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한국의 정치가 뒤처진 원인(遠因) - 2017년 11월 강연

  • 등록일 20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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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가 뒤처진 원인(遠因)


     -국가관의 병적 요인, 정치인의 의식, 정치문화의 몰락



                                                                                                       최재우(前 단국대교수)

一. 국가관의 병적 요인
   국가관에 병적 요인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인데 걱정하는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Nationalism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로 분류해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근대화에 성공한 선진국들은 국가주의(國家主義)에 입각하여 부국강병으로 식민지를 획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잃은 후진국들은 부국강병의 바탕이 없기 때문에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적인 단결을 호소하는 “민족주의(民族主義)”로 흘렀던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여기에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부국강병으로 서양의 강대국에 따라가려는 철저한 “국가주의”를 국시(國是)로 했습니다.
   일본의 국가주의 이론을 확립한 중심적인 학자인 모도다 나가사네(元田 永莩)는 당대의 일본 최고의 유교학자인데 퇴계(退溪)선생을 숭배하는 사람이었으며 천황의 시강(侍講)이기도 한 학자요 교육자였습니다. 

 

   문화란 건너간 곳에서 더 아름답게 꽃피거나 전락하는 변화를 하는데 퇴계의 가르침은 일본에서 더 아름답게 꽃피었다는 것이며 국가주의의 근간이 된 것입니다.
   퇴계선생은 “위기위타(爲己爲他)”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남을 위하라”는 뜻인데 일본인들이 이를 생활화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사람이 친절하고 예의 바른 것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데  일본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남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공연히 버릇없는 놈이란 소리 듣지 마라, 남에게 잘 해 주어서 나쁠 것 없다, ‘어디를 떠나나 서운하다는 말 남겨야지 잘 갔다는 말 남기면 너는 실패작이다’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 가정교육을 “시쯔께”라고 하는데 몸을 아름답게 한다는 뜻입니다.

 

   2차 대전 후에 30년 이상 일본에 파견된 바 있는 타임지 기자들이 쓴 “신일본”이라는 책에는 “일본인들의 친절한 매너는 투철한 자기 보호의식이 바탕에 있는 것이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즉, 위기위타(爲己爲他)라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지요. 미국 기자들은 일본인들을 매우 약삭빠른 사람들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도다 나가사네(元田 永莩)는 천황을 정점으로 국민이 일치단결해야 하기 때문에 천황을 우상화 하는 종교를 만들자고 했으나 이또 히로부미(伊藤 博文)는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근대적인 원칙에 어긋난다고 반대했고, 그 타협안으로 모든 가르침이 천황에서 내려왔다는 교육칙어를 만들자는데 합의 하여 모도다(元田)가 칙어의 초안을 작성했는데 “학업을 익히고 심신을 단련하여 부모에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라”는 것을 골자로 했습니다.
   이 가르침 역시 퇴계선생의 가르침이라고 일본 학자들은 믿고 있습니다.

 

  교육은 이중구조로 했습니다. 초등교육에서는 역사든 현실이든 일본의 좋은 점만을 가르쳐 선민의식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게 하고, 고등교육에서는 일본 역사의 나쁜 점도 가르쳐서 “우리도 잘못하며 후세에 지탄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또 초등교육에서는 윤리도덕과 정서 함양에 힘쓰고 고등교육에서는 과학과 합리성을 강조 합니다. 패전 후에는 교육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이 원칙이 많이 없어졌으나 지금은 부활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국가주의를 취할 수 없어서 민족의 우수성과 민족사의 유구함을 강조하고 민족적인 단결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에 입각했습니다.

 

   문제는 해방 된 후에도 국가주의를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를 더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해방직후의 한국국민에는 정신적인 기둥이 없었습니다. 이승만을 위시한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있었으나 모두가 들어보지 못하던 생소한 인물이라 정신적인 기둥이 될 위인이 없었고, 종교도 정신적인 기둥이 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즉, 국민의 대다수가 신자라서 사실상 국교라고 할만한 종교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미국이라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는 물질문명이 우리를 짓눌렀고 망해버렸어야 했을 일본이 6.25 덕택으로 경제적인 강국이 되어 우리를 짓눌렀으며 우리는 국민소득 5백 불이라는 후진국이 되어서 당장 배가 고픈데 애국심으로 나라를 세우자는 호소가 먹혀 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했으며 세계 제일의 우수한 한글이 있는데 한자를 쓸 필요가 없다는데 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세계 제일의 표음 문자인 한글과 세계 제일의 표의문자인 한자(漢字)를 혼용하면 세계 제일의 문자 체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를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한국인에 대해서 “지금은 고생하고 있지만 문화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한국 문화가 최고라고 하는 자존심 강한 민족이다”고 논평하는 우호적인 논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논객은 “반성을 모르고 무엇이라도 한국이 제일이라고 하는 병에 걸렸다”는 논평을 했으며, 지금은 “독립한 자질이 없는 민족이다”는 책까지 나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쉬쉬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사상의 나빴던 점을 지적하고 반성하자고 하면 식민지사관이라고 비난하고 민족반역자라는 지탄을 받습니다.

 

   영국이 EU탈퇴를 앞두고 국민투표를 했을 때 영국의 지도자들은 어느 쪽이 “나쁘냐”를 생각하지 말고 어느 쪽이 “더”나쁘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사회가 복잡하고 갈피가 많아서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좋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고로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나쁘다고 단정하기 어려우니 어느 쪽이 더 나쁘냐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감각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국가를 위하여”라는 강력한 국가관이 없고 “우리는 훌륭한 민족이니 우리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이 훌륭하고 강하다는 구체적인 근거는 없고 믿음이 있을 뿐인 감상적인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촛불 민심은 박 전 대통령이 나쁘다는 점만 생각했고 박 정권이 무너졌을 때의 “국가의 운명”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국가를 해치려고 한 죄로 복역 중인 이석기를 석방하라는 사람들과 같이 촛불을 들었습니다. 박근혜만 몰아내면 국가는 망해도 좋다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국가를 위해서”는 결코 독재자의 주장이 아닙니다. 나라(國)는 집(家)입니다. 그래서 “국가(國家)”입니다. 집은 약해서 비가 새고 춥지만 형제간에 우의만 있으면 된다는 감상적인 민족주의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더 위험한 병적인 요인은 이러한 민족주의에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침투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외세를 배척하고 같은 민족끼리 주체적으로 통일하자”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공작원으로 하여금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놈 믿지 말자”, 𔄞.25는 미국에 의한 북침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조국 통일을 방해한 민족의 역적이다”는 등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국가주의를 점점 더 멀게 했습니다.

 

   민족주체 사상에서 볼 때는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 지휘권을 내 놓아라 할 수 있지만 국가를 위한다는 국가주의 사상에서 볼 때는 미국의 지휘 하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있지도 않는 광우병을 들먹여 촛불 시위를 하는 것과 “우리가 미국 덕택으로 이만큼 커졌으니 의리를 아는 우리는 이제 미국 소고기도 먹어 주어야 하고 미국 차도 사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국가를 위해서 어느 것이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은 앞으로 수세기 동안 경찰국가로 남을 것이라고 하는 추세를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고 국가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강의 기적만 알고, 국민소득 2만 불을 넘긴지 10년이 가까운데도 3만 불을 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약점을 모르면 안 됩니다. 
   “나라가 망한다”는 개념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UN이라는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국력이 약해져도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로 잘 사는 것과 가난뱅이로 못 사는 것의 차이는 심각합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국민소득 3만 불을 구가하든 나라들이 1만 불선으로 떨어져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타산지화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곧 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세대들은 국민소득 500불 때의 고생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해방 되었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6.25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든 필자는 국민소득 500불 시대의 괴로움을 체험했는데, 하루 두 끼 먹기가 예사였던 때의 국민들은 “해방이 악방이다. 차라리 일제시대가 좋았다”는 푸념을 할 형편이었습니다.
 
   지금은 국제주의(國際主義)로 기울었든 선진국들이 국가주의(國家主義)로 돌아서고 있는데 국가가 약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영국 국민은 “영국은 영국이지 유럽의 일부가 아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며, 미국은 “세계 경찰국의 역할을 하다가 미국이 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계속 한국을 지켜 주리라는 망상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좌파의 숙주는 우파입니다. 우파 기득권자들이 사리사욕이나 챙기니까 차라리 좌가 좋다고 기울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좌파 중에도 부정 축재한 자가 있다는 사실이 청문회에서 드러났습니다. 이제는 우파도 좌파도 반성할 때인 것이며 그 공통분모는 “애국”입니다.

 

二. 정치가들의 의식 구조
   사실은 정치가들이 무식하고 공부를 안합니다. 한자 교육이 없어진 후로 사회과학이 후퇴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문 지식 없이 상식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식하다는 실 예를 들자면 많지만 몇 가지만 들겠습니다.
  
   (A)뉴딜정책이 경제를 살렸다는 것만 알고 행정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을 모르며, 미국의 법치주의가 뉴딜 때 확립되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모를 만큼 무식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강력해진 행정이 민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이를 예방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행정에 관한 대통령위원회(Presidential Committee of Administration)에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를 들여다보라, 즉 monitor 하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CIA)를 강화했는데, 그 CIA와 짜고 해먹으면 그만 아니냐고 루즈벨트는 다시 연구하라고 했습니다. 가령 FDA가 백만원 뇌물 먹고 허가 해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보부를 두었는데 그 정보부와 짜고 5십만원씩 나누어 먹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연구한 결과 정보기관을 더 만들어 서로 들여다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검찰 정보부도 경찰 정보부도 강화했습니다. 지금은 더 많은 정보기관이 서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실례로 2013년에 CIA 부장이 여자 친구에게 정보를 흘린 것을 FBI가 적발하여 파면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미국 정보기관이 독일 수상의 휴대폰을 도청 한 것이 탄로 나서 독일이 오바마 대통령에 사과하라고 했는데 야당인 공화당에서 사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럽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국 정보활동의 대가라는 것을 알아라는 것이었지요. 미국에서는 출세하면 정보활동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법치주의는 빈틈없이 유지되고 그 큰 나라에 그렇게 많은 인종이 모여 살아도 법치주의에 의해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문 대통령은 이런 공부를 하지 않아 무식한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국정원은 국내 정보활동을 못하게 하겠다”고 공언(公言)했습니다. “북한 간첩이나 공작원은 국외에서만 활동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인기만 얻으면 국가는 망해도 좋다는 망언입니다.
   과거 중앙정보부의 횡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로되 그것을 바로 잡는 방법은 경찰, 검찰의 정보활동을 강화하여 서로 들여다보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같이 경찰 위에 검찰 있고 검찰 위에 국정원 있다는 관행은 시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 정치하고 있습니다.  

 

   (B)학문과 교육이 다르다는 원칙도 모릅니다. 
      새로운 것을 연구, 개발하는 학문과 연구, 개발, 경험한 것을 가르치는 교육이 다르다는 원칙은 1930년대의 미국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간 원칙이 되었습니다.
   19세기 까지는 인류 앞에 많은 미지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연구해야 했고 연구한 것은 가르쳐야 했습니다. 
   따라서 두 기능을 구별할 필요도 없었고 구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던 인간이 달나라를 지나 우주를 날게 되었고, 민주주의 발생 이후로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근대적 독재 등등 많은 체제를 경험했으며, 간통한 여자에게 돌을 던지던 세상에서 간통죄 폐지까지 경험했고, 남녀 7세 부동석에서 남녀 공학도 경험했습니다. 이른바 고도 지식화 사회요 하이 테크놀로지 세상이요 복잡하고 갈피가 많은(複雜多岐) 사회구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새로운 연구개발도 바쁘지만 이미 연구, 개발, 경험한 것을 가르치기도 바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기능을 정책적, 제도적으로 구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기능을 구별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점은 많습니다.
   당장 시급한 것이 학문과 교육이라는 두 기능을 수행하는 대학과 교육적인 기능만 수행하는 직업인(職業人) 양성학교(비지니스 스쿨)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비싼 등록금 내고 4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대학에 들어가야 배우게 된다는 모순된 제도 하에 있습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일제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교육기본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그런 엉터리 교육기본법 하에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정치가들이 100%에 가까운 것입니다. 무식에도 정도가 있는데 너무 심하다는 생각입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독창력 살리는 교육이라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저명인사 중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듣기는 좋을지 몰라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19세기라면 독창력 살리면 비행기 만들 생각도 했을 것이고 자동차 만들 생각도 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달나라 가는 기술을 배운 다음에 독창력 살려야 할 때이며 세계사, 동양사, 국사에 통달한 후에 독창력 살려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꼴이 되고 말 것이며 “모방”, “표절”, “뒷북 치기”나 하는 학자 지식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학문과 교육이 다르다는 원칙을 알면 그 다음에는 “학문은 자유지만 교육은 자유가 아니다”는 원칙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은 이를 모르며 대통령부터도 모릅니다. 
   그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학문은 절대적 자유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국가의 법령에 따르는 질서정연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김정은이 근대 최고의 영웅이라는 연구를 해도 정치권력이 이를 금하거나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칠 때는 국법이 간여하여 처벌해야 합니다.
   연구할 분야보다 가르쳐야 할 분야가 더 많아졌으니까 가르치는 것을 국가의 교육정책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해야 합니다. 가령, 오늘날 “교육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초등학교에서 인수분해나 미적분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어서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이 많아질 형편입니다만 처벌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국정교과서를 없애겠다고 했는데 이는 교육의 질서를 없애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고 무식한 발상입니다.
   2차대전 때는 교육과 교육자와 학생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나라가 많았는데 특히 일본이 심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대전 후에는 교육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를 고비로 거의 다 없어졌고 국정교과서도 다 부활되었습니다. 영국의 경우는 대처 수상 때 여왕 직속 하에 교육 감시기구를 두었고 일본의 경우는 “교육의 자유는 망국의 자유”라는 주장이 득세하여 교육의 자유를 주장하는 단체들이 없어졌습니다.
   교육의 자유를 주장하는 전교조 같은 집단은 𔄞.25는 북침으로 시작되었다”, “천안함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이 저지른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남북통일을 가로막은 자다”는 등을 마음대로 가르치겠다는 주사파의 주장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C)국가의 체제(體制)도 모르는 정치가가 너무 많습니다.
      처음 휴전선에 북한이 판 땅굴이 발견 되었을 때 북한은 남한에서 판 것이라고 했는데 일본 신문 기자가 이를 보러 왔습니다. 필자가 그에게 “기자님이 보기에는 어디에서 판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남한이 판 것이 아니라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런 큰 장기간의 공사를 비밀리에 할 수 있는 체제(體制)는 북조선이지 남한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남한에서 그런 장기간의 공사를 하고 그 많은 예산이 지급되었다면 일본까지도 소문이 났을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는 체제를 아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남한이 비밀리에 공장을 만들어 잠수함을 만들고 비밀 요원을 조직해서 한국 군함을 침몰시켰다면 소문이 났을 것이며 그런 공작을 비밀리에 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만약에 이명박이 개인적으로 사재(私財)를 털어서 했더라도 비밀리에 할 수는 없었다. 한국은 그런 체제의 국가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도 지식인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국가관이 없고 국가의 체제에 대한 관심도 없고 오직 “민족”, “민주”, “주체”만 알고 있으니 한심한 것입니다.
   “민주”, “민중”, “자유”면 모든 것이 정당화 되어버리는 이런 사고방식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민주주의 하는 것이지 민주주의를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다. 1953년에는 일본 동경대학 총장 난바라 시게루(南原 繁)가 “인간과 정치”라는 저서에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 않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만드는데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이념논쟁에 제동을 걸었고 제3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민주를 위해서는 무조건 목숨을 바치려는 경향하에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서”가 “민족을 위해서”보다 앞서야 합니다.
 
三. 정치문화의 몰락
   우리나라에는 “정치문화”라는 용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정치가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를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정치문화”는 Political Culture의 번역인데 Political  Culture 라는 용어가 생긴 연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2차대전 후에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 되고 영국, 미국이 그 지도국 처지에 있었는데 미국 학계에서는 다 같은 제도인데도 국가 마다 다른 정치현상이 일어나는데 왜 그러하냐? 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연구결과로 “나라마다 정치가 처해 있는 문화가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문화를 Political Culture라 하게 된 것입니다.
   즉, 정치문화란 정치의 바탕에 있는 문화지 정치현상 그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정당은 헤쳐 모여가 심하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문화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에는 신의 의리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정당에도 헤쳐 모여가 심하다”고 하면 옳은 말입니다. 즉, “신의”, “의리”가 정치문화고 “헤쳐 모여”는 정치현상인 것입니다.

 

   영국의 정치문화에는 “신사도”가 있습니다. 영국 정가들에게는 “우리는 신사다. 우리가 마주 앉으면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 외에는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은 비합리적(非合理的)이기 때문에 못하지만 합리적인 것 (Reasonable)은 다 할 수 있다는 자부심입니다.
   미국의 정치문화에는 실용주의가 있습니다. 실용주의는  Pragmatism의 번역인데 “정확하고 정의로워야 실용성이 있다”는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부를 미리 만들어 이민 온 것이 아니고 자유의 신대륙에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내 권리는 내가 지킨다는 독립 정신으로 살아가다가 생긴 국가니까 국민의 생각에는 정확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고 실용적이라야 한다는 철학이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서부활극에 그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서부활극의 영웅 존 웨인이 죽었을 때 카터 대통령이 “미국정신의 상징이 사라졌다(Symbol of American Spirit has gone)"고 애도 했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실용성이 있어도 정의롭지 못하고 정확하지 않으면 Pragmatism이 아닙니다.
   일본의 정치문화에는 의리(義理)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당의 헤쳐 모여가 거의 없습니다. 최근에는 의리(義理) 때문에 바른 말 못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문화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해방 당시에는 정치가들에 양반 기질, 서생원 기질 같은 것이 있었고 멋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지요. 쌍것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을 예사로 하고 있으니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정치문화에 관해 생각하는 학자도 정치가도 없으니 더 한심합니다.
   있다면 사색당파 싸움의 잔재라고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색당파 싸움의 배후에는 중국 세력이 있었습니다. 한글을 발명하니까 중국이 싫어했고, 십만 양병을 하자니까 중국이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중국파와 반대파가 다투었으니 합리성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고 오직 죽이기 아니면 살리기라는 투쟁만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신 차려야 할 때인데 사드 배치를 두고 그 당파 싸움의 잔재가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국방에 중국이 간여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중국이 싫어하니 하지 말자는 말을 부끄러움도 없이 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경제보복 같은 것에 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경제보복을 준비하자”, “정치와 경제를 동일시하는 중국과는 더 이상 거래 못하겠다”고 강하게 나가야 국민이 정부를 믿을 것인데 사색당파 싸움과 꼭 같은 일이 전개되고 있으니 한심한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를 국민, 학자, 정치가,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