公) 해(瀣)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좌윤공은 일찍이 사헌부에 있으면서 이기(李芑)의 “재상으로서의 부적격”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로 이 때 이기(李芑)의 모함을 받아 장류(杖流) 되다가 도중에서 숨졌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한다는 것도 퇴계의 경우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세 번째 퇴거 후 2년이 지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주어(52세) 다시 불러들였다. 마지못해 환조(還朝)한 퇴계는 이 해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까지 오르나, 역시 신병을 이유로 곧 사퇴했다. 이 뒤로는 반복되는 “임명과 불취(不就) 또는 사퇴”가 노년의 퇴계를 상징하는 낱말이 된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중요 관직의 임명을 일괄하면 다음과 같다.
상호군(上護軍, 53,54세), 형조참의 · 병조참의(刑曹參議 · 兵曹參議, 54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55세),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경연참찬관 · 춘추관수찬관(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 · 春秋館修撰官, 56세), 공조참판 · 홍문관대제학(工曹參判 · 弘文館大提學, 58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59세, 65~67세), 공조판서 겸예문관제학(工曺判書兼藝文館提學, 66세), 겸홍문관대제학 · 지성균관사 · 동지경연춘추관사 · 예조판서 겸동지경연춘추관사(兼弘文館大提學 · 知成均館事 · 同知經筵春秋館事 · 禮曹判書 兼同知經筵春秋館事, 67세),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 68 · 69세),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 68 · 69 · 70세), 이조판서(吏曹判書, 69세)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퇴계의 이러한 관직은 그가 70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치사(致仕)와 해직”(解職)을 청원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상호군이라든지 중추부사 같은 벼슬은 그 자체가 명예직이므로 말할 것 없고, 특히 58세 때 치사소(致仕疏)를 올린 뒤로는 모든 벼슬을 거듭 사양하며 받지 않았거나, 마지못해 받은 벼슬이라 해도 한두 달 만에 사퇴하든지, 아니면 실제로는 취임하지 않은 채 벼슬 이름만 가지고(虛位)있다가 다른 벼슬로 옮겨지는 형편이었다. 끊임없이 은퇴하려는 그의 뜻과 언제나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며, 한낱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만이 계속된 것이 그의 노년기다. 그러므로 치사 이후 그의 “노년기는 사실상 은퇴기”로 보아도 무방하나, 형식에서는 서거 후의 증직(贈職)인 영의정으로 이어졌다.
(3) 노년의 결실
퇴계 노년의 관료 생활이 한낱 ‘임명과 불취’로 그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던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그 점에서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부면은 그의 관직보다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노년기의 연구 업적’들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청장년 시절에는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이 나오지 않았다.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 적어도 대사성(大司成, 52세)을 지낸 된 뒤부터 연구 업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또한 ‘탈고신(奪告身)’을 당할 정도로 관직을 임의로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암자 등을 짓고 안거하기 시작한 때와 거의 일치하는 현상이다.
53세의 퇴계는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1509~1561)의 「천명도」(天命圖)를 보고서, 그것을 수정한 「개정천명도」(改訂天命圖)를 낸다. 이것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 ~ 1572)과 나눈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을 불러일으키게 된 단초이다. 그 논변은 당시 전체 성리학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행해진 연구물이지만, 퇴계 학문의 본격적 출발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뒤로 그가 남긴 수많은 저술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여노수신논숙흥야매잠주해서」(與盧守愼論夙興夜寐箴註解書), 「연평답문발」(延平答問跋),「사정전대보잠」(思政殿大寶箴),「경복궁중수기」(景福宮重修記) (이상 54세),「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56세),「계몽전의」(啓蒙傳疑) (57세),「어관보(득강)시집발」 (魚灌圃(得江)詩集跋) (58세),「답황중거서론백록동규집해」(答黃仲擧書論白鹿洞規集解),「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 (이상 59세),「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59세에 착수),「답기고봉서변사단칠정」(答奇高峯書辯四端七情) (59세~66세), 「도산기」(陶山記) (61세),「정암조선생행장」(靜庵趙先生行狀),「심무체용변」(心無體用辯) (이상 64세),「경현록개정」(景賢錄改定) (65세),「회재이선생행장」(晦齋李先生行狀),「심경후론」(心經後論) (이상 66세),「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성학십도」(聖學十圖) (이상 68세),「답노이재의상례서」(答盧伊齋議喪禮書) (69세),「답기명언서론심성정도」(答奇明彦書論心性情圖),「답기명언서개치지격물설」(答奇明彦書改致知格物說) (이상 70세), 기타.
그렇다고 노년의 퇴계가 저술만 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로 귀향하여 한서암(寒栖庵)을 지었을 때(50세)만 해도 그에게는 “따르는 선비”(從遊之士)가 많았다. 학문을 배우려는 학도가 나날이 늘어 강학의 장소가 비좁아지자, 일찍이 얻어 둔 도산(陶山)남쪽에 ‘도산서당(陶山書堂, 도산서원 전신)’을 지었다(60세). 그는 이 서당에서 자신의 학문을 키우는 동시에 후진을 인도 하는 데에도 힘썼다. 특별히 중요시하여 가르친 것으로는『심경』(心經)과『계몽』(啓蒙)이라 알려지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학구열 못지않게 교육열 또한 높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가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던 당시, 이상과 같은 행로를 거친 퇴계는 70의 천수(天壽)를 다하고 자택에서 평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 3년 (1570) 음력 12월 8일의 일이다.
2. 그의 인간상 전모
(1) 관료로서
퇴계는 과거를 거친 뒤에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의 인간상은 우선 ‘관료’로 파악될 수 있다. 그의 저술이 입증하는 점에서는 ‘학자’로 이해될 수 있겠고, 대사성으로서 성균관의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은퇴 후에는 강학에 힘썼던 만큼 ‘교육자’로도 살필 수 있다. 결국 ‘관료, 학자, 교육자의 상’이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살필 수 있는 퇴계가 지닌 인간상의 부분들이다.
먼저 그의 관료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실들을 살피겠다. 왜구가 남해안을 침입해 양민을 괴롭힌 사건은 삼국시대 이래로 있었지만, 조선 중기이후에는 매우 자주 일어나 항상 ‘국방문제 중의 하나’로 등장했다. 퇴계가 벼슬할 때는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있은 뒤인데, 침탈을 저질은 왜는 여러 차례 화해를 애걸(乞和)하던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왜의 그런 태도를 받아드리지 않은 채 단안을 미루고 있었다. 퇴계는 일찍이 호송관의 임무를 띠고 왜노들을 동래까지 보낸 경험도 있었던 터라, 조정의 정책에 자기 나름의 견해를 밝히면서, 그것을 관철하려 했다. 그는 명종이 즉위하던 때를 기하여 ‘걸화(乞和)를 받아들이도록’ 상소했다. “생명 존엄을 고려해 어디까지나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라가 이미 북쪽 오랑캐와 대치하고 있는 상태임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 즉 남북의 적에 대한 동시 대항을 해야 할 경우 곤란하다는 것”이 그 주요 이유다. 왜의 걸화에 대한 수용이 바로 ‘사직과 백성을 위하는 길’임을 그는 역설했다.
당시 선비(士大夫)들은 왜국이라면 오랑캐라는 가치의식 때문에 무조건 무시하던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왜구에 대한 처리 방안이 강경책으로만 기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에 견주면, 이것은 확실히 관습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외교와 국방 문제를 현실적 시각에서 다루려는 ‘실리 위주의 진지한 태도’이다. 퇴계의 이 주장은 곧 그가 현실을 요리하는 관리로는 ‘평화주의’와 더불어 ‘현실주의적인 상황판단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런 능력을 성실히 발휘하려 한 사례이다.
퇴계가 외직을 자청하여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49세), 그는 조선시대 처음으로 사액서원을 시행토록 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전임 풍기군수인 주세붕(周世鵬)은 그 지역(白雲동)이 주자학의 최초 도입자인 안향(安珦)의 고향임에 안향을 숭모하는 뜻에서 서원(書院)을 세웠다. 퇴계는 이것을 감사에게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만들어 주도록 청원했다. 그 청원은 물론 중국 송대의 고사(故事)를 본뜬 것이지만, 그의 이 노력이 그 뛰에 결실을 맺어 백운동서원은 전토(田土) 및 서적과 더불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호(賜號)를 한국 최초로 받게 되었다. 다시 말해 퇴계의 청원으로 백운동서원은 이 나라 사액서원의 효시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유학이 수많은 서원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그 중에도 특히 사액서원이 일반 서원들의 주도했던 점을 상기하면, 퇴계의 이 업적도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것은 그의 관심이 대체로 ‘문치(文治)의 방향’으로 쏠리고 있었음, 다시 말해 문치에 의한 ‘문예의 흥성’을 기도한 학자 퇴계의 뜻을 실현한 업적에 든다.
당시는 사화기, 특히 을사사화기(乙巳士禍期)여서 언로(言路)가 사실상 폐쇄된 상태였고, “선비의 기개” 또한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퇴계의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대저 복상(福祥)은 태평한 시대에 내리고 재얼(災孼)은 어두운 군주 때 일어나는 법입니다. ·······이제부터 주상 전하께서 하늘의 경동(警動)시킴이 심히 두려워할 것임을 생각하시고, 백성을 수고롭힘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음을 생각하시어, 삼가 덕 닦기를 옥루(屋漏)에 부끄럼 없이 하시고 마음 깨우치기를 전문(殿門)처럼 바르게 하시며, 그 위(位)를 밟고 그 예를 향하시어 ·······.
이것은「경복궁중수기」(景福宮重修記,『퇴계문집』, 권42)에 들어있는 구절에 불과하지만, 내용은 천인상감설(天人相感說)에 기초한 ‘제왕경계론(帝王警戒論)’이다. 정치란 제왕의 수덕(修德)에 의한 ‘위민(爲民)정치’여야 한다는 유가 본래의 덕치(德治) · 민본적 왕도정치론으로 임금의 모범적 수덕(正心修己)을 엄절하게 깨우친 내용이다. 이는 연이은 사화로 선비들의 기개가 저하된 당시 양심과 용기를 겸하지 않은 선비가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이로써 관료로서 퇴계의 ‘용기(勇氣)에 찬 곧은 기절(氣節)’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덕치를 위한 제안이라 해도 정암 조광조나 율곡 이이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정책, 제도면의 참신한 개혁론을 퇴계는 구체적으로 내지 않았다. 그의 경세론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이 점은 그의 대표적 경세론인「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도 마찬가지다. 퇴계의 특기는 구체적인 경세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보이듯이 덕치 · 왕도 정치를 지향하는 경세론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인간상은 ‘관료의 상보다 학자의 상’에 더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그 시기 이렇게 엄절히 임금을 경계하는 예는 흔하지 않다. 그 점을 감안하면, 그는 역시 이전의 ‘사림파정신(士林派精神)’을 계승한 인물이라는 판단이 나온다. 실제로 퇴계는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靜庵 趙光祖)을 지극히 존숭해 마지않았고, 그 존숭의 열의는 손수「정암의 행장(行狀)」을 지어 정암의 공을 기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강(侍講)을 통하여서 왕에게까지 직접 ‘정암의 인품과 학행의 비범함’을 알려 주었다. 또 사림파에 속하는 회재(晦齋 李彦迪)의 행장을 지은 것도 같은 뜻일 것이다. 관료로서 퇴계의 정신적 궤도가 ‘사림파입장’이었음은 조금도 의심할 나위 없다. 사림파의 정신을 이어 완곡한 방법으로나마 자기 나름대로 당시의 모순과 부정에 저항한 것이 퇴계였다고 판단된다. 다만 그 소극적인 태도가 노년에 모든 관직으로부터 멀어지려하던 ‘고사불이(固辭不已)의 의지’로 말미암아 더 그 인상을 짙게 했을 따름이다.
왜 그는 그토록 간절히 관직을 떠나려 했을까? 당시 상황으로 보면 먼저 ‘사화’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45세 때 몸소 을사사화의 여파를 체험했다. 그가 그 사화로 인한 참화를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사화의 주동 인물인 이기(李芑)등에 의해 일단 삭직되었다가 이기의 조카인 이원록(李元祿)의 역간(力諫)의 덕택으로 환직(還職)된 일이 있다. 그리고 그의 형 좌윤공 해(瀣)가 이기의 구함(構陷)에 빠져 장류(杖流)되다가 도중에 숨지는 참극을 목격했다. 그러므로 현실의 부정· 부조리에 정면으로 도전 · 대결하는 유형의 성품이 아닌 그로서는 사화의 현장을 멀리하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 이면적인 이유로서 ‘그의 학구욕’이 지적될 수 있다. 퇴계는 그의 과거(科擧) 자체가 본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곤궁 및 노모와 친구의 강권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그 자신은 “어려서부터 성현과 성현의 학문을 그리는 마음(慕古之心)이 있었을 뿐”이라 했다. 고봉(高峯 奇大升)에게 준 글에서 그는 아예 “어려서 바로 산림 속에서 늙어 죽을 계획을 세워, 조용한 곳에 띠집(茅屋)이나 얽어 놓고, 독서와 양지(養志)의 미진한 점을 더욱 구하여 나가는 데 3수십 년의 공을 더했어야만, 병도 나았을 것이고 학문도 틀림없이 성취되어, 천하 만물이 내 즐기는바 되었을 것인데, 어찌하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과거나 보고 관직에나 눈을 팖으로써 육신만을 위했는지·······” 라 탄식했다. 관리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취향은 어디까지나 학문에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치사은퇴(致仕隱退)는 그 자신이 관리로서 부적격함을 깨닫는 한편, 학문에 대한 열망을 버릴 수 없었던 데 말미암았다고 보아야 한다. 학구열이 관직사퇴의 근본이유였다고 하는 것 또한 그에게는 경세지향의 ‘관료인의 상’보다 근본적으로 학문 지향의 ‘학자의 상’이 더 짙었음을 뜻한다.
(2)학자로서
「퇴계연보」에 따르면 어릴 때『논어』 등을 그에게 가르쳐 준 그의 숙부 송재공(松齋公, 堣)은 퇴계의 문의(文義) 이해력이 뛰어남에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예로『논어』를 읽던 중 퇴계가 ‘이(理)’자를 가리키며 그 뜻을 “무릇 일(事)의 옳음(是者)” 이라고 스스로 깨달아 말해, 숙부는 그를 가리켜 “가문을 유지할 사람은 이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자라서 향시를 비롯한 대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에 우수한 성적을 올린 사실로도 그의 재질이 원래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태학(성균관)에서 함께 지낸 하서(河西, 金麟厚)가 그를 “영남의 수재”(夫子嶺之秀)라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퇴계는 재질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또한 ‘대단한 학구열’의 소유자였다. 이미 14세 때부터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稠人廣座)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해 조용히 사색(潛玩)할 정도”로 학문을 좋아했고, 그것이 20세 무렵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길 정도여서 마침내 일생동안 그를 괴롭히던 “야위는 일종의 소화 불량증”(嬴悴之疾)을 일으켰다 함은 이미 언급했다. 심지어 안질로 오랫동안 고생할 경우에도 독서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제자의 기록이 있는가하면, 군수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 그의 짐 꾸러미는 오직 몇 상자의 책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산림에 들어가 30여 년의 연구에 매진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던 것은 그의 나이 59세 때의 일이다.
이즈음 고향에 돌아온 그는 암자들로는 학생의 수용이 부족해 서당 지을 대지를 마련하고,『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엮은 다음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과『논사단칠정서』(論四端七情書) 등의 저작에 착수하고 있었다. 저술 활동, 특히 고봉과의 서론(書論)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초년부터 말년에 이르도록 그의 학구열은 변할 줄 몰랐음이 분명하다. 학구열에 불타는 ‘진지한 학자’, 이것이 퇴계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그의 뚜렷한 모습이다.
퇴계의 학문태도는 학구열보다 더욱 인상적이다. 그의 학문태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바로 고봉과 나누던「사단 칠정에 관한 논변」의 태도라 여겨진다. 그 당시는 바로 ‘장유유서’류의 수직적 예속이 지배하던 때였으므로 사대부들은 학문을 하는 데서도 권위주의적 복고풍의 방식에 의하여 일방적인 전수만을 강조하고 강요하던 형편이었다. 선배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는 자유로운 토론이란 상상조차 못하던 풍토였다.
이런 풍토를 깬 것이 그와 고봉과의「사단 칠정 논변」이다. 선배의 이론에 반기를 든 고봉도 비범하지만, 그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인 퇴계의 태도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논변이 8년여의 장기간에 걸쳤음은 널리 알려졌지만, 이 동안에 퇴계는 고봉의 이론(異論)을 신중히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올바른 이론을 이루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이론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자기 이론에 비판을 서슴지 않는 후배 고봉의 견해에 “논의가 지극히 명쾌하여 혼잡되는 병폐(紛拏之病)를 일으킴이 없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루한 관습대로 한다면, 퇴계가 고봉의 질의조차 묵살해도 그만이고, ‘연령과 관직의 고하’를 들어 일갈하여 압력을 가했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논변이 시작될 무렵 퇴계는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노대가’였던 데 비하여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에 지나지 않았다. 논변이 가능했고 그것이 드디어 당시 정체된 학문 풍토에 ‘참신한 기풍’을 일으켜, 이 나라 ‘성리학의 독특한 발전’을 가져 오게 한 것은 오직 퇴계의 학덕, 보기 드문 그 ‘겸허한 학문 태도’에 말미암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학문 외의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진리 자체만을 찾으려 하는 진지하고 겸허한 학자적 양심의 소유자’를 만나게 된다. 그의 제자가 “선생은 겸허로써 덕을 삼아 털끝만큼도 교만하여 잘난 체 하는 마음이 없었다” 고 한 말이 과연 사실이었음을 믿게 된다.
(3) 교육자로서
사대부에 있어 학문과 경세의 문제는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듯이, 학문과 교육은 더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비록 관리가 되더라도 학문을 한 이상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을 더없는 즐거움(樂)”으로 여기던 것이 공맹 이후 사대부의 공통된 인생관이었다. 오늘의 국립대학 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퇴계는 ‘관료적 교육자’의 입장에서 그의 ‘교육관(敎育觀)’을 밝혔다.
선비(士子)란 예의의 원천(宗)이며 원기(元氣)의 본거(萬)이다. ······ 지금부터 제군은 모든 일상생활(日用飮食)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지도록 하라. 모름지기 서로 칙려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예로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遜悌)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 하도록 하라.
요컨대 대사성이라는 관료 교육자로서 퇴계는 ‘충신의 마음가짐’과 ‘손제의 행실’로써 ‘예의를 실천’하고 ‘경세의 기운을 잃지 않는 선비’를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이 곧 그 대사성의 교육관이다. 이로 미루어 퇴계가 지향하던 교육자의 상이란 바로 ‘올바른 선비의 육성자’로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퇴계는 이런 교육자상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맨 먼저『소학』(小學)으로부터 시작하여『대학』(大學), 『심경』(心經),『논어』,『맹자』및『주자서』(朱子書)를 가르친 다음 모든 경서를 가르쳤다”. 모든 경전을 다 가르치되 그 중에도 『소학』,『대학』,『심경』,『논어』,『맹자』및『주자서』 ‘여섯 가지를 기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교육의 방법과 특징은 ‘정주의 학문을 표준’으로 삼아 ‘경의협지(敬義夾持)’하고 ‘지행병진(知行竝進)’에 주력토록 함이었다. 다시 말해, 정주계통의 입장에서 특히 ‘경(敬)의 태도’를 바탕으로 ‘의리(義理)’를 탐구하여 실천하도록 하는 방식, 이른바 ‘지와 행을 병진’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 ‘그의 교육의 특징’이었다.
지행병진을 가르치려면 말에서 그치지 않고 몸소 행하여 그 모범을 보여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한 스승은 단순히 ‘지식만의 전수’에 그치지 않고 인격(人格)의 차원에서 배우는 이들의 ‘인격형성에 감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퇴계야말로 그 제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런 스승이었다. 그는 “제자 대하는 것을 마치 벗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비록 어린 제자일지라도 이름을 부르거나 ‘너’라 하지 않았고, 보내고 맞을 때에는 항상 공손히 정중한 자세--‘경(敬)’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늘 드나들며 배우는 제자일망정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받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으레 먼저 부형(父兄)의 안부부터 물었다. 평일에도 제자가 먼 길을 떠나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여 보냈다고 한다.
수업의 방법은 각 제자의 학문 이해(理解)의 정도에 따라 각기 알맞게 가르쳤다. 만일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몇 번이든 이해할 때까지 반복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런 가르침에 조금도 염증을 내지 않았다. 비록 병으로 아파도 심한 정도가 아니면 강론을 쉬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는 이미 중환이었는데도 평소와 다름없이 강론을 하여, 제자들이 중환임을 뒤늦게 깨달았을 정도였다. 그의 강론은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다한 것을 짐작한 퇴계는 숨을 거두기 4일 전에 자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죽는 마당에 (제자들을) 아니 볼 수 없다”면서 제자들을 불러 오게 해, “평소에 올바르지도 못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강론한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마지막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이 ‘정중한 예의’와 ‘성실한 강론’은 자신에게 ‘높은 인격(人格)’과 ‘깊고 뜨거운 제자애(弟子愛)’가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퇴계는 이렇듯 무한한 애정을 쏟을 줄 아는 동시에 강한 인격의 감화를 줄 수 있는 ‘성실한 스승의 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하여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한강(寒岡) 정구(鄭逑), 월천(月川) 조목(趙穆), 간재(艮齎) 이덕홍(李德弘), 문봉(文峰) 정유일(鄭惟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사암(思庵) 박순(朴淳) 등 당대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제자가 쏟아져 나온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4)참된 인간의 성취
퇴계의 인간상은 이상의 관리, 학자, 교육자의 모습을 살핌으로써 충분히 파악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결코 충분치 않을 것 같다. 그 이유는 그가 진심으로 바라던 자기, 즉 그 자신의 ‘자연적 인간상’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측을 확인해주는 예증의 하나가 바로 퇴계의 ‘묘비(墓碑)’에 관한 유언이다.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던(숨을 거두기 4일전) 날, 그는 오전에 조카로 하여금 유계(遺戒)를 받도록 하고 이르길, “예장(禮葬)을 사절할 것”과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지시한다. 묘에 무슨 표지를 하고 싶거든, 비석 대신에 다만 ‘작은 돌(小石)’을 사용하여 그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뒷면에 ‘향리(鄕里)’ · ‘세계(世系)’ · ‘지행(志行)’ · ‘출처(出處)’를『가례(家禮)』에 적힌 대로 간략히 쓰라 한다. 이로 보면 퇴계는 절대로 세속적인(신분상의) 성공을 바라며 산 것 같지 않다. 그에게 어떤 바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 자체로의 성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즉 ‘참된 인간의 성취’를 최상의 염원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의 학문이 유학중에도 성리학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지만, 성리학이란 무엇보다도 존심(存心) 양성(養性), 즉 자신의 수양을 가장 중요시하는 학문이다. 외견상으로는 원시 유학 위에 이기설(理氣說)에 의한 형이상학의 체계를 더한 것이 성리학이지만, 그 내면에는 존심 양성 또는 수기(修己) 정덕(正德)을 통한 ‘도덕적 인격의 완성’에 역점을 두고, 그 인격 완성의 토대 위에서 안인(安人), 치인(治人)이라는 유가 본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성리학이다. 따라서 성리학은 유학에서 본래 말하여 온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가장 큰 특색으로 삼는다.
평생을 성리학의 연구에만 바쳤고, 그것도 ‘지행병진’의 신념 밑에서 연구한 이가 퇴계였음을 상기하면, 그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격 형성’에 의한 ‘진정한 인간의 성취’를 이상(理想)으로 삼았을 것은 자명하다. 이미 그의 교육자 생활에서도 그러한 면모가 보였지만, 사실 그는 항상 “군자의 학이란 ‘위기’(爲己)일 뿐”임을 강조했다. 참된 인간으로서의 ‘본래적인 자기를 위하는 것(爲己)’이 그의 학문 방향이었으며, 그 방향에서 설정된 목표가 곧 ‘군자(君子)’ 또는 ‘선비(士人)’라 일컬어지는 인간상이었다. 성인(聖人)이 유가의 가상적 완전인 같은 이상인(理想人)이라면, 군자나 선비는 유가의 실제로 실현 가능한 이상인이다.
이렇게 도덕적인 측면에서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기 수양과 함께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깊은 철학적 이해, 즉 달관(達觀)이 요청됨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해 ‘구도자(求道者)’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던 사람이 바로 퇴계임을 이에서 깨닫게 된다. 우선 그가 지은 수많은 시를 보더라도 그것들은 한낱 정감의 율동을 맹목적으로 읊조린 것이 아니다. 그의 시들은 오히려 정감의 흐름을 자기 수양의 목적에 일치시키기 위한 일종의 ‘수련의 방편’이었다.
그가 18세 때 쓴 시에서도 그 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슬 머금은 풀잎 싱그러이 물가에 우거지고
작은 연못의 물, 티 없이 맑고 깨끗하기도 하다.
떠가는 구름과 날아가는 저 새는 본래 연관이 있는 것,
하지만 때때로 제비의 차고 가는 발길에 물결 일까 저어되누나.
(露草夭夭繞水涯 小塘淸活淨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怕時時燕蹴波)
이 시는 바로 연못의 청정(淸淨)한 물을 마음의 본성(本然之性)에 비유하고, 물을 차고 나는 제비의 날아다님을 감성적 욕구(氣質之欲)에 비유하고서, 그 욕구로 말미암아 본성이 구애됨을 경계한 것이다.
다른 한편 그에게 깊은 철학(理氣論)이 있었음은 다 아는 대로지만, 그러한 철학의 탐구는 바로 이 시를 지을 무렵부터 골몰하고 있던 것이다. 그가 20세 무렵에 평생의 고질을 얻게 될 정도로 침식을 잊어 가며 열중했던 공부가 다름 아닌『주역』에 대한 탐구였다. 주역의 탐구에 골몰한 사실은 그의 소질 또한 ‘성리학적 철학 탐구’였음을 알려주는 방증이다.
이러한 퇴계의 수양과 사색의 면모를 한눈으로 읽을 수 있는 자료가 그의『자성록』(自省錄)이다. 그는 벗 또는 후배들과 일상 논구한 철학문제와 심성 수양의 문제를 ‘자성의 자료’로 삼기 위해 그것을 “자성록”이라는 이름으로 엮어 놓고 항상 되살피고, 완색하며, 반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마디로 ‘진정한 자신을 찾는 작업’에 더없이 충실했다. 이 책이 일본 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연유가 바로 이런 점에 있었다.
일찍이 일본의 야마쟈끼(山崎闇齎, 1618 ~ 1682)는 이『자성록』과『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크게 감분하여 승문(僧門)에서 환속한 후 마침내 일본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오쯔카(大塚退野)는 젊어서 한때 양명학을 하다가『자성록』을 읽고 나서 정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렇듯 내외의 학자들이『자성록』을 지극히 찬탄하여 마지않았던 까닭도 결코 그 ‘이론의 탁월함’에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학문에 대한 끝없는 열의와 애착, 매사에 임하는 ‘성실과 겸허한 태도’, 그리고 그것들을 ‘자기 수양의 정화’로 보다 더 ‘무르익도록 뒷받침하는 힘’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학문과 수양을 ‘하나의 지혜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퇴계가『자성록』에서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부터 밝혔듯이 퇴계는 특히 ‘경(敬)’으로써 학문(知)과 수양(行)에 일관하는 토대를 삼았다. 그는 문하생들에게 가르친 서적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선현들의 심성수양을 적은『심경(心經)』이었지만, 자신도 그 책과 그것의 주해서인『심경부주(心經附註)』를 어느 서적보다도 애독하면서 수양의 실천에 철저했다. 그런데 그 ‘수양의 요체’가 다름 아닌 ‘정신 집중(主一無適)’에 의한 ‘경건한 마음가짐’이라 설명되는 “경(敬)”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경을 수양의 요체로 삼아 실천한 선비가 곧 퇴계다. 따라서 퇴계는 경을 바탕으로 하여 구도자의 자세로 ‘인생의 슬기’를 쌓아 올린 인물이다.
이런 자세로 오직 ‘참된 인간’이 될 것을 염원하는 사람에게 세속적인 영달과 명예가 매력을 끌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퇴계가 그토록 열심히 관직을 사퇴하였던 궁극적인 이유도 결국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수없이 사퇴를 되풀이하는 그를 당시의 임금(명종과 선조)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불러들인 까닭도 퇴계의 ‘참된 인간’이 되고자하는 그 ‘전인적 또는 구도자적 인간상’을 높이 평가한 때문일 것이다.
당시 명종은 벼슬을 받지 않는 퇴계를 그리워하던 끝에 “어진 이를 부르나 오지 않음을 탄식한다(招賢不至歎)”는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賦)를 짓게 했고, 은밀히 화공(畵工)을 퇴계의 고향이자 은거지인 도산(陶山)으로 보내어 산수의 풍경을 그리게 한 다음, 당시의 명필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퇴계가 지은「도산기」(陶山記)와「도산잡영」(陶山雜詠)을 그 위에 쓰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쉬는 방에 두고 보았다. 선조도 역시 퇴계의 만년 저작인『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보면서 퇴계를 경모했다.
그의 수제자인 월천(月川) 조목(趙穆)에 따르면,먼데 사람은 그의 덕을 앙모했고, 어진이(賢者)는 그의 도를 즐기었고, 어질지 않은 이(不賢者)는 그의 의로움을 두려워했으며, 무릇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자문해 본 다음에 행하였다고 할 정도이다. 이 모두 이상적 인간(理想人)을 향한 퇴계의 ‘전인적, 구도자적 인간상’의 반영이 아닐 수 없고, 전인적 태도로 쌓아 올린 ‘슬기(知慧)의 높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