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바로알기

大學章句序(김시철)

  • 등록일 2015-04-01
  • 조회수 3
첨부파일

大學章句序

 

大學之書

古之大學所以敎人之法也ㅣ라.

蓋自天降生民으로

則旣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언마는

이나

其氣質之稟

或不能齊일.

是以不能皆有以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ㅣ라.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出於其間則天必命之하사

以為億兆之君師하야

使之治而教之하야

以復其性케하시니,

伏羲・神農・黄帝・堯・舜所以繼天立極而司徒之職과

典樂之官所由設也ㅣ라.

三代之隆

其法寖備然後

王宫國都以及閭巷

莫不有學하야

人生八歲어든

則自王公以下

至於庻人之子弟

皆入小學하야

而教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

禮樂射御書數之文하고

及其十有五年이어든

則天子之元子衆子

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

與凡民之俊秀皆入大學하야

而教之以窮理正心脩己治人之道하니,

又學校之教大小之節

所以分也ㅣ라.

夫以學校之設

其廣如此하고

教之之術

其次第節目之詳

又如此而其所以為教

則又皆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ㅣ오,

不待求之民生日用彝倫之外.

是以當世之人

無不學하고

其學焉者

無不有以知其性分之所固有

職分之所當為하야

而各俛焉하야

以盡其力하니,

古昔盛時所以治隆於上하고

俗美於下하야

而非後世之所能及也ㅣ러니.

及周之衰하야

賢聖之君不作하고

學校之政不脩하야

敎化陵夷하고

風俗頽敗하니

時則有若孔子之聖이사되

而不得君師之位하야

以行其政教일.

於是獨取先王之法하사

誦而傳之하야

以詔後世하시니,

若曲禮・少儀・内則・弟子職諸篇

固小學之支流餘裔

而此篇者

則因小學之成功하야

以著大學之明法하니,

外有以極其規模之大

而内有以盡其節目之詳者也ㅣ라.

三千之徒

蓋莫不聞其説이언마는

而曾氏之傳獨得其宗일세.

於是作為傳義하야

以發其意러시니

及孟子沒而其傳泯焉

則其書雖存而知者鮮矣.

自是以來

俗儒記誦詞章之習

其功倍於小學而無用하고

異端虚無寂滅之教

其高過於大學而無實하고

其他權謀術數一切以就功名之説

與夫百家衆技之流

所以惑世誣民하고

充塞仁義者又紛然雜出乎其間하야

使其君子

不幸而不得聞大道之要하고

其小人으로

不幸而不得䝉至治之澤하야

晦盲否塞하고

反覆沈痼하야

以及五季之衰而壊亂極矣.

天運循環

無往不復일세.

宋德隆盛

治教休明이라.

於是河南程氏兩夫子出하사

而有以接乎孟氏之傳하야

實始尊信此篇而表章之하시고

既又為之次其簡編하야

發其歸趣然後

古者大學敎人之法

聖經賢傳之指粲然復明於世하니,

雖以熹之不敏으로도

亦幸私淑而與有聞焉이라.

顧其爲書猶頗放失일세

是以忘其固陋하고

采而輯之하며

間亦竊附己意하야

補其闕略하야

以俟後之君子하노니

極知僭踰無所逃罪

이나

於國家化民成俗之意

學者脩己治人之方

則未必無小補云이라.

淳熈己酉二月甲子新安朱熹하노라.

 

 

『대학』이라는 책은 옛날 대학에서 사람 가르치던 법을 다룬 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내림으로부터 이미 仁義禮智의 본성을 부여하지 않음이 없었지마는 그 타고나는 기질은 가지런할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나 그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는 없고 또 그것을 온전히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사이에 더러 총명 예지가 있어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하늘은 반드시 그로 하여금 억조창생의 임금이 되도록 명하여서 다스리고 교화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그래서 복희・신농・황제・요임금・순임금이 하늘의 뜻을 이어 인간 최고의 법도를 세우고 백성을 교화하는 司徒니 典樂이니 하는 직책과 관청을 설치하게 되었다.

三代가 융성하여 그 법도가 차츰 갖추어진 뒤로 天子의 도읍이나 제후의 도읍에서 일반 백성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없는 곳이 없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 여덟이면 王公으로부터 庶人의 자제까지 모두 小學에 들어가서 물 뿌리고 비로 쓸어 청소하며 손님을 응대하고 어른에게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도와 예법・음악・활쏘기・차 운전・서예・산술의 글을 가르침 받았다.

열다섯이 되면 천자의 모든 아들로부터 公・卿・大夫・元士의 아들과 모든 평민의 뛰어난 아들들이 함께 대학에 들어가서 진리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스스로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를 가르침 받았다.

그래서 학교의 교육에 크고 작은 마디가 나누어지게 되었다.

학교의 설치에 있어 그 광범함이 이와 같고 교육의 방법에 있어 그 차례 절목의 상세함이 또 이와 같았으며 교육의 내용으로 된 것은 모두 임금이 躬行하여 心得한 결과에 근본을 두었고 民生의 日用 彛倫 밖에서 구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사람들은 배우지 않은 이가 없었고 그 배운 사람들은 그 본성으로 固有한 것과 職分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함이 없어서 각자 그에 힘을 다하여 노력하였다.

이것이 옛날 태평성대 때에 위로 정치가 융성하고 아래로 풍속이 아름다웠던 까닭이다. 후세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周 나라가 쇠퇴하게 되자 聖賢다운 임금이 일어나지 않고 학교의 운영도 순탄하지 않아서 敎化는 내리막길을 걷고 풍속은 頹敗하게 되었다.

이 때에 孔子 같은 聖人이 나왔으나 君師 자리를 얻지 못하여 그 정치 교육을 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홀로 先王들의 법도를 취하여 외어서 전함으로써 후세에 알려주었다.

曲禮, 少儀, 內則, 弟子職 여러 편은 본디 소학에서 배우던 것의 支流거나 나머지이고 이 편은 소학 공부를 이루고 나서 그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배우던 밝은 법도를 확실히 한 것이다. 밖으로는 그 규모의 크기를 끝가지 하였고 안으로는 그 절목의 상세한 것을 다하였다.

삼천 문도들이 모두 그 講說을 듣지 않음이 없었지만 曾子의 傳承만이 홀로 그 宗統으로 되었다. 그래서 傳義를 지어 그 뜻을 펴 밝혔는데 孟子가 죽자 그를 전함이 끊어지니, 그 글이 비록 남아 있으나 아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이 뒤로 俗儒가 기억하여 외우고 글 짓는 풍습에 물들었는데, 그 功은 소학보다 배나 되었지만 쓸 데가 없었고, 異端의 虛無니 寂滅이니 하는 가르침은 그 높이가 대학을 지나쳤으나 실속이 없었다. 그 밖에도 권모술수 일체로써 功名을 성취하는 학설과 百家의 유파나 뭇 技術의 유파가 혹세무민하고 仁義를 틀어막는 원인으로서 또 그 틈에서 어지럽게 섞여 나왔다. 그래서 그 시대의 군자들로 하여금 불행하게도 大道의 要諦를 들어보지 못하게 하고 그 시대의 소인들로 하여금 불행하게도 이상적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어두워 눈앞이 안 보이고 앞길이 꽉 막혀 엎치락뒤치락 병이 깊어져서 五代 말기의 쇠퇴기에 이르자 붕괴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하늘의 운행은 순환하는지라 갔다가 되돌아오지 않음이 없어서 宋 나라의 덕이 융성하여 정치 교화가 아름답고 밝게 되었다.

이에 河南에서 程氏 두 선생이 나와 맹자의 전함에 이어서 실제로는 처음으로 이 편을 尊信하고 널리 드러내었으며 다시 그 簡策들을 순서 있게 정돈하여 그 내용의 흐름을 펴 밝혔다.

그런 뒤에야 옛날 대학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던 법도와 聖人의 經典・賢人의 傳文에 담긴 지침이 찬연히 다시 세상에 밝혀졌다.

비록 朱熹가 불민하지만 다행히 私淑하여 그 분들의 학맥으로서 가르침을 듣게 되었는데, 그 책 됨됨이를 살펴보니 아직도 상당히 흘리고 잃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의 固陋함을 잊고 簡策들을 뽑아내어 다시 모으고는 그 사이에 가만히 스스로의 의견도 첨부하여 빠지고 간략한 부분을 보충하고서 뒷날의 군자들을 기다린다.

외람되고 분수에 넘쳐서 죄를 피할 곳이 없음을 잘 알지만,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성취하려는 뜻과 학자들이 修己 治人하는 방도에라면 조그만 보탬이 없지도 않을 것이다.

 

淳熙 己酉(1189)년 2월 甲子일에 新安 朱熹가 序한다.

 

 

김시철(현토 번역)